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되새기다(3) >
저 정도 무력. 저 정도 움직임······ 이곳에 있는 가장 약한 야차보다도 못하다. 승천자의 의식을 통과했다고 하여서 기대했지만 결국에는 소문이었던 것이다.
‘검은 야차라는 것도 다 부풀려진 이야기겠지.’
구화린은 확신했다. 고대로부터 전해져온, ‘검은 야차’에 대한 무서운 이야기들. 사실은 다른 야차들의 경각심을 일으켜 세우고자 만들어진 허상이라고.
대신 구화린의 시선은 온통 한 여인에게 쏟아져 있었다.
쿠아아아아-!!
원후왕. 대련장에 있는 모든 백원후 중에서 유일하게 ‘왕’의 이름을 단 거대한 짐승이 소리를 내질렀다. 대지가 들썩이고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 앞에서 아름다운 남색의 머리칼을 지닌 여인이 조용히 서 있었다.
“역시 천랑가(天狼家)의 소가주야. 원후왕 앞에서도 꼼짝을 안 하잖아.”
“천랑가가 옛날에 비하면 세가 많이 기울었다지만, 괜히 그녀를 보고 ‘천랑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지.”
“아름답다. 아름다워!”
대련장에 있는 대부분의 야차들이 행동을 멈춘 채 그녀를 주목했다. 유설. 전사의의식을 이제 막 끝낸 야차들 중에서 원후왕을 상대할 수 있는 이는 다섯 손가락에 꼽았다.
그녀의 천령신권은 뭐랄까, 절제되어 있지만 아름다웠다. 움직임 자체에 기품이 묻어있었다. 한없이 빠르고 강했으며 딱딱할 것 같으면서도 부드러웠다.
쿠와아앙!
원후왕이 그동안의 설움을 갚겠다는 듯 주먹을 내질렀다. 무지막지한 권이었다. 그저 내뻗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풍압이 생겼다. 맞았다간 묵사발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유설은 그 주먹을 비스듬하게 쳐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흘려버렸다. 그리곤 그대로 몸을 돌려 원후왕의 팔꿈치를 찍었다.
원후왕의 거대한 팔이 일순간 꺾였다. 정확히 관절부위를 노린 것이다.
크라아아아악!
비명을 지른 원후왕이 양 팔을 벌려 유설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유설의 움직임은 마치 흐르는 물과 같았다. 잡히지 않고 그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잔잔한 물결.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군. 이화접목이 수준급이야.”
“괜히 오룡(五龍)이라 불리겠어? 그 중에서도 암룡(暗龍)이 제일이라!”
“에이, 아무리 그래도 무백보단 아니지. 무룡(武龍) 앞에선 암룡도 두 수는 접어야 할 걸!”
“뭐, 어쨌든 이번 쟁탈전의 우승자는 그 다섯 중에 나오겠지. 대라선께서 직접 보상을 내리신다던데. 용과 보패를 줄 거란 소문이 무성해.”
설왕설래가 오갔다.
그 사이, 유설의 주먹이 다시금 원후왕의 가슴에 닿았다.
쿵!
짧고 강력한 소리. 일전과 달리 원후왕이 바닥을 내뒹굴거나 날아가진 않았다.
대신······.
스르륵!
쓰러졌다. 기절한 것처럼 보였다.
작은 백원후들이 쪼르륵 몰려들어 원후왕의 뺨을 때리거나 감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리곤 열댓 마리가 원후왕을 양 손으로 들고는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결판났군.”
“오룡들을 상대하려면 원후왕이 아니라 진짜 원후제(猿?帝) 정도는 되어야 할 걸.”
“에이, 아무리 그래도 원후제는······.”
유설은 한 차례 주먹을 털어내곤 유유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작은 백원후 몇 마리가 길고 큰 남색의 용이 그려진 우산을 들고는 유설에게 씌워주었다.
유설이 성큼성큼 대련장을 벗어났고, 그를 바라보던 구화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도도한 척 하는 거 봐.”
“화린 아가씨가 더 강한데 말이죠.”
“흥, 천령신권보단 적혈마검이 훨씬 강하지. 원후왕 좀 쓰러트린 걸로 난리는!”
대련이 끝나자 구화린 주변의 여자 야차들이 입을 놀렸다. 하지만 구화린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모든 야차가 유설의 움직임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홀린 듯이.
그것은 구화린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이 하는 말이 빈말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구화린 그녀도 ‘오룡’ 중 ‘적룡’으로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구화랑. 화련대의 대주인 자신의 오빠 덕임을 안다. 실력은 오룡 중에서도 말석이었고 유설처럼 원후왕을 시원하게 쓰러트릴 수도 없다.
‘성흔 쟁탈전이 시작되면······ 그때는 반드시.’
구화린의 눈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구화린 그녀는 실전에 강했다. 목숨을 건 대결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소문만 무성했던 야차가 여전히 3급의 백원후에게 얻어맞고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하! 여전히 몸으로 웃기고 있군.”
“저러다간 한 대도 못 때리겠다.”
“정말 백보신권 맞아?”
기대를 안 했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조금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면, 자신의 조로 영입을 하는 것도 고려하려 했지만······.
‘약골!’
현실은 완전 반대였다. 기대 미달.
아예 신경을 접었다. 저런 야차가 자신의 조에 들어오면 발목만 잡을 것이다.
* * * * *
‘어렵네.’
백보신권. 주먹으로 치는 게 아니다. 주먹을 뻗어 마력을 폭발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보 밖의 돌덩이를 순식간에 부숴야만 진정한 백보신권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백보신권을 고른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마력의 미세한 조정에 있어선 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한으로 순환하는 나선형의 마력은 누구보다 미세한 조정이 가능하게 해줬다.
하지만 이론과 실전은 달랐다.
‘매일 이러다간 맞아 죽겠군.’
마지막엔 턱을 맞고 기절했다. 정확한 타격에 뇌가 일순 흔들린 것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치료실이었다.
‘첫술에 배부를 순 없지.’
하지만 이제 겨우 첫술을 떴을 뿐이다. 벌써부터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치료실을 벗어나 배정된 방으로 들어섰다. 구화랑이 떠난 이후 백원후가 안내해준 나의 방이었다.
50평 정도로 꽤 넓은 장소였다. 내부는 살풍경이었지만 발 뻗고 누울 수만 있으면 됐다.
‘내 움직임에도 아직 군더더기가 많다.’
몸이 굳어있었다. 반응도 느렸다. 절실하게 느끼는 중이었다.
“이타콰.”
공간의 보석을 꺼내고 이타콰의 이름을 부르자 작은 빛과 함께 내 앞으로 녀석이 나타났다.
방은 사방으로 막혀있었고, 유일한 통로는 정면의 문 하나뿐이었다. 누군가가 쉽게 감시할 수 없는 구조기에 서슴없이 이타콰를 꺼낼 수 있었다.
크렁!
건강했다. 50만 계단을 오른 뒤 쓰러졌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활력이다. 나는 그곳에서 ‘승천자의 망토’를 얻었지만, 이타콰도 계단을 오르고 한계를 돌파하여 보상을 받았다.
‘선단을 얻고, 먹었지.’
선단이 뭔지는 나도 모르겠다. 영약과 비슷한 종류인 것 같은데 나도 심안으로 상태창을 확인한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이름: 이타콰(value-264,300)
종족: 백룡(白龍)
칭호:
● 태풍의 울음(9Lv, 민첩+15)
능력치:
힘 61ss 민첩 56(41+15)s 체력 45s
지능 37a 마력 33b
잠재력(217+15/487)
특이사항:
- 성현의 가호, 거대한 태풍의 울음을 이어받았습니다.
- 사용자와의 강력한 신뢰의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 선단(仙丹)을 섭취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능력치가 상승했지만, 미묘하게 바뀐 부분이 있었다.
바로 마력의 성장가능성이다.
그래봐야 c에서 b가 된 데에 그쳤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잠재력도 미묘하게 상승했다. 2.
‘엄청나군.’
하지만 나는 놀라고 있었다. 이미 이타콰의 잠재력은 485로 ‘엄청나게’ 높은 축이었다. 사실상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는 의미다. 이곳에서조차 십이나찰 중 하나인 ‘월천’을 제외하곤 이타콰보다 높은 잠재성을 가진 이는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수치는 높을수록 올리기가 힘들어진다. 그런데 485라는, 거의 절정에 이른 상태에서 무려 2가 올라갔다.
과거 내가 먹었던 어떠한 영약도 저만한 변화를 일으키진 못했다.
잠재력이 낮은 이가 먹었다면 거의 10~20은 올랐을 거란 뜻이다.
“일단 먹어라.”
큰 그릇 몇 개를 넘겼다.
백원후에게 부탁한 음식들이 이미 방 안에 들여져 있던 덕분이었다.
물론 이곳에서 먹는 음식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풀이나 과일, 미량의 고기가 전부였다. 최소한으로 조리되어 자연의 맛 그대로를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이타콰의 위장을 모두 채워주진 못했다.
순식간에 그릇들을 비운 이타콰가 쩝쩝대며 아쉬워했다.
처음 봤을 땐 2m의 신장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3m에 이른다. 그 사이에 1m가 컸다.
이대로 계속 크면 숨기는 게 불가능해질 것이다.
“너는 좀 적게 먹어야할 필요가 있다.”
꾸우웅.
이타콰가 꼬리를 내렸다.
하기야 치사하게 먹는 거로 뭐라 하긴 조금 그랬다.
나는 이타콰를 다시 숨긴 뒤 백원후들을 불러 음식을 더 부탁했다. 내 비정상적인식사량에 백원후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어 놀 워리어들도 먹이고 나서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마력을 표출하고 폭발시킨다.’
거대한 대야에 물을 떠왔다. 그리고 마보자세를 취했다.
양 다리를 넓게 펼친 채 그대로 대야의 물을 향해 지르기를 펼쳤다.
철썩!
물이 넘쳤다. 백보신권이 가능하게 하려면 물이 넘쳐선 안 된다. 물은 고요하고 대야가 뚫려야 백보신권의 시작을 성공적으로 하는 셈이었다.
‘어떻게 물을 쳐서 대야를 뚫지?’
물을 때리는 순간 반발력으로 물이 거세게 솟아오를 수밖에 없다. 조용히 마력을 흘려서 대야의 밑 부분만 뚫기는 불가능하다.
주먹을 지르고, 지르고, 또 질러 봐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이 삽시간에 물로 흥건하게 젖었다.
꾸응?
놀 워리어들을 먹는 척하며 놀던 이타콰가 이번엔 나를 유심히 쳐다봤다.
반나절동안 물만 내리치고 있으니 ‘저게 뭐하는 짓인가’싶긴 할 터였다.
“너도 한 번 해 볼 테냐?”
끄덕끄덕!
이타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물이 가득 찬 대야를 넘기자, 이타콰가 꼬리를 내리쳤다.
첨벙!
당연히 물이 넘쳤다.
“물이 넘쳐선 안 된다. 마력을 응축시켜서 대야의 바닥을 뚫어야 해.”
첨벙! 첨벙!
물장난이 따로 없었다.
이타콰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 고민이 녀석에게 옮겨간 듯싶었다.
그리곤 꼬리를 일자로 세웠다. 일점(一點)으로 만든 후 그대로 물을 내리치자 쿠웅! 소리와 함께 물이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동시에, 대야의 바닥이 뚫렸다.
“······ 약간 다르긴 하지만, 비슷하군.”
크릉! 크르릉!
이타콰가 고개를 꼿꼿하게 폈다. 더 자신을 칭찬하라는 듯이.
나는 뚫린 대야를 들고 멍하니 쳐다봤다.
‘일점. 무게중심을 옮기고 침을 쏘듯 한 순간에······ 답은 폭발이 아닌 회전에 있다.’
잠시지만 이타콰가 꼬리에 집중시킨 마력이 미친 듯이 회전했다.
답은 거기에 있었다. 순환. 백보신권 역시도 순환의 연장선이었던 것이다. 며칠간 이어진 내 고민을 이타콰가 단숨에 풀어버린 건 배가 아팠지만, 나쁜 일은 아니었다.
“이타콰.”
크릉?
녀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확신했다. 혼자 익히고 움직이는 것보다 다른 이를 가르치며 확실하게 익히는 게 도움이 될 때가 많았다. 하물며 이타콰가 함께한다면 내가 몰랐던, 놓쳤던 부분을 더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가볍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함께 배우자, 백보신권.”
* * * * *
사흘연속 나는 대련장을 찾았다.
“또 왔네.”
“보나마나 또 기절해서 실려 나가겠지.”
“질리지도 않나?”
세 번 도전했고 세 번 다 기절해서 치료실로 실려 갔다.
3급의 백원후. 나보다 조금 작은 신장을 지닌 원숭이 녀석이 끽끽대며 비웃음을 흘렸다.
나는 가만히 자세를 잡았다.
키킥. 끼야악!
그러자 백원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족히 5m가량을 뛰어올라, 태양의 빛으로 자신의 신체를 가렸다. 위를 쳐다보면 눈을 찌푸리거나 감게 되고 그 틈에 공격을 하는 수법이다. 벌써 여러 차례 경험한 바가 있었다.
나는 아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일점(一點)에 모든 걸 모아, 주먹을 질렀다.
백원후의 등 뒤에 달린 날개가 움직이며 주먹을 피해냈지만, 애당초 백보신권은 ‘때리는’ 기술이 아니다. 직접 닿지 않고도 백보 바깥의 적을 묵사발 내는 기술이 백보신권이었다.
쿵!
짧고 묵직한 소리. 그와 동시에 백원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끼익! 끼긱! 끼기긱!
3급 백원후가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장장 나흘 만에 백보신권의 기초를 익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