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42화 (43/251)

< 11. 야차(完) >

29계층에서 알라무어의 직검을 얻은 이후 나는 곧장 33계층, 「나태의 계(界)」로 향했다. 귓불의 인을 매만지면 공간이 일그러지며 ‘문’이 나타났고 그것을 통해 1~50계층 중 원하는 곳으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이다.

33계층에서 반드시 얻어야할 게 있었다.

‘팔라딘의 망토.’

이곳 나찰산에 관해선 꽤 많은 연구가 이뤄졌다. 수많은 정보들이 문서화되어 기밀서고에 잠들어 있었고, 나 역시 이곳에서 나찰을 만나 ‘탈혼무정검’을 얻었기에 하나도 빠짐없이 봤던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나찰산에는 종종 특이한 계층이 존재하곤 했다.

예컨대, 바로 이곳 33계층처럼.

수많은 계단이 놓여있었다. 바닥은 무저갱과 같이 깊었고 한 발자국이라도 잘못 디디는 순간 떨어져서 생명을 달리할 것이었다.

괴물은 없지만 쉬어서도 안 된다. 이 계단들은 3초 이상 자리에 멈춰 설 시 그대로 사라지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잠시의 나태함도 두고 보지 않겠다는 의지마저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이곳 어딘가에 ‘팔라딘의 망토’가 있다.

[체력이 ‘45’입니다.]

[재생능력이 전무합니다.]

[다음 계층으로 향하기 위해선 115,799개의 계단을 올라야 합니다.]

문제는 이것이다. 조건.

체력의 계수를 측정하여 한계까지 몰아붙이게 설계가 되어있었다.

45의 체력 정도라면 115,799개의 계단을 쉬지 않고 오를시 탈진, 혹은 빈사상태에 빠진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보상’은 그 한계를 뛰어넘어야 주어지는 법이었다.

팔라딘의 망토를 얻었던 사람은 자신의 한계에 세 배에 달하는 계단을 오르자 그것을 얻었다고 말한 바가 있었다.

‘팔라딘이라 이름 붙은 하나의 세트로 이루어진 장비들. 나찰산에서 구할 수 있는것들 중 최고로 치는 이름이지.’

팔라딘이라 이름 붙은 다섯 개의 장비들은 나찰산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세트장비였다. 하나가 더해질 때마다 놀라운 옵션들이 붙으며 전장을 휩쓸곤 하였다.

다섯 개 모두가 모인 적은 없지만, 고작 세 개를 착용한 자가 ‘휘광’을 발휘해 순식간에 ‘로드 오르모스의 침략’을 막아낸 건 유명한 일화였다.

지금 이 순간에 팔라딘의 이름을 단 장비들을 모두 구할 수만 있다면······.

‘한 발자국 놈들에게 더 가까워진다.’

데몬로드. 그리고 보라색 문의 괴물들.

나는 그들이 멀쩡히 지구를 침략하는 걸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놈들이 오기 전에, 내가 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부지런히 강해져야 한다.

팔라딘의 장비들은 그 시작과 같았다.

“너희도 함께할 테냐?”

크릉!

이타콰가 고개를 끄덕였다. 놀 워리어들도 도전하겠다는 의사를 비쳤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계. 한계란 무엇인가.

나는 항상 고민하곤 했다. 그리고 과거의 나 역시 한때는 ‘내게 한계는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하지만 현실의 벽에부딪힌 이후 나는 절망하며 조금씩 마모되어갔다.

사람이란, 세상이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최강이라 칭송받는 그 허무함에 대하여 씁쓸한 미소를 흘린 적도 많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나는 조금씩 나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다.

연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나이를 들어가며 스스로를 냉정하게 살필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다. 섣부른 모험, 판단은 뒤로하고 내가 겪었던 ‘안전한 범위’에서의 결정만을 내리며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게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조금씩 ‘도전’이라는 단어가 잊혀져가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책임져야 하는 것들도 늘어나는 법이었으므로.

나 역시 그랬다. 내가 책임져야하는 것들의 무게에 짓눌려 안정만을 꾀했다. 나의실패는 인류의 실패와 같았다. 그 리스크를 혼자서 짊어지기엔 어깨가 너무 무거웠다.

돌아온 지금에 이르러선 한계가 없다며 나 스스로를 채찍질하지만 과연 정말로 그럴까? 내 정신은 과거의 오한성과 다르지 않았다. 돌아왔다고 하여 내 정신적인 나이마저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진정으로 ‘벽’에 부딪혔을 때, 나는 다시금 체념하고 스스로의 ‘한계’에 대해서 고민하게 될지도 모른다.

[115,799개의 계단을 올랐습니다. 다음 계층으로 향하시겠습니까?]

숨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기분이었다. 놀 워리어들은 진즉에 공간의 보석으로 들어갔다. 이타콰와 함께 계단을 오르고 있지만 녀석도 한계를 맞이했는지 나 못지않게 골골대는 중이었다.

머릿속이 하얬다.

하지만······ 아직은 조금 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글귀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계단을 올랐다.

3초 이상 쉬면 주변의 계단이 몽땅 사라진다. 계단의 카운트도 초기화 된다. 고로, 멈춰 서선 안 된다.

[200,000개의 계단을 올랐습니다. ‘룬문장의 방패’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다음 계층으로 향하시겠습니까?]

꿀꺽!

침을 삼켰다. 굉장한 유혹이었다. 다리를 부들거렸고 조금만 건드려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보다 체력이 낮은 이타콰마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우리 둘은 선의의 경쟁을 했다.

고작 한계의 두 배다. 이 정도를 걸었다고 쓰러지면 여태껏 해왔던 내 다짐들은 장난과 같이 치부될 것이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리에 감각이 사라졌다. 몸 안의 수분이 모두 빠져나갔는지 이제는 땀도 흐르지 않았다. 족히 며칠은 계단만 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내.

[390,000개의 계단을 올랐습니다. ‘팔라딘의 망토’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다음 계층으로 향하시겠습니까?]

내가 목표했던 팔라딘의 망토가 보상으로 나타났다.

침을 꿀꺽 삼켰다. 전신에서 소름이 돋으며 해방감이 찾아왔다.

이 시퍼렇게 변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끝’에 도달하지 않았다.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장소에 도달하리라. 그리하여 내 마음가짐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나 스스로에게 내리는 제약과도 같았다. 모든 걸 바꾸려는 자가 이 정도도 못해도 되겠느냐는.

시간의 흐름조차 잊어버렸다.

일주일. 한 달.

어쩌면 그 이상을 계속해서 걸은 것만 같았다.

전신이 말라비틀어지고, 정신은 분해되었다. 마치 기계라도 된 것처럼 나는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고만 있었다.

[1,000,000개의 계단을 올랐습니다.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자에게 주어지는 최종보상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상위의 보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끝.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장소!

그리하여 백만 번째 계단에 도달했을 때, 나는 웃을 수 있었다.

* * * * *

33계층의 정상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2m를 훌쩍 넘기는 거대한 신장. 굳어 보이는 인상.

귓불에 ‘화천(火天)’의 인(印)을 새긴 남자였다.

“내가 담당하는 계에 승천자가 나타나다니, 3,700년 만인가?”

남자, 화천은 쓰러진 이를 바라보며 턱을 쓸었다.

“전사의 의식을 막 끝낸 야차가 왜 승천자의 의식에 도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찰각에서 한바탕 난리가 나겠구나. 그리고······ 검은 야차의 인이라?”

이윽고 재밌는 것을 발견한 아이처럼 화천이 웃었다. 야차는 전사의 의식을 행하고 바로 나찰각으로 향하는 게 관례였다.

이처럼 승천자의 의식에마저 도전하는 야차는 없었다. 애당초 승천자의 의식은 야차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나찰에게 주어진 시련이었으므로.

십이나찰. 나찰산의 12개의 계를 담당하는 반신격 존재들. 그런데 야차가 나찰의의식을 행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되거든 나찰각이 발칵 뒤집어질 것이었다.

이런 일은 3,700년 만이었다.

하물며 저주받았다고 칭해지는 ‘검은 야차의 인’마저 가지고 있었다.

‘야차치곤 묘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재미있군. 이번 의식에 성공한 애송이들은 꽤 재미있는 녀석들이 많단 말이야.’

물론 그중에서도 이놈은 걸작이었다.

어쩌면 무척이나 오랜만에 무더기로 ‘계승자’들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계승자. 극의를 볼 자격을 지닌 이름.

지난 수천 년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무더기로 그 이름을 달만한 야차들이 등장했다. 아직은 햇병아리들이지만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대라선(大羅仙)께서 무슨 수를 쓰신 건가?’

수천 년간 등장하지 않다가 무더기로 나타났다는 건 분명히 정상적이지 않은 인과율이었다. 동시에 이런 여러모로 정상적이지 않은 녀석까지 등장한 걸 보면 누군가의 강력한 의지가 느껴질 정도였다. 화천은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왜인지 서두르고 계시단 말이지. 대라선께서 위협을 느낄 무언가가 등장했다는 게 마냥 거짓은 아닌 모양인데.’

이곳 나찰산, 나찰계를 다스리는 대라선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가 위협을 느끼고 움직일 정도라면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화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자신이 걱정할 바가 아니었다.

대라선은 모든 것을 인지하고 보다 먼 곳을 볼 수 있는 분.

십이나찰이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고 할지라도 대라선은 그보다 더욱 위대한 분이셨다.

그분의 생각을 자신 따위가 재단한다는 건 지극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알 수 있으리라.

‘어쨌거나······ 이번 쟁탈전은 꽤 지켜볼만 하겠군.’

지금은 그보다 의식을 끝낸 애송이들에게 신경을 쓸 때였다.

역대급이라는 수식어가 달릴 정도로 쟁쟁한 야차들이 많이 등장했다.

과연 몇 명이나 계승자의 이름을 달 수 있을 지, 화천은 궁금했다.

이윽고 화천이 쓰러진 이를 어깨에 들쳐 멨다.

그 순간, 화천의 신체가 증발하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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