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되새기다(1) >
툭.
물방울이 떨어졌다.
투욱.
이마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내 정신을 깨웠다.
하지만 전신이 포박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눈을 뜨자 모래구덩이 위에 목만빠끔히 내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멍청한 야차가 드디어 깨어났군!”
우렁찬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붉은 피부의 남자가 봉 하나를 쥔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외견은 인간처럼 생겼으나 인간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에서 푸른색 불을 내뿜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게다가 그의 귓불에 새겨진 인(印)은 나와 달리 빨간색을 띄고 있었다.
바로 야차의 인이었다.
“뭐야, 말 못 하는 벙어리냐?”
“너는 누구지? 여기는 어디고?”
“오! 말 할 줄 아네.”
남자가 히죽 웃었다.
“화천께서 너를 살리라고 내게 명하셨다. 나는 ‘떠는 산’ 일족의 야차이고, 이곳 나찰각에선 ‘화련대주’의 직급을 맡고 있는 ‘구화랑’이라고 한다. 이곳은 뭐, 말하자면 치료실이다. 설명은 이만하면 됐겠지?”
전혀.
애당초 나는 계단을 올랐을 뿐이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나찰각에 있었다.
나찰각. 나찰산의 ‘중심’이라 예상하고 있었던 장소.
언젠가 가보려고는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그리고 주변 경관도 이상하긴 매한가지였다. 치료실이라고 했는데, 곳곳에 원형의 구멍이 나 있었고 지금 내가 묻힌 흙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천장에 달린 대나무로 만든 기묘한 장치들을 통해 뭔지 모를 물방울이 떨어지는 중이었다.
내가 대답을 보류하고 있자 스스로를 구화랑이라 소개한 남자가 말했다.
“그나저나 전사의 의식을 끝낸 녀석이 곧 이어서 ‘승천자의 의식’마저 해결했다지? 지금 너 때문에 나찰각이 발칵 뒤집어진 건 알고 있냐?”
“승천자의 의식?”
“그래! 지금 네 머리 위에 있는 저 망토가 그 증거다.”
어렵사리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웬 걸. 검은색 망토 하나가 붕 떠 있었다.
구화랑이 내게 손을 대려고 하자, 휘리릭! 하고 날아온 망토가 구화랑의 손등을 때렸다.
“워, 워. 이놈이 내가 너를 헤치는 줄 알고 달려드는 거 봐라. 하여간 승천자에게만 주어지는 자아의 무구 아니랄까봐 까칠하기 그지없군.”
이맛살을 구겼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걸 얻었다는 문구를 본 것 같긴 하다.
심안을 열자, 망토와 관련 된 정보가 떠올랐다.
<승천자의 망토(value-300,000)>
● 민첩+5
● 자아를 가지고 있어서 자격을 지닌 자만을 주인으로 삼는다.
● 대마법(S)급의 방어능력을 지니고 있다.
『승천자의 의식을 무사히 완료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무구. 종류는 다르지만 하나 같이 거대한 힘을 품고 있다고 전해진다.』
망치로 정수리를 맞은 기분이 이러할까.
에고(Ego)를 지닌 망토라니. 하물며 대마법(S)급의 방어능력이라니······.
이 망토 하나만으로 웬만한 마법에는 모두 방비가 되는 셈이었다. S급의 방어능력이라면 한 마디로 도시단위의 파괴력을 지닌 강력한 마법조차도 막아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팔라딘의 이름을 단 장비들? 물론 좋지만 그거 10개를 모아도 대마법(S)의 방어능력 하나에 미치지 못할 것이었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능력이었다.
망토 하나로 웬만한 마법사들 뺨을 후려칠 수 있는 것이다. A급까지는 나도 몇 번본 적이 있지만 S급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알아서 위험을 감지하고 막아서는 에고까지 갖췄다. 이보다 완벽한 조합이 또 있으랴.
“본래라면 십이나찰에게만 허락 된 것이다. 야차 주제에 나찰의 의식을 행하다니너도 참 간이 큰 놈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물음이다만······ 네놈은 뭐하는 놈이냐? 뭔데 검은 야차의 인을 가지고 승천자의 의식까지 완료했지?”
나를 같은 ‘야차’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내가 흡수한 야차석 때문일 것으로 사료됐는데, 귓불에 새겨진 검은색의 인을 보고는 못마땅하게 여기는 태도였다.
“그 전에 먼저 이곳에서 꺼내주면 안 되나?”
“알아서 나와라.”
“알아서 나오라고?”
전신에 힘을 줬지만 꿈쩍도 안했다.
구화랑은 도와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태도로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끈적끈적하군.’
단순한 흙은 아닌 것 같았다.
묘하게 신체에 달라붙는 끈적끈적함이 있었다.
아마도 특수하게 제작 된 흙인 거 같은데, 신체와 마력의 안정을 꾀하는데 영향을미치는 듯싶었다.
‘마력을 움직이는 흙이다. 역으로 순환시키면 반발하면서 떨어지겠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마력개조를 행한 후 나선형으로 꼬인 마력은 순환과 역순환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스르륵.
모래들이 내게서 조금씩 멀어진다. 그러한 감각을 느끼곤 다시 한 번 신체를 움직이자, 한 번에 모래구덩이에서 몸을 빼낼 수 있었다.
“차크라를 다루는데 제법 익숙하구나. 어지간한 야차들도 ‘정화의 흙’에 빠지면 한참을 고생하는데 말이야.”
차크라?
아마도 마력의 다른 이름인 것 같았다.
나름대로 나를 떠보려는 행동인 듯싶은데 조금 고민이 되긴 하였다.
영락없이 야차인 척을 해야 할 판국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바로 앞에 흰색의 도복이 있었고, 그 위에 공간의 보석이놓여있다는 정도였다.
공간의 보석을 챙긴 뒤 주섬주섬 도복으로 갈아입으며 심안으로 살핀 결과, 나는 눈앞의 남자가 ‘진짜’임을 알 수 있었다.
이름: 구화랑(value-167,700)
직업: 화련대주
칭호: 없음
능력치
힘 80a 민첩 80a 체력 84a
지능 81a 마력 90a
잠재력 (415/460)
특이사항: 순수하며 극도로 강렬한 불. 청염(靑炎)의 주인입니다.
스킬: 청염구봉(9성), 야차질주도(9성), 화극심법(8성)순수한 능력치의 결정판이라고 해야겠다. 그야말로 스스로를 극한까지 단련시킨 자! 지금 상황에선 ‘대적불가’와도 같았다.
“오한성.”
“오한성? 특이한 이름인데. 어느 산에서 왔지?”
“기억이 안 난다.”
“기억이 안 난다?”
별 수 없었다. 야차인 척 행세하며 이곳을 둘러볼 수밖에.
기회이기도 했다. 다른 자들도 살펴봐야겠지만, 야차족은 그 강력함 만에 있어선 어지간한 이종족이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았다. 만약에 이들을 우호적으로 움직일 수있게 된다면 굉장한 힘이 될 것이다.
아니면 혹시 모르는 위험으로부터 미리 대비할 수도 있고.
나에게 이득이 될 만한 걸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또한 도전이고 모험이다.’
이들은 내게 있어서 ‘신비’였다.
그리고 저들도 나를 ‘신비’로 여기고 있었다.
조금 더 이 신비를 탐구해보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차렸을 땐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승천자의 의식을 행하면서 기억도 승천해버린 거냐?”
“재미없는 농담이군.”
“······ 너는 꽤 재미있는 녀석이로구나.”
구화랑이 팔짱을 꼈다. 진위의 여부를 판단하려는 듯 나를 바라봤다.
나는 아예 철판을 깔기로 했다. 저들이 나를 ‘야차’로 인식한다면, 거리낄 건 없었다.
“나는 이제부터 뭘 해야 되지?”
“정말 모르는 거냐?”
“알고 있다면 묻지 않았겠지.”
어깨를 으쓱하자 구화랑이 작게 혀를 찼다.
“‘성흔 쟁탈전’에 참가하게 된다. 전사의 의식을 완료한 풋내기들이 서로 경쟁하는 장이지. 너는 등장하자마자 유명인이 됐으니 표적이 될 것이고. 걱정은 마라. 그래봤자 죽기밖에 더하진 않을 테니.”
“바로 시작하는 건가?”
그건 곤란했다. 만약에 저 성흔 쟁탈전이라는 게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규격을 벗어난 일이라면 발을 빼는 것도 염두에 둬야하는 탓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구화랑이 고개를 저어보였다.
“우리는 야차들끼리의 화합을 중시하고 존중한다. 앞으로 34일 동안은 자유다. 성흔 쟁탈전이 시작될 때까지 조를 만들어도 좋고, 다른 조에 들어가도 나쁘지 않다. 아니면······ 흠, 말로 설명하긴 애매하니 따라와라. 겸사겸사 나찰각 구경을 시켜주마.”
구화랑이 대뜸 움직였다.
빠르게 그 뒤를 따랐다.
치료실을 벗어나자 거대한 또 다른 수많은 방들이 보였다.
천장의 높이가 족히 20m는 되어 보일 정도로 높았고, 하얀색의 날개달린 원숭이들이 곳곳을 오가며 청소를 하거나 업무를 보고 있었다.
‘백원후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백원후(白猿?)는 특별한 괴물이다. 공격적이지 않지만 지능이 높고, 무엇보다 ‘영약’을 찾아내는데 도사다. 그 외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었다. 그 숫자가 극히 드물어서인데 테이밍에 성공한 사람은 손에 꼽혔다.
그런데 이곳엔 백원후가 넘쳐났다. 적어도 내 눈에 보이는 것만 이백이 넘는다. 그 귀한 백원후가 청소를 하거나 잡무를 보는 것도 퍽 신기한 광경이긴 했다.
이윽고 전각을 벗어나자 대자연이 펼쳐졌다.
‘······ 기가 막히는군.’
광활한 자연의 범주를 넘어섰다.
작은 게 없었다. 하늘까지 닿는 절벽과 신비하게 절벽을 감싸는 구름들, 절벽에서떨어지는 폭포수와······ 어지간한 빌딩과 맞먹는 전각들이 수없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야차들이 있었다.
야차의 생김새는 가지각색이었다.
주로 피부나 머리카락의 색깔이 달랐다. 대부분이 인간과 비슷한 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빨주노초파남보의 무지개 색깔로 나뉘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하나 같이 나를 매우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다들 네게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거다. 야차가 승천자의 의식을 통과한 건 무려 3,700년 만에 있는 일이니.”
그놈의 승천자의 의식이 뭔지.
검은색 망토는 이미 자연스럽게 내 등에 착용이 된 상태였다.
이물감도 없고, 착용을 안 한 것처럼 가벼워서 자칫 잘못하면 잊어버릴 수준이었다.
이윽고 구화랑은 넓은 연무장으로 나를 데려갔다.
“이곳은 대련장이다. 원하는 백원후와 대련을 치룰 수 있지.”
백원후와 백여명의 야차들이 대련을 치루는 중이었다.
보통의 백원후는 덩치가 작은 원숭이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연무장에 있는 백원후들은 덩치가 바위처럼 커다랬다.
하물며 무예를 배운 듯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았다.
“아, 원후왕(猿?王)은 건드리지 마라. 성격이 더러워서 죽을 수도 있다.”
콰콰쾅!
그 중에서도 커다란 백원후가 있었다. 전각을 밟으면 땅이 울리고, 주먹질 한 번에 대기가 울리는 거력의 소유자였다.
그오오오오오-!
한 여인이 그러한 원후왕을 맨손으로 상대하는 중이었다. 남색의 머리칼. 피부는 하얗고 한 폭의 미인도(美人圖)에 나올 법한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전형적인 고양이상에 고집이 강해보이긴 했으나 눈앞의 구화랑보다는 훨씬 ‘인간’에 가까운 모습.
“유설! 그녀의 천령신권은 여전히 아름답고 파괴적이군.”
쩌저적!
원후왕과 주먹을 주고받던 여인이 바닥을 밟고 그대로 권을 쏟아냈다. 땅이 갈라지며 원후왕의 배를 정통으로 때렸다. 쿵! 소리와 함께 원후왕의 거대한 신체가 뒤로 밀려나 처박혔고, 유설이라 불린 여인은 주먹을 털어내며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대련장을 떠났다.
“성격만 조금 사근사근했으면 벌써 조를 만들고도 남았을진대. 쯧쯧.”
저 정도면 굳이 조가 필요 없겠다.
다른 대련장의 야차들과도 확실한 ‘격’의 차이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구화랑 정도는 아니지만, 분명한 강자의 축에 들어갈 정도였다.
“다음은 서고에 데려다주마. 조를 짜기도 싫고, 수련을 하기도 싫으면 서고에서 책이나 읽고 있으면 된다.”
구화랑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서고라고 불린 곳도 규모면에선 다른 전각에 꿇리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여전히 백원후가 있었고, 책을 정리하거나 먼지를 털어내는 중이었다.
그 뒤로 거대한 도서관이 펼쳐졌다.
족히 수만 권. 어쩌면 수십만 권은 될 법한 책들이 늘어서 있었다.
하나 같이 무학과 관련 된 책들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한 남자가 있었다.
“이런, 월천(月天)께서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알았더라면 나중에 들어왔을 텐데요.”
구화랑이 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월천이라고 불린 자.
백발의 머리칼을 지닌 노인이었는데, 인자함은 오간데 없고 굉장히 거친 인상을 주는 얼굴의 소유자였다.
‘저 노인은······.’
나 역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노인은 내게 자신을 나찰이라 소개하고 ‘탈혼무정검’을 넘기며 죽었던 자이기 때문이다.
< 12. 되새기다(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