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44화 (45/251)

< 12. 되새기다(2) >

77계층, 「염증의 계(界)」를 나 홀로 오르고 있을 때였다.

인류가 나찰산을 탐험한 건 최대 81계층 까지다. 공식적으로는 그랬다.

나는 나 혼자서 오를 수 있는 계층을 알아보고자 도전을 해보는 와중이었고, 78계층까지는 탐험하는데 성공했다. 77계층에서 나찰노인을 만난 것도 78계층의 대기를 다루는 거대한 괴물, ‘염암수’에 가로막혀 돌아가는 와중의 일이었다.

당시의 노인은 상처가 많았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누군가에게 당한듯 보였으며 매우 절박한 태도로 내게 탈혼무정검의 검술서를 넘긴 것이다.

―차라리······ 네놈이 가져라! 이 또한 운명이고 인연일지니!

물약을 사용하고, 치료계열 스킬도 써봤지만 노인에겐 통하지 않았다. 동시에 서쪽에서 몰려오는 검은 구름은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았다.

―가라! 저들은 ‘찬탈자’인 너를 찾지 못할 것인즉!

등이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노인을 뒤로 한 게 기억난다. 이후 탈혼무정검이 평범한 검술서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미친 듯이 익혔다. 9성. 탈각(脫却)이라 칭하며강(强)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경지.

노인이 읽고 있는 책도 눈에 익었다.

‘탈혼무정검?’

같은 이름. 생김새마저 비슷하게 생긴 책을 노인이 읽다가, 다시 서고에 꽂아 넣었다.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이.

“괘념치 마라. 내가 다른 이를 들이지 않으려고 했다면 백원후들부터 이곳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꽤 살벌한 인상과는 달리 푸근한 음성이었다.

구화랑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월천께서 서고에 계시다니, 보기 드문 일인 것 같습니다.”

“모든 무학이 이곳에 모여 있다. 계속해서 읽다보면 새로이 깨닫는 게 생기기도 하지. 나는 자주 오지만 네가 자주 오지 않기에 못 본 것이야.”

구화랑이 정곡을 찔린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아······ 하긴, 이곳의 공기를 맡고 있노라면 현기증부터 드는 게 깨달음의 증상 같기도 합니다.”

“쯧쯔, 그냥 글자를 읽는 게 싫은 것이겠지. 요즘 야차들은 ‘겉’만을 이해하고 ‘속’을 파고들려 하지 않는다더니. 너를 보니 알겠구나.”

“하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능구렁이 같은 것만 화천을 닮아선.”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다고, 구화랑이 헤죽거리며 웃자 월천은 그저 고개만 저어보일 따름이었다. 그리곤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이 아이는?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월천께선 아직 못 들으신 모양이군요. 요즘 이 녀석 때문에 나찰각이 떠들썩합니다.”

“흐음, 승천자의 망토를 지닌 걸 보니 야차가 나찰의 의식을 행한 모양이구나.”

“알아보시겠습니까?”

그의 눈썰미는 날카로웠다. 전신에서 소름이 돋았다. 내 기억에 남은 노인은 절박한 눈빛을 지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월천이라는 나찰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벽’을 느끼는 것만 같았다.

조심스럽게 심안을 열었다.

이름: 월천(value-919,500)

직업: 십이나찰

칭호:

● 월천(9Lv, 모든 능력치+5)

능력치:

힘 101(96+5)s 민첩 102(97+5)s 체력 100(95+5)s 지능 101(96+5)s 마력 110(100+10)s 잠재력 (484+30/493)특이사항: 나찰계의 12계층을 다스리는 나찰입니다. 십이천(十二天) 중 월천(月天)의 이름을 이었습니다.

스킬: ???

착용 중인 장비: 승천자의 장갑(마력+5)스킬을 제외한 모든 걸 엿보는 게 가능했다. 심안(9Lv)의 권능으로 볼 수 있는 마지노선과 가까운 듯싶었다.

작게 경악했다.

분명히 데몬로드에는 못 미치지만, 그 바로 아래 급은 될 정도로 강력하기 짝이 없는 능력이었다.

우리엘 디아블로의 능력치 총합이 555. 월천은 514였다. 다른 부분에서도 차이가 조금씩 나기는 하겠지만 ‘이종족’의 틀에서 이만큼 압도적인 존재를 나는 본 적이 없었다.

단 한 명. 엘프여왕을 제외하곤 말이다.

그런데 십이천의 이름이라고 하였다. 이런 자가 이곳에 12명이 있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의문도 생겼다.

이런 강자를 대체 누가 죽일 수 있는 걸까? 과거의 월천은 분명히 다른 이에 의한치명상을 입고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몰릴 정도로 처참했다.

월천이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나찰들이 이번 ‘성흔 쟁탈전’을 주목하고 있는 이유가 있었군.”

“월천께서도 ‘계승자’를 이번 기회에 두는 게 어떻겠습니까?”

“나를 만족시킬 정도의 아이가 나오거든 고려해보마.”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도 그러셨다고 하던데요. 소문이 자자합니다. 월천께서는 절대로 계승자를 두지 않는다고.”

“입 가벼운 놈들이 말을 함부로 흘리고 다닌 모양이지?”

분위기가 급격히 식었다.

구화랑이 급히 양 손으로 자신의 입을 봉했다. 말실수를 한 걸 깨달은 것이다.

이윽고 월천이 구화랑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볼 터이니, 사고는 치지 마라. 특히 네 동생 말이다.”

“하하, 그 녀석은 이미 제 손을 벗어난지라······.”

스릉!

검은 안개가 바닥에서 솟아나 월천의 몸을 감쌌다.

그리곤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하! 여전히 귀신같은 술법이시군. 공간이동술을 저처럼 자유롭게 구사하는 분은월천뿐이 안 계실 거야. 아, 이 녀석아. 이제 숨 쉬어도 된다.”

후아아아아!

구화랑의 말이 기폭제가 됐다. 막혀있던 숨을 겨우 몰아쉴 수 있었다.

내가 숨을 멈추고 있던 걸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의 내 능력으로는 마주할 수 없는 ‘벽’과 마주했기 때문일까.

“너는 운이 좋다. 월천께선 매우 바쁘셔서 다른 분들보다 보기가 힘들거든.”

“나는··· 책을 읽겠다. 이곳이 마음에 드는군.”

정신을 다잡고 구화랑에게 말했다.

구화랑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곳을 처음 찾은 야차들은 모두 너와 같은 말을 하지. 그리곤 길어도 3일이면 포기하고 바깥으로 나와서 백원후와 주먹다짐을 한다.”

야차들은 글자와는 별로 안 친한 것 같았다.

내가 서고를 살피는 모습을 보이자, 구화랑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여간 내 안내는 여기까지다. 남은 34일간은 네 마음대로 하도록.”

구화랑이 길게 하품을 내뱉곤 몸을 돌려 서고를 벗어났다. 자신이 맡은 바 일은 여기까지라는 것처럼 선을 그은 것이다.

나는 즉시 월천이 읽었던 책 한 권을 꺼냈다.

탈혼무정검.

분명히 내가 익힌 것과 똑같은 이름의 책이었다.

‘내용이 다르군.’

하지만 내용이 미묘하게 달랐다.

게다가 12성이 아닌 10성까지밖에 없었다.

왜 같은 이름이면서 차이가 나는 건지, 그리고 월천이 왜 이 책을 관심 있게 쳐다보고 있던 건지 약간의 의아함이 생겼다.

‘다른 책들도 봐야겠다.’

세상의 모든 무학(武學)이 이곳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은 노다지였다. 하늘이 내려준 기연이고, 놓쳐선 안 될 기회였다.

나는 바로 자리에 앉아서 책들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천하군림보, 야수철혈권, 천마심법.

거창한 이름의 기술서들이 끝도 없이 나왔다.

그리고 그만한 이름을 가질 만한 놀라운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이처럼 체계적이고, 기술적으로 무술을 남겨놓은 책은 과거에도 거의 없었다. 인류는 책이 아닌 스킬로 마법이나 기술을 익혔고 배웠으므로.

정작 스킬을 사용하면 마력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그야말로 ‘겉핥기’라는 뜻.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이 서고에 들어와서 수많은 책들을 보며 내 자신이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처럼 체계적이라니······.’

놀랍다. 놀라움의 수준을 벗어나서 경이롭다.

이들이 말하는 차크라. 우리가 말하는 마력. 둘은 분명히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 차크라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내면적으로, 보다 깊이 있는 탐구를 실행했다. 깨달음, 구도, 그러한 것들을.

반면에 인류는 과학적으로 접근했다. 당연히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 수가 없었다.

신세계가 열렸다.

구화랑은 3일이면 포기하고 바깥으로 나갈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먹는 것과 마시는 것조차 줄여가며 책을 읽는데 몰두했다.

백원후들이 먹을 것과 물 등을 가져다줬지만 손도 안 댈 때가 많았다. 잠도 오지 않았다. 그러기엔 지금 내 주변에 놓인 것들이 너무나도 대단했던 탓이다.

이 서고의 것들을 그대로 머릿속에 담아서 나갈 수만 있다면, 수많은 ‘초인’의 탄생이 훨씬 빨라질 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검법이나 권법, 보법 등은 심법에 기초한다는 거다.’

심법. 마음의 공부. 그리하여 차크라를 쌓는 방법이었다.

동시에 내가 왜 탈혼무정검을 9성까지밖에 익힐 수 없었는지, 그 해답을 찾았다.

‘짝이 되는 심법서가 없어.’

확실한 건 이곳에 있는 모든 검법보다 ‘탈혼무정검’이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아니, 탈혼무정검은 검법을 비롯한 모든 기술서의 기초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책들을 읽는 족족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탈혼무정검도 결국엔 반쪽이다.

탈혼무정검에 걸맞은 심법이 없었다.

수천 종의 심법이 존재하지만 탈혼무정검에 딱 들어맞는 심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로 없는 걸까?

아니면······.

‘월천. 그라면 알고 있을까.’

마음이 동했다.

하지만 쉽사리 밝힐 수도 없었다.

내가 진짜 탈혼무정검을 익혔다는 걸 알리려면 과거로부터 돌아왔음을 인지시켜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날 월천의 행동을 나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죽일 가능성이 높은 건 확실했다. 과거의 월천은 탈혼무정검을 필사적으로 내게 넘기려고 하였다. 누군가로부터 숨기려고 그런 거다.

아마도 그의 죽음 역시 탈혼무정검의 진본과 엮여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보다 신중하게 다가갈 필요가 있었다.

‘계승자. 그의 계승자가 되면 알 수 있을 거다.’

성흔 쟁탈전이 무엇인지 아직도 제대로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쟁탈전을 통해서 나찰들이 ‘계승자’를 찾는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월천. 그 역시 말하지 않았던가. ‘마음에 드는 이가 있다면 고려하겠다.’고.

그가 나를 계승자로 선택하면, 어쩌면······ 탈혼무정검의 짝인 심법을 알 수 있게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와 관련 된 작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을 터.

나는 계속해서 책 속에 파묻혔다.

남은 책이 많았다.

어쩌면 내가 놓친 부분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든 무학은 다른 야차나 나찰의 ‘기본’이 되는 것들이었다. 이곳의 모든 무학을 탐독하고 이해하면 다른 야차를 상대할 때 훨씬 수월할 거란 뜻이었다.

동시에 나는 내가 익힌 것들을 되새기고, 앞으로 익혀야 할 것들을 찾아나갔다.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들을 분류하고 머릿속 저장고에 담아두었다.

‘백보신권, 금강불괴. 이 두 가지는 반드시 익혀야겠군.’

입 안이 말랐다. 눈이 붉게 충혈 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주어질지 모른다. 나는 내게 더없이 충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 * * *

“봐봐. 나왔어.”

“샌님이 서고에서 드디어 발을 뗐군.”

“승천자의 의식을 끝낸 야차라지? 어디 실력 좀 볼까.”

모든 야차의 시선이 대련장의 한 곳으로 모였다.

오한성. 승천자의 의식을 해결한, 모든 소문의 중심에 있는 야차!

그가 3급의 백원후 앞에 섰다. 3급이면 대련장에서 가장 낮은 급수이고 전사의 의식을 행한 야차라면 기본적으로 모두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푸하하! 뭐야, 장난해?”

“발 꼬이는 거 봐. 설마 저걸 백보신권이라고 하는 건가?”

“취권이겠지!”

하지만 보여준 모습은 형편없었다.

야차들은 저마다 비웃음을 내뱉으며 혀를 찼다.

발이 꼬이는 건 기본이고 3급 백원후 한 마리조차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때리기는커녕 얻어맞고만 있으니, 무력을 숭상하는 야차들 입장에선 비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소문이 과장된 걸까? 아니면 승천자의 의식이 고작 저 정도 야차조차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별 게 아닌 건지.

“화린아. 봐봐. 진짜 웃기다.”

“크큭! 설마 우리를 웃기려고 저러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관심 없어하는 야차가 유일하게 한 명 있었다.

붉은색의 긴 머리를 지닌, 구화린이라 불린 여자 야차는 그를 한 번 쳐다보곤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다.

“약골은 관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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