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심연의 깊이(2) >
머리가 복잡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검은 야차의 인. 야차와 나찰과의 싸움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능력.
과거 이 힘을 지녔던 자는 대학살을 일으켰다. 그저 싸워서 승리하는 것보다, 죽여서 얻는 이득이 더 많기에 그러한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얼마나 강했던지 나찰마저 죽이는데 성공했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도 죽었다.
‘나찰 중에는 족히 수만 년을 살아온 자도 존재한다.’
십이나찰. 그들이 모를 리 없었다. 내가 검은 야차의 인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방관하고 방치해둔 것이다.
왜? 나는 잠재적 위험분자일 텐데?
전사의 의식과 승천의 의식을 통과했기 때문에?
수천 년 만에 나온, 기대 받는 유망주라서 그런 걸까.
그들의 전승을 자세히 모르니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내 손에 피를 묻히는 순간,절대 피할 수 없는 화살이 곧바로 나에게 날아올 거라는 점이었다.
‘요르문간드라면 시원한 해답을 내려줄 수도 있을진대.’
요르문간드는 조용했다. 나찰산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마치 죽은 것처럼 미동조차 안했다. 몸을 웅크리고 크기를 더욱 줄여서 목걸이처럼 매달려있을 따름이었다.
그녀라면 이곳 나찰산과 나찰각에 대하여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움직이질 않으니 명쾌한 해답도 구할 수 없었다.
‘목표가 높아졌을 뿐, 달라진 건 없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희소식이었다. 어쨌든 나를 나찰각에 들여놓은 것은 나찰들이었다. 죽일 셈이었다면 진즉에 죽였을 것이다.
살려두고 들여놨다는 건 그들이 내게 바라는 ‘기대’가 있다는 뜻.
그저 욕심을 부리지만 않으면 된다.
균형. 모든 건 균형을 잡아야 하는 법이었다.
힘에 취해, 피에 취해 움직이거든 황천길로 가는 길만 빨라지게 되리라.
‘조급함은 스스로를 죽이는 독이야.’
강해지고 있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강해지고 있다는 게 체감이 됐다. 오히려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성장이었다.
여기서 더 조급함을 낸다고?
너무 빨리 먹은 음식은 체하기 마련이었다. 과거, 마검사 클래스를 얻고 누구보다빠른 성장을 했지만······ 잘못된 습관과 ‘극의’를 보는 게 불가능하다고 확신하며 스스로에게 한계를 선고한 것처럼.
가만히 앉아 명상을 시작했다.
머릿속 잡음을 없애고 오늘의 싸움을 복기하였다.
지금은 오로지 나만의 성장을 생각할 때였기에.
* * * * *
검은 야차의 인을 지닌 야차가 백보신권을 익혔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검은 인이 빛났다는 이야기도 부풀려지고 와전되며 ‘닿으면 저주에 걸린다더라.’하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무백. 들었어? 백보신권이래.”
오룡 중 하나, 무룡(武龍) 무백.
거대한 전각을 통째로 사용하는 그는 명망 있는 ‘무릉세가’의 소가주였다.
99명의 야차들을 같은 조로 두고 있으며 단순한 무력으로는 쟁털전에 참여하는 야차들 중 가장 강할 것이라 소문이 자자했다.
그의 앞으로 주황색의 머리칼을 지닌 야차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여기는 너희 집 안방이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연혼제.”
“우리 사이에 놀러올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리 쩨쩨하게 굴어?”
검룡 연혼제!
검에 미친 야차. 그 역시 오룡 중 한 명이었다.
“그나저나 백보신권은 잠룡 주가람만 익힌 거 아니었나? 그 괴물 같은 놈을 빼고 다른 놈이 백보신권을 익힐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러는 네놈도 괴물이 아닌가. 검의 괴물.”
연혼제가 히죽 웃었다. 딱히 부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무백. 그 녀석, 내가 데려가도 되냐?”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이해해 줘. 너랑은 쟁탈전에서 싸우고 싶으니까. 이런 곳에서 서로 부딪혀봤자 이득이 없잖아?”
“그렇다면 걱정 마라. 내 관심 밖의 일이니.”
무백이 고개를 돌렸다. 이에 연혼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잠룡은 또 지붕 위에서 잠이나 자고 있을 테고, 암룡은 자기 스스로의 단련 외에는 관심이 없을 테니, 남은 건 적룡 구화린뿐이군.”
“검은 야차와 얽혀서 좋을 게 없다, 연혼제.”
“왜? 재밌잖아?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십이나찰 중 한 명을 죽였다고. 일천(日天).무려 태양신의 이름을 단 나찰을!”
광기마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무백은 아예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주변 야차들에게 눈빛으로 전했다. 지금 이곳에서 들은 말, 잊으라고.
나찰각에선 매우 불경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우리 가문에선 만 년에 한 번 태어날 재능이다, 뭐다 하면서 추켜세워 주지만, 궁금하잖아? 나찰을 죽였던 놈과 내가 싸우면 누가 이길지.”
“거둬들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는 전승된 이야기의 장본인이 아니다.”
“알아. 그래서 밑에 두고 키워준다는 거지, 내가. 전승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어차피 녀석도 반드시 피를 갈구하게 될 테니까. 그때 쓰윽!”
연혼제가 손으로 목을 그었다.
오룡 중에서도 검룡 연혼제는 제대로 미쳐있었다. 검에 미쳐서인지 다른 부분도 함께 놔 버린 것 같았다.
‘얽히면 피곤해지겠군.’
무백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에는 끼어드는 게 아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득이라는 걸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 * * * *
과거 나는 수많은 러브콜을 받았다. 강자이고 영웅이었던 나를 영입하려고 모든 국가가 손을 내밀었다. 가장 큰 도시를 준다는 곳도 있었고, 왕으로 옹립하여 떠받들겠다는 자들도 있었다. 어떻게든 나를 데려가려고 혈안이 된 자들이 많았단 뜻이다.
하지만 이런 황당한 러브콜은 처음이었다.
“적룡 구화린 아가씨께서 네놈을 원하신다. 영광으로 알아라.”
일급 백원후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을 때였다.
웬 근육질의 여자 야차 한 명이 다가와 대뜸 내게 말을 걸었다.
적룡 구화린. 그녀가 오룡 중 일인이라는 건 나도 안다. 그녀가 나를 낙점하여 조로 영입하고자 한다는 뜻인데······.
“할 말 있으면 직접 오라고 전해라.”
영입을 하겠다는 건, 영입의 의사가 있는 자가 직접 와서 거래를 하는 게 기본이었다. 이런 식으로 ‘들어와라!’하면 ‘네, 감사합니다.’하고 들어갈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굳이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다는 마음도 없었다. 야차들과 가까이 할수록 내가 그들과 다름을 알아차릴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혼자가 편하다.
‘의외긴 하군.’
나를 두려워하며 마냥 경계할 줄 알았다. 검은 야차의 인. 포식자의 증거. 그로 말미암아 적대심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실제로 대련장에 들어서자 대부분의 야차가 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러브콜이 올 줄은.
그만큼 성흔 쟁탈전의 승리가 중요하단 뜻일까?
내 말을 듣고 여자 야차의 표정이 더없이 흉포해졌다.
“무례한 놈!”
“네 주인은 발이 없나? 아니면 말을 못하는 건가? 하나하나 다른 자가 전해줘야 할 정도로 신체에 장애가 있다면 내가 사과하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을 하는구나.”
“전사라면 다수로 소수를 압박하는 저열한 짓거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전사의 품격을 아는 야차가 다른 이를 보내서 자신의 뜻을 전하지도 않을 거고 말이야.”
“감히······!”
야차로서의 자긍심. 모든 야차에겐 그게 있었다.
그 부분을 살살 긁자 여자 야차가 입을 다물었다.
너무 강하게 나간 건가 싶기도 하지만,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것보단 나았다. 지난 이십일이 넘는 시간 동안 나름대로 야차들의 생리를 연구한 나다. 약하게 보이면그들은 자신과 상대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됐어. 내가 할게.”
“아가씨.”
그러자 멀리서 지켜보던 구화린이 직접 나섰다.
직접 오지 않으면 전사가 아니다, 라는 말을 직설적으로 내뱉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일부러 들으라고 한 것도 있었고.
“좋아. 검은 야차라서 그런지 말에도 가시가 박혀있네. 부디 실력도 그 말투처럼 강렬하길 바랄게. 그러니까 내 조에······.”
“나는 누구의 조에도 들어갈 생각이 없다.”
“누가 내 말을 끊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 부분 분명히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구화린의 표정이 마냥 좋지는 않았다.
구화린은 마치 가시가 돋친 장미꽃 같았다.
그 가시를 내게 들이밀려고 한다면, 나는 피할 것이다. 함께 싸운다는 건 등을 맡길 수 있다는 의미다.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겠다면 들어갈 가치가 없다.
“두 번 말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에만 특별히 말할게. 내 조로 들어와. 성흔 쟁탈전에서 우승하면 너에게도 마땅한 자리를 약속할 테니까.”
“오오, 그거 좋은데. 나도 그럼 약속하지. 내 조로 들어오면 공청석유 두 방울에, 내 바로 옆자리도 내어주는 조건으로. 어때?”
그때였다.
불현 듯 옆으로 다가온 야차.
주황 머리를 지닌 미청년이었다.
검룡, 연혼제!
그를 보고 구화린이 미간을 구겼다.
“연혼제.”
“아, 대화중에 끼어드는 거 싫어했지? 미안. 그래도 가만히 낚여가는 걸 보고 있을 수는 없어서. 어디보자. 오한성이라고 그랬던가?”
하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다. 애당초 백보신권을 익히는 걸 숨기지도 않긴 했지만,검은 야차의 인이 빛나는 걸 보고 모두가 가까이 다가오지 않으려고 할 줄 알았다. 나도 그 편이 더 편했으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의 복병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둘 이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그 성흔 쟁탈전이라는 게 벌어질 때까지 고작 보름 정도가 남았다.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게 내 목적이었다. 쟁탈전은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다.
검룡 연혼제가 음흉한 미소를 숨기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오한성. 공청석유 두 방울로 부족하면 천년 묵은 하수오도 한 뿌리 내어주지. 이만한 영약은 다른 가문에서도 구하기 힘들 거야.”
“지금 나랑 뭐하자는 거지, 연혼제?”
“구애하잖아. 내 조에 들어오라고. 그러니까······ 응?”
연혼제가 불현 듯 고개를 돌렸다. 2초 정도 늦게 구화린도 하늘로 시선을 옮겼고, ―조심해라.
나찰산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요르문간드가 말했다.
쿠르르르릉!
동시에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
“저건 뭐야? 대아귀?”
“대결계가······ 뚫렸다고?”
연혼제와 구화린이 경악했다. 하늘에서 대아귀가 쏟아지고 있었다.
계층 간에 균열이 뚫려버린 것이다.
다른 야차들도 눈을 크게 떴다.
십이나찰 중 하나, 화천이 나타나기 전까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들 전투태세에 들어가도록!”
“화, 화천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한 야차가 묻자 화천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무언가가 대라선님의 결계를 억지로 찢고 들어왔다. 대아귀의 모습을하고 있지만 저놈들은 대아귀가 아니다!”
그를 비롯한 다른 나찰들도 모습을 보였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대아귀들을 막아섰지만 그 숫자가 워낙 많았다.
키에에에에에!
대아귀의 크기는 다양했다. 제일 작은 게 20m의 크기였고, 큰 건 50m를 넘어갔다. 소아귀에서 그대로 몸집만 큰 것 같이 추악하게 생긴 대아귀 한 마리가 대련장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촤아아아앙!
화천이 창을 들었다. 창에서 불꽃이 새어나오며 순식간에 대아귀의 머리통을 잘라냈다. 하지만 순식간에 머리가 재생했다.
그러더니 화천을 무시하곤 다른 야차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노오옴!”
화천의 전신에서 거대한 불의 날개가 솟아났다.
콰아아앙!
날아오르며 대아귀의 신체를 창으로 헤집었다.
창을 내리칠 때마다 대지가 들썩였다. 대아귀의 재생능력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공격이었다. 과연 나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신이 타버려서 재생이 불가능해진 대아귀가 바닥에 몸을 꿇렸다.
그러자 대아귀의 가슴 한편이 열리며, 은빛 기사의 투구를 쓴 검은색 인영이 비틀대며 튀어나왔다.
크기는 고작 1m나 되었을까. 전신이 그림자처럼 새까맣다.
순식간에 바닥을 차고 거리를 도약한 화천이 검은 인영의 몸통을 창으로 찔렀다.
땡그렁!
동시에 검은 인영이 투구만을 남기고 그대로 허공에 증발하듯 사라졌다.
그러자 화천이 고개를 돌리고 외쳤다.
“방금 내가 죽인 검은색 인영이 대아귀를 조종하는 본신이다! 대아귀의 가슴이나머리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모두 유념하고 대비하라!”
그 말을 남기곤 화천이 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곳곳에 떨어진 대아귀를 처리하는 게 그의 역할인 듯싶었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군. 대라선께서 친 결계를 뚫어? 대체 뭐하는 놈들이야?”
“연혼제. 농담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지금은 힘을 합쳐야 해.”
검룡과 적룡이 손을 잡았다.
주변의 모든 야차들이 그 둘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의미로 경악을 하는 중이었다.
검은 인영. 나는 저놈들을 안다.
‘암흑상인······!’
분명히 암흑상인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심연에 있어야할 암흑상인이 나찰각의 결계에 구멍을 뚫고, 대아귀를 조종하며 나타났단 말인가?
< 13. 심연의 깊이(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