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46화 (47/251)

< 12. 되새기다(完) >

장장 나흘 만에 백보신권의 기초를 익혔다.

기초. 말 그대로 토대가 되는 부분을 학습한 것이다. 비록 당장의 파괴력은 약할지 몰라도 백보신권의 원리를 깨달았으니 나머진 점차 넓혀 가면 되었다.

동시에 야차들의 야유도 멈췄다.

애당초 신경도 안 쓰고 있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정적이 찾아온 것이다.

“방금 내가 잘못 본 건가?”

“잘못 본 거겠지. 제대로 된 백보신권을 백원후가 맞았으면 전신이 터졌을 걸.”

“그냥 단순한 발경인 거 같은데.”

하지만 이윽고 각기 다른 의견들이 나왔다. 백보신권의 원리가 발경, 그중 침투경에 있으니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리에서 허리, 허리에서 손으로 이르러 순간적인 힘을 가하는 게 발경이었고 침투경은 발경의 상위단계로 내부만을 진탕시키는기술의 이름이었다.

허나 누구도 내가 침투경을 행했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모든 무학을 통틀어 침투경의 묘리는 굉장히 어려운 편에 속해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순환의 원리와, 나선형의 마력이 아니었으면 4일이 아니라 400일이 걸려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전에서 먹히는군.’

바닥을 내뒹구는 백원후. 제대로 된 백보신권이었으면 말 그대로 신체가 터져나가야 했다. 일점타격엔 성공했지만 장기를 뒤흔들고 폭사시킬 만큼 마력의 집중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 번의 실행으로 마력이 주욱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64에 다다르는 마력 중 반의 반의 효율조차 못 보인 느낌.

그러나 낙담보단 성취감이 더욱 컸다.

내가 따라잡지 못했던 천재들. 그들은 이러한 원론적 기술들을 천부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고, 열을 알면 아예 새로운 경지의 장을 열어버리는 자들.

나는 이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셈이다. 적어도 기반은 갖췄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남은 건 연습. 실전을 방자한 연습뿐이었다.

“발경쯤이야 야차라면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운이 좋군. 백원후가 방심만 안 했으면 저런 눈 먼 주먹 따위 안 맞았을 텐데.”

“나라면 눈 감고도 피할 수 있어.”

악담은 하면서도, 누구도 쉽게 내게 다가오려는 야차는 없었다.

나는 대강 그 이유를 알았다.

‘검은 야차의 인.’

얽히면 저주에 걸린대나. 고대라고 부를 정도로 오래 전, 검은 야차의 인을 지닌 야차가 나찰 하나를 죽이고 야차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일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야차들은 자긍심이 매우 강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척 보기에도 약한 놈에게 주먹을 뻗진 않는다는 것이다. 야차가 싸움을 거는 건 자신이 ‘호적수’라고 인정한 대상에 한했다. 적어도 이곳 나찰각에서는 그랬다.

모두가 전사였고, 스스로가 ‘야차’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내가 어중간하게 강한 모습을 보였다면 대련을 거는 야차가 많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3급 백원후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보고 그럴 의지마저 사라진 게다.

다만, 승천자의 의식을 통과했다는 그 ‘기대감’이 무너지며 악담의 주요대상이 된것 같았다. 물론 딱 거기까지였다. 막상 싸워서 이겨도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나로선 다행인 일이지.’

기술을 연마해도 부족한 시간이다. 괜한 시비에 휘둘려 시간을 버리는 것보단 차라리 ‘밑바닥’으로 인식해주는 게 편했다.

‘억지로 조를 이룰 필요도, 들어갈 필요도 없다.’

성흔 쟁탈전.

그 싸움에서 승리하고자 야차들은 벼르고 있었다.

파벌을 만들고, 기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그동안 내가 파악한 파벌은 모두 다섯 개.

암룡 유설을 제외한 오룡(五龍)이라 칭해지는 강한 야차를 중심으로 하는 네 개의 집단과, 그에 대항하고자 만들어진 ‘중립’ 성향의 집단이다.

나머지는 조에 들어가지 못했거나, 들어갈 생각이 없는 야차들뿐이었다.

그렇게 대략 1,500명가량.

조금 더 많거나 적거나 할 테지만 대충 그 정도 숫자였다.

‘야차는 개인의 무력능력치가 굉장히 판이하다. 게다가 잠재력도 인간과 비교하면 훨씬 더 평균치가 높아.’

각성한 인류의 잠재력 평균치는 250이었다. 야차는 350에 달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평균치의 이야기다. 야차는 유독 편차가 심했다.

물론 아무리 약한 야차라도 단순 능력치로 따지자면 지금의 나와 비슷한 수준이긴 하였다. 저들이 말하는 오룡은, 그야말로 ‘괴물’이었고.

‘괜히 끼어들었다간 새우등만 터지는 꼴이 될 수도 있지.’

그러니 무리할 필요가 없다. 서고에 있는 것들을 가져가는 게 나로선 훨씬 이득이었다. 마음 같아선 저 ‘쟁탈전’이라는 것에도 참전하지 않고 서고에 틀어박히고 싶었다.

어차피 나를 같은 조에 넣으려는 야차는 없을 것이었다.

내가 권유한다고 해도 들어올 야차가 있을 리 만무했다.

고로······ 그 시간에 나 스스로의 기술을 갈고 닦는 게 훨씬 이득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애당초 나는 야차가 아니었으므로.

‘다음은 금강불괴 차례군.’

백보신권의 기초를 익혔으니 다음으로 익힐 건 금강불괴였다.

금강불괴. 신체를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외공(外功)이다. 도검불침의 금강지체와 수화불침의 불괴지체를 합쳐서 말하는 건데, 제대로 된 금강불괴를 이루면 어떠한 물리적인 공격도 통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스킬을 지닌 사람을 나는 한 명 알고 있었다.

‘철왕. 그도 결국 죽었지.’

그가 익힌 스킬은 A랭크의 ‘강철 비늘’이었고, 무려 9Lv에 달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압사였다. 크리스탈 골렘의 거대한 몸에 깔려서 죽었다. 단순히 피부를 단단하게 만든다고 해서 모든 공격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는 방증이었다.

‘금강불괴는 과연 다를까?’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대련장으로 향했다.

조금 익숙해진 뒤에는 백보신권의 연습도 함께했다.

“저놈도 참 별종이야.”

“맞는 게 즐거운 거겠지.”

“근성하나는 인정해줄 만하네. 저 근성으로 ‘승천자의 의식’도 통과한 건가?”

2급 백원후는 3급 백원후보다 훨씬 빨랐다. 경공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마력을 담아서 공격할 줄 알았고, 내 공격을 흘려내는 방법도 알았다.

그리고 어디를 때려야 아픈지도 제대로 아는 듯싶었다.

퍽!

한참을 얻어맞다가 명치를 가격 당했다. 어억, 하는 사이에 턱이 돌아갔다. 동시에 내 머리 위로 커다란 별이 떠올랐다.

“또 기절해서 실려 가는군.”

“멍청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고 그러더니 딱 그 짝이네.”

쳇바퀴 굴리듯 같은 일과가 반복됐다.

아침엔 서고, 점심엔 대련장, 저녁엔 방으로.

방에서도 이타콰와 백보신권을 단련하거나 승천자의 망토에 대한 연구를 이어나갔다.

보통이라면 진즉에 무너졌어야할 몸이지만, ‘정화의 흙’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회복력을 올려줬다. 덕분에 매일매일 맞을 수 있었다.

그러자 조금씩 고통에 내성이 생기는 것 같았다. 2급 백원후에게 얻어맞다가, 그거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1급 백원후에게 달려들었다.

정말로 죽을 뻔했다.

주먹 한 방에 신체가 날아가 담을 무너트렸다.

하지만 오뚝이처럼 일어나자 백원후와 야차들이 기겁하며 바라보기도 했다.

‘이제는 여기가 집 같고 그렇군.’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치료실에서 눈을 떴다.

나찰각에 들어오고 보름가량이 흘렀지만, 처음 눈을 뜬 곳이 이곳이니 나갈 때도 이곳을 통하고 나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스으윽.

그때, 누군가가 옆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자주 치료실을 방문했으나 나 외에 다른 이가 치료를 받고 있는 모습은 거의 못 봤다.

이에 고개를 돌리자 꽤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유설.’

오룡 중 하나인 암룡. 그녀는 하얀색의 얇은 천 하나만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도 나를 멀뚱히 쳐다보는 중이었다.

‘원후왕과 싸우다가 다친 건가?’

유설도 원후왕을 상대로 100% 이기진 못했다. 8할 정도의 승률이긴 했지만 원후왕이 간소한 차이로 이길 때도 분명히 있었다. 나름 유심히 보고 있었기에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전용 치료실이 있다고 들었다. 천랑가의 가문에서 특별히 준비한 특제 치료실이. 굳이 이곳까지 올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 어깨에 힘을 더 빼세요.”

등을 돌린 유설이 그 한 마디만을 남기고 치료실을 벗어났다.

‘뭐지?’

나는 잠시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저 말, 나한테 한 걸까?

하지만 치료실엔 나 외엔 없었다.

어깨에 힘을 빼라니.

‘조언, 인가?’

그녀는 권사였다. 주먹질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건 처음 봤다.

고고하고 신비한 늑대 같은 이미지가 머릿속에 박혀있었건만.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뇌리에 쏙 박혔다.

‘어깨. 어깨라.’

나는 곰곰이 턱을 쓸었다.

그러고 보면 맞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움츠러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서 백보신권이 제대로 안 펼쳐지는 것이다.

‘아무튼 고맙군.’

듣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유설이 나간 문을 바라봤다.

왜 내게 조언을 해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나는 내게 부족한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수련이 끝났다고 전부가 아니다. 전투의 내용을 복기해야 돼. 그래야만 다음부턴이런 실수를 안 하게 된다.’

만약 잘못된 습관이 자리 잡혔다면 고치는데 시간을 낭비했을 것이다.

그래서 복기(復棋)가 중요하다. 제대로 전투의 내용을 복기했다면 그녀가 말해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 이해했을 터였다.

되새기자. 그리하여 나아가자. 한 발자국 돌아간다고 전진하는 걸 멈추는 건 아니다. 그 중요성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 스스로 ‘이쯤하면 되었지’란 생각이 있었나 보다.

명백한 실수였다.

동시에 몸이 달아올랐다.

늦은 저녁, 나는 홀로 대련장을 찾았다.

야차는커녕 백원후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움직였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나약해지려는 자신을, 타협하며 합리화하려는 자신을.

그러자······.

[스킬 ‘백보신권(1성)’을 익혔습니다.]

[스킬 ‘금강불괴(1성)’를 익혔습니다.]

변화가 생겼다.

이해하고, 깨달으며, 행동으로 옮겼기에 달라진 것이다. 온전히 ‘나의 것’이 된 것이었다.

고즈넉한 보름달 아래.

역시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노라고 생각하며, 나는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12. 되새기다(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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