< 13. 심연의 깊이(3) >
암흑상회를 구성하는 그들은 명명백백하게 ‘위대한 별’의 의지를 받드는 자들이었다. 아무리 데몬로드라고 할지라도 암흑상회를, 암흑상인을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다.
하지만 이곳은 지구가 아니다. 지구는 ‘마지막 결전의 장소’였고, 데몬로드라면 암흑문을 통해서 지구로 향하는 ‘문’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떠올렸다.
‘경유장소.’
우리엘 디아블로. 그의 몸으로 문을 만들었을 때의 일이다. 균열이 충분히 생기지않아서 중간 경유의 장소로 나찰산의 문을 연 것이다. 내가 나찰산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문 덕분이었으니.
‘데몬로드가 가능하다면 암흑상인들도 가능하다.’
암흑상인들 역시 다른 계의 문을 열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물건’을 구하는지, 알 것 같았다.
“끄아아악!”
“대아귀들이 갑자기 왜······!”
아무리 야찰이라 할지라도 대아귀는 괴물 중의 괴물이다. 70계층 이상에서만 서식하는, 그 크기에 따라서 힘을 발휘하는 욕망의 덩어리.
야차가 모여서 상대하지 않으면 대아귀의 대적은 불가하다. 십이나찰 모두가 나섰다고 한들 수백의 대아귀를 한꺼번에 처리할 순 없었다.
그리고 대아귀는······ 야차들을 무차별하게 삼켰다. 이어 배를 채운 대아귀가 우악스러운 날개를 펼쳐서 다시 하늘로, 결계의 너머로 사라졌다.
결계의 너머. 검은색 블랙홀과 같은 게 그곳에 있었다.
‘심연.’
심연으로 통하는 문이다. 나찰들이 넘어가보려고 했지만, 무언가에 막힌 듯 다가서지 못했다. 오로지 대아귀······ 암흑상인들만이 문을 통해 심연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약탈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약탈행위였다. 암흑상인들은 강제로 물건을 빼앗고, 그것을 심연 속 암흑상회에서 판매하는 것이다. 그중 쓸만한 건 데몬로드에게 제공되는 식이었고.
이그닐과 이타콰의 알 역시 저런 식으로 구했을 것이었다. 하기야 자신이 낳은 알을 얌전히 양도할 미친 용이 어디 있겠는가.
“누가 더 많이 사냥하나 내기할래?”
“연혼제! 지금 상황은 장난이 아니라고 했을 텐데?”
연혼제의 손에는 어느덧 긴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자신의 몸길이 정도로 길고 날카로웠지만 그만큼 사용하기가 까다로워보였다.
하지만 연혼제는 그 검을 장난처럼 휘둘렀다. 이후 도약하여 홀로 대아귀를 향해 돌진했다.
“저 멍청이가······.”
구화린이 이마를 짚었다.
협력을 하기로 했지만, 연혼제는 검에 미친 야차다. 나사가 빠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홀로 대아귀를 사냥하고 있었다.
장검의 날에 깃든 주홍빛의 선명한 기운. 강기다. 기운을 유형화하여 무엇이라도 잘라내는 기술. 경지에 이른 검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었다.
대아귀의 살점을 가르고, 뼈를 자르며 연혼제가 웃었다. 피가 튀겼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하하! 재밌다, 재밌어!”
검룡이 아니라 광룡(狂龍)이라 해야 어울릴 것 같았다.
“나찰들께서 놈들을 구제하실 거다! 우리가 할 일은 대아귀를 한쪽으로 몰아가는것! 주술과 도술에 능한 야차들은 우리를 보조하고, 무공에 능한 야차는 서로의 간격을 넓게 해서 대아귀를 상대한다!”
구화린은 제법 전술에 능한 것 같았다. 순식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파악하고 주변을 장악했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리더로서 나쁘지 않은 부류였다.
‘오로지 야차만을 잡으려고 이만한 병력을 동원했을까?’
나는 생각했다. 모든 변수를 떠올렸다. 암흑상인. 이곳의 야차들은 뛰어나긴 하지만, 억지로 결계를 뚫어내 병사를 배치할 만큼 욕심을 낼 정도는 아니다.
아무리 암흑상인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리스크 없이 이 정도 규모의 병력을 움직이진 못할 터였다. 나는 데몬로드이기도 하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암흑상인은 거래하여 벌어들이는 포인트로 자신들의 ‘격’을 올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물건을 구해오는 병사도 비슷할 터였다.
‘서고. 저들이 노리는 건 무공이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무공. 진정으로 체계가 잡혀있는 기술서들!
나는 무공서를 보고 새로운 세계를 들여다봤다. 무공은 야차와 나찰들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모든 야차에게 공개가 되지만, 야차가 아닌 이들은 결코 볼 수 없는 게 무공서였으니.
더불어 물건만을 구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닌 듯싶었다.
‘균열이 커지고 있군.’
침범당하고 있었다. 이들의 세계가.
심연의 손길이, 뻗치는 중이었다.
고개를 돌려 서고를 바라봤다.
대아귀 중 한 마리가 서고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진 틈을 타서.
막아야 한다. 무공이 심연으로 흘러들어가 데몬로드들에게 도달한다면, 그들은 더욱 강한 힘을 얻게 될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곳에 도달하게 해서는 안 된다.
생각을 하기도 전에, 발이 움직였다.
공간의 보석에서 검을 뽑았다. 알라무어의 직검!
승천자의 망토가 내 의지를 읽고 그 즉시 양 어깨에 장착되었다.
그러자 바람의 흐름이 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풍이 순풍이 되어 저항을없애줬다. 더욱 빠르게 도달하여, 대아귀의 옆구리에 매달렸다.
푸우우욱!
콰앙!
하지만 부족했다. 매달린 즉시 대아귀의 몸통에서 튀어나온 손 하나가 나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쿨럭!”
각혈했다. 금강불괴가 아니었다면 뼈가 나갔을 것이다. 이윽고 승천의 망토가 억지로 몸을 움직이며, 대아귀의 몸통에서 솟아난 수많은 손들로부터 나를 지켜줬다.
나는 머리를 흔들고 다시 놈을 노려봤다.
‘죽음의 손길.’
주변 바닥이 어둡게 물들었다. 수많은 ‘죽음의 손’들이 튀어나와 대아귀의 몸통에서 솟아난 손들을 막아섰다.
승천자의 망토가 내 몸을 띄웠다. 대아귀의 약점은 목이다. 다른 부위보다 목이 약했다.
촤르륵!
대아귀의 몸에 닿은 즉시 달렸다. 그대로 목으로 다가가 검을 꼽았다. 그러자 대아귀의 몸이 크게 틀어졌다.
키에에에에에에엑!
귀가 먹먹했다. 대아귀의 비명은 그만으로도 마법적인 타격을 준다. 듣는 이로 하여금 순간 기절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승천자의 망토는 대마법(S)의 방어가 가능했다. 덕분에 기절만큼은 면할 수 있었다.
이어서 대아귀가 자신의 얼굴을 몸에 파묻었다. 그 순간 대아귀의 얼굴이 등을 통해 나타났고, 나를 향해 커다란 입을 벌리며 달려들었다.
찌이익!
가까스로 피했으나 옷이 찢겼다. 왼쪽 팔뚝의 절반을 뜯어 먹혔다. 뼈가 상하진 않았으나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젠장!’
대아귀의 속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능력의 차이가 너무나도 컸다.
대아귀의 얼굴이 분열했다. 순간 수십 개로 불어나 다방면에서 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피하세요!
―이 나쁜 아귀!
―풀들아 저분을 지켜드리렴.
라임, 라율, 라온.
풀잎의 정령들이 나타난 건 그때였다.
계약자를 지키고자 강제로 헌신하며 힘을 발휘한 것이다. 여태껏 야차와 나찰들을 피해 모습을 드러내는 걸 피하고 있었지만, 내 죽음을 지켜볼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순식간에 바닥에서 줄기들이 자라났다. 이곳, 나찰각에 있는 나무는 모두 뿌리가 길고 철보다도 단단했다.
대아귀의 몸이 줄기에 묶였다. 찰나의 순간 움직임이 굳었고, 그 사이에 나는 몸을 빼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직접적인 타격은 처음 이후로 줄 수 없었다.
역부족인가? 나로는 지킬 수 없단 말인가!
“잘 버텼다.”
그때, 내 위로 그림자 하나가 솟아났다.
고개를 들었다.
심술궂게 생긴 노인이 그곳에 있었다.
월천!
내게 탈혼무정검을 건네주고 죽었던 나찰. 그가 도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도는 평범하기 짝이 없었지만, 푸른색 강(强)의 기운이 쓰여 있어 세상 모든 걸 절단해버릴 듯했다.
“미물 따위가 우리의 역사를 탐하느냐?”
서고의 책들은 야찰과 나찰들의 역사였다. 그들이 살아오고 숨 쉬어 온 기억이 그곳에 있었다. 월천만은 그 값어치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노했다.
그의 분노가 하늘에 닿았다. 그가 검을 휘두른 순간, 콰아아아아앙!
대아귀의 몸이 반으로 갈렸다. 검강이 바람처럼 달려 나가 그대로 대아귀의 몸을 반으로 찢어발기고, 바닥에 거대한 균열을 만들었다.
검강을 씌우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발출하다니!
이후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대아귀는 조각났다. 수백, 수천 조각으로 나뉘어 재생이 불가능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1초 이하였다.
압도. 그 외엔 설명이 불가했다.
이어, 월천이 나를 돌아봤다.
“고맙다. 네가 버텨준 덕분에 지킬 수 있었다.”
“······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결정적으로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
“정령의 사랑을 받는 야차라. 오랜만에 좋은 구경을 했군.”
월천이 잔잔한 미소와 함께 떠났다. 바람처럼.
나는 쓸려나간 팔을 부여잡았다. 저 멀리서 나찰들과, 오룡을 포함한 야차들이 빠르게 상황을 진압하는 게 보였다.
“대라선이시다!”
“대라선께서 나타나셨다!”
나찰각 전체에 태풍이 몰아쳤다. 구름을 타고 지팡이를 든, 원숭이도 인간도 아닌묘한 모습을 한 남자가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나타난 것이다.
70cm는 되어 보일까 싶은 정도로 작았지만, 그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태풍이 불고 번개가 내리쳤다. 동시에 검은색 균열이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대라선. 나찰계를 지배하는 절대자의 이름.
그가 등장한 즉시 암흑상인들이 대아귀를 버리고 도망갔다. 대적불가의 상대임을보자마자 알아챈 것일까.
“한 마리도 살려 보내지 마라!”
야차와 나찰. 그들이 힘을 합치니 심연조차도 함부로 건들 수 없음이라.
내가 겪은 어떠한 집단보다도 강력했다.
가벼운 전율과 함께 나는 그들의 전쟁을 두 눈에 담았다.
* * * * *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분위기가 좋지는 않았다.
암흑상인 몇을 인질로 잡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먼지처럼 증발해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누가 공격한 것인지, 아무 것도 밝혀진 게 없었다.
“대체 누가 나찰각을 공격한 거지?”
“저러한 생명체는 나찰산에서 본 적이 없는데.”
“기묘하군. 기묘해.”
대아귀는 범인이 아니었다. 대아귀 역시도 그저 ‘조종’을 당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전신이 새까맣고 모자만을 쓴 괴생명체. 아니, 생명체인지조차 확실치가 않았으니.
저들이 암흑상인이라는 건 오로지 나만 알고 있었다.
전쟁을 수습하고, 결계가 다시 세워졌다. 심연으로 이어지던 균열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리고 공문이 내려왔다.
―이번 성흔 쟁탈전을 내년으로 미룬다.
―나찰들은 계층 간의 경계를 보다 확실히 한다.
―앞으로 오 일 후, 나찰각을 비운다. 모든 야차는 자신의 산으로 돌아간다. 이는 108일간 ‘백팔결계(百八結界)’의 의식을 행하기 위함이다.
―이 모든 건 대라선의 의지이다.
이견은 없었다. 대라선. 그가 결정했다면 야차와 나찰은 따라야 한다.
백팔결계는 결계 중 가장 강력한 것이다. 그만큼 이번 사안이 심각함을 뜻했다.
남은 오 일 동안 그들은 사라진, 혹은 죽은 야차들을 기렸다. 대아귀의 입에 물려 심연 속으로 사라진 야차들도 수십을 헤아렸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가봐야겠군.’
준비를 했다.
전이. 그리하여 진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로 그들이 ‘물건’을 구하기 위해 온 것이라면, 암흑상회에서 납치해간 야차들이 판매될 수도 있음이었다.
그리고 암흑상인들에 대한 조사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모든 일의 원흉일 수 있기에.
생각도 못 해본 방향이었다. 그저 데몬로드들만이 문제라고 여겼건만.
‘전이.’
[72시간(심연에서의 144시간) 동안 ‘전이’를 행합니다.]
[전이가 시작되었습니다.]
< 13. 심연의 깊이(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