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심연의 깊이(1) >
보통의 ‘스킬’들은 그저 생각하거나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발동이 되곤 한다. 하지만 그 스킬의 정착화에 안주하면 ‘깊이’가 없어진다. 과거의 나는 그것을 몰랐고, 나찰각에 들어오고 나서야 내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마검사라서 극의를 못 봤다는 건 핑계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깊게 탐구하지 않았다.’
천재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왜 천재가 천재인지, 그 이유를 찾지 않았다. 그들은 천재니까 가능한 거라고 자기위안을 삼았다.
아니다. 전제부터 잘못되어 있었던 거다. 그들은 스킬을 ‘분해’할 줄 알았던 것이다. 스킬의 원리, 구조, 그 모든 걸 파악하려고 노력했기에 ‘극의’에 다다를 수 있었다.
물론 그 역시 재능이라면 재능이라 할 수도 있었다. 완성되어있는 기계의 겉만을 보고 내부를 조립하는 정도의 공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서 내부를 들여다보고서야 내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으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나 자신의 우둔함에 대해 욕을 해야 할지.
탈혼무정검이 9성에서 멈췄던 건 그저 짝이 되는 ‘내공심법’이 없어서였고, 다른 마검사의 스킬들은 그저 사용할 줄만 알았기에 10Lv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검사의 제약은 그저 ‘S랭크의 스킬’을 배울 수 없다는데 있었다.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다른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초반의 빠른 성장과 스킬의 사용에만 매료된 탓에 진정으로 중요한 걸 보지 못했다. 외면했다.
‘멍청한 놈.’
이처럼 멍청한 일이 또 있을까.
그래놓고 계속해서 극의를 운운하고 있었단 말인가.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크르릉!
이타콰가 다가와 내 얼굴을 핥았다. 얼굴이 순식간에 침 범벅이 됐다. 내 마음의 동요를 느끼고 딴에는 위로를 해주려고 한 것이다.
“녀석.”
이타콰는 순수했다. 몸집은 컸지만, 흰색의 도화지와 같았다.
쓰면 쓰는 족족, 그리면 그리는 족족 모든 걸 그대로 받아들이니 ‘백보신권’의 성취에 있어선 나보다 녀석이 높았다. 이타콰는 적은 마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신체의 공격에 보태는 방법을 익히는 중이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과거보다 많았고, 내가 강해질 방법 역시 무궁무진했다. 모든 건 ‘나 하기’에 달렸다.
“그럼 다시 붙어보자.”
손바닥을 내밀자 이타콰가 꼬리를 움직여 내 손바닥과 마주하게 만들었다.
그리곤······.
수아아아아!
내 손바닥과 이타콰의 꼬리 사이로 바람이 모여든다.
둥그렇게 모여선 나선으로 계속해서 돌고 있었다.
지극히 정교한 작업. 약간의 집중력이라도 흩어지거든 나선의 구는 다시 허공으로 흩어지게 된다. 나름의 대결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나와 이타콰는 침투경의 원리, 그중 ‘회전’을 극대화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처럼 연습하는 중이었다.
어깨가 가벼웠다.
유설의 충고를 들은 뒤로 나는 전신의 힘을 뺐다. 최선을 다해서 최대의 결과를 낳아도 부족하건만 뻣뻣하게 굳은 상태로는 될 것도 안 되는 법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그 뒤로 나는 이 모든 과정을 ‘즐기기’ 시작했다. 무자비한 고통에 이를 악물 때가많았지만 이 역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라고 생각하면 한결 나아지곤 하였다.
그러자 주변의 반응도 달라졌다.
“정말 근성 하나는 인정해야겠군.”
“보고 있으면 몸이 근질근질 해.”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야차들은 기본적으로 전사다. 약골인 내가 수없이 노력하고, 부지런히 움직이자 저들 역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압박감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저들도 그 사실을 안다. 매일 보고 있으니까.
밑바닥. 약골이라 생각했던 자에게 따라잡히는 굴욕감을 맛보고 싶진 않을 터.
꾸이익! 꺄가각!
2급 백원후. 내 능력으로는 아직도 상대하기 벅찬 녀석.
내가 또 나타나자 녀석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매일 같이 얻어맞기만 하는 놈이 오늘도 어김없이 오니까 웃긴 모양이었다.
심안을 열어 오늘도 녀석의 상태창을 살폈다.
이름: 2급 백원후(value-7,850)
종족: 짐승
능력치
힘 55b 민첩 60a 체력 53b
지능 41b 마력 51b
잠재력 (260/300)
스킬: 백팔질주(5성), 자유낙법(3성), 원후권(6성)2급 백원후의 능력치는 대략 이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능력치 자체는 3급 백원후와도 비슷하지만 문제는 2급부턴 무공을 안다는 것이었다.
백팔질주와 원후권. 둘은 굉장히 까다로운 조합이었다.
‘오늘은, 이긴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달랐다.
오늘만큼은 매우 진지하게 임해보기로 하였다.
자세를 잡고 주먹을 쥐었다. 숨을 크게 들이쉰 뒤 천천히 발을 옮겼다.
구꺄아아악!
이전과 오늘의 내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알아챈 걸까?
백원후가 이빨을 드러내며 흉포하게 날아들었다.
퉁! 투투둥!
허공에서 날아온 원후권은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마치 주먹이 두 개, 세 개로 늘어난 것만 같은 착각을 줬다. 순식간에 어깨가 긁히고 전신이 뒤로 젖혀졌다.
하지만 근육을 때리는 게 아니라 쌀부대를 때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금강불괴로 인한 효과였다. 물리적 타격이 주는 데미지 자체를 줄여주는 외공.
이 역시 의도된 것이었다. 애당초 막을 생각이 없었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쿠웅!
백보신권의 묘를 담아 그대로 백원후의 배에 타격을 가했다. 백원후가 주욱 날아가 비틀대며 머리를 흔들었다.
캬아아악!
이내 격분하여 바닥을 밟으며 경공으로 달려든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며칠 사이에 금강불괴의 수준이 3성에 달해 있었다.
‘3성의 금강불괴는 대략 30%의 물리저항을 갖지.’
1성의 경지가 올라갈 때마다 10%가량의 저항이 추가됨을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3성이라면 검으로 찔러도 잘 들어가지 않을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투웅! 퍽!
지독한 난타전이었다. 아무리 물리저항이 높아졌다지만 백원후의 공격은 전신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백원후 역시도 멀쩡하진 못했다.
금강불괴는 3성이었지만, 백보신권은 아직도 1성이었다.
‘초근접하지 않으면 효과를 주기 힘들다.’
대신 초근접하여 공격하면 백보신권만큼 타격을 주는 것도 없을 것이었다.
‘지금.’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달려드는 백원후의 몸을 왼 손으로 낚아챘다. 이후 피할 수 없도록 고정시킨 뒤, 오른 주먹으로 백원후의 몸통을 가격했다.
쿠릉!
소리와 함께 이내 백원후가 축 늘어졌다.
후우! 후우!
숨소리가 거칠었다.
백보신권······ 권법이지만, 경지를 높여 잘만 활용하면 모든 무구에 제한 없이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인데, 지금까지의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뭐야, 들어갔나?”
“좀 약한 거 같기도 한데.”
“단순한 발경은 아니로군. 단경의 경지에는 이른 건가.”
단경, 중경, 그리고 침투경의 순으로 난이도가 어렵다. 심안을 열어 야차들을 살폈지만 백보신권을 익힌 야차는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난해하고 어려운 탓이다.
그래서 저들도 내가 침투경의 원리를 사용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모든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는 천지인, 나선형의 마력, 무한의 이해 등을 토대로 깨우쳤기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단경이라고? 그것만 해도 대단한 거 아니야?”
“그래봤자 중경으로 넘어가는 도중에 포기하겠지. 중경 이상의 묘리를 깨우친 야차는 암룡 유설이나 잠룡 주가람 정도밖에 없잖아.”
잡음이 많아졌다. 내가 보인 한 방. 그것을 두고 내 경지를 논하기 시작한 것이다.그래도 결론이 나질 않자, 덩치 큰 야차 하나가 내게 다가왔다.
“이봐. 나한테 한 번 해 봐라.”
“무엇을?”
“방금 2급 백원후를 기절시킨 그것 말이다. 백보신권 비슷한 무공!”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흥을 냈나?
하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십여 일이 넘도록 나를 ‘무시’로 일관하던 그들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정도 나를 인정해줬다는 의미다.
계속해서 무시해주면 좋겠지만, 어차피 언젠가는 겪을 일이었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2급의 백원후마저 쓰러트렸으니 1급, 그리고 원후왕에까지 도달할 기틀은 마련한 셈이다. 그 과정에서 야차들과의 부딪힘은 예상하고 있었다.
예상하고 있었으니, 그 다음 과제다.
보여줄 땐 확실하게 보여줘야 했다.
“후회할 텐데.”
“후회? 아, 네 녀석이 하는 거 말이냐? 푸하하! 걱정 마라. 난 맞아주기만 할 테니!”
야차가 양 손을 들어올렸다.
이건 싸우는 게 아니라는 듯이.
저 표정이 계속해서 유지되기를 바란다.
나는 피식 웃으며 천천히 주먹을 뻗었다.
툭.
“뭐냐, 장난하는 거냐? 이런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뭘······.”
가볍게 주먹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닿은’ 이상 나머지는 쉬웠다.
대야의 바닥을 뚫는 정도야 진즉에 넘어간 단계다. 야차의 살가죽은 두꺼웠지만 내장들도 그만큼 단단할지는 모르겠다.
콰지직!
뼈가 뒤틀렸다. 내장이 틀어졌다. 동시에 야차의 얼굴빛이 붉게 달아올랐다. 전신의 힘줄이 튀어나오고 입에선 침이 줄줄 샜다.
“꺼억······!”
겨우, 비명을 내뱉었다.
야차가 급히 한 발자국 물러났다.
방금 전의 여유는 온데간데없었다.
엄청난 고통일 것이다. 이타콰와 연습 도중 녀석이 실수해서 백보신권으로 나를 때린 적이 있었다. 백원후에게 얻어맞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통증이 전신을 엄습한 기억이 났다.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으리라.
“한 대 더?”
절레절레!
야차가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말을 할 여력도, 움직일 힘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자존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배를 부여잡고 치료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엄청나군.’
순수한 의미로 감탄했다. 설마 저 정도로 별 내색 없이 참아낼 줄이야.
1성의 백보신권은 초근접전으로 갈 때 진정한 위력을 발휘한다. 아직 100보 바깥의 물체에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지금으로선 기껏해야 2보 정도. 그것도 바람에 흔들리는 수준의 영향이었다. 아예 근접해야만 제대로 효과가 있다.
그러나 내부를 진탕시키는 백보신권은 ‘겉’을 베고 자르는 검이나 여타 마법들과는 분명히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탈혼무정검과 함께 잘만 활용하면 속과 겉, 모두를 한꺼번에 파괴하는 굉장한 기술이 나올지도 모른다.
‘내장을 단련시키지 않는 이상 이건 통한다.’
그간의 고생이 싹 날아간 것만 같았다.
지켜보던 야차들이 모두 입을 닫았다. 단경, 중경은 손을 댄 것만으로 이만한 타격을 주지 못한다. 뼈를 뒤틀거나 내장까지 파열시키는 건 침투경만이 가능했다.
“설마······ 침투경이라고?”
“침투경의 묘를 깨우친 놈이 고작 2급 백원후에게 그동안 맞고 다녔다는 거야?”
“우연··· 이겠지.”
모두들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였다.
하지만 섣불리 도전을 할 수가 없었다.
귓불에 새겨진 검은 야차의 인이 빛나고 있었다.
[야차 ‘한 명’을 이겼습니다.]
[검은 야차의 인(印)이 빛을 발합니다.]
[상대의 능력치 중 ‘민첩’을 0.05 빼앗아 옵니다.]
[검은 야차의 인은 다른 인을 지닌 야차, 혹은 나찰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거나 상대를 죽일시 무작위로 능력치 하나를 소량 흡수할 수 있습니다.]
[대상은 중첩되지 않습니다.]
[잠재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능력치의 흡수는 불가능합니다.]
[누적 능력치는 1단위로 상태창에 반영됩니다.]
[누적된 능력치 현황 ? 민첩(0.05)]
검은 야차의 인!
모두가 두려워하며 멀리했던 그것.
설마 이런 능력이 있었을 줄이야.
왜 고대에 검은 야차의 인을 지닌 야차가 나찰 하나를 죽이고 야차들을 학살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강함에 대한 열망!
무한한 욕구가 있었기에 검은색의 인이 주어진 건 아닐는지.
그 욕구에 집어삼켜져 대량학살을 벌였고, 끝내 죽었다.
꿀꺽!
목울대가 울렸다. 힘에 매료되는 순간 내가 밟을 수순이 전승과 같으리란 걸 안다. 알지만, 그럼에도 매력적인 능력이었다. 그저 이기기만 하면 된다니.
반대로 죽이거든······ 더한 보상이 주어질 게 자명했다.
“저건······.”
“정말로 저주받은 건가?”
야차들이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들은 반쯤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나를 경계했다.
겨우 좋아지던 여론이,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천적이 따로 없군.’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대련장을 벗어났다.
시시각각 저들의 눈빛이 흉흉하게 변하고 있었다.
여태까지는 그저 전승, 떠도는 이야기에 불과했지만, 검은 인이 빛을 발하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건······ 결국 그들을 잡아먹던 포식자의 증표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