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41화 (42/251)

< 11. 야차(1) >

이처럼 영롱한 빛깔의 보석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어른 주먹만 한 크기에 묘한 마력이 서려있어서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가만히 바라보아도 관련된 정보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에 ‘심안’을 열어 살피자, 그제야 나는 이 보석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무지갯빛 야차석>

- 야차족의 심장. 야차의 생명을 담은 보석.

- 쉐도우 카임의 핵과 합쳐져 변이를 일으킨 상태.

- 삼키면 신체에 ‘검은 야차의 인(印)’이 새겨집니다.

쉐도우 카임의 흔적을 여기서 찾았다. 말하자면 아귀에게 잡아먹히고 일찍이 그 자리에 위치하고 있던 야차석과 합쳐졌다는 뜻인데······.

‘야차족이 살아가는 장소였군.’

파란색 문은 이종족이 살아가는 장소와 연결되는 문이다. 하지만 정작 나찰산에 무슨 이종족이 터를 잡고 살아가는 지에 관해선 알려진 바가 없었다.

야차족이라. 이 역시 들어본 적 없는 종족이었다.

그럼 아귀가 야차마저도 잡아먹었다는 걸까?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50계층 이상에서 살아가는 괴물이 어째서 25계층에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검은 야차의 인.’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바로 이것이었다.

검은 야차의 인!

몸에 인을 새기는 건 문신마법의 기초다. 그 숫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문신으로 말미암아 특별한 힘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었다.

나는 야차석을 들고 턱을 쓸었다.

‘성장할 방법만 있다면 문신사용자가 나쁘지만은 않다.’

흔히들 ‘문신사’라고 부르는 직업. 세부적으로 영(靈)의 힘을 빌린다거나, 문신을새겨 신체능력치를 올려준다거나, 스스로를 제한시켜 잠력을 모으는 ‘봉인구’로 사용하는 등등 그 구분은 많지만 하나같이 성장하는 방법이 까다롭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문신사가 새겨준 문신은 분명히 힘이 깃든다. 검은야차의 인도 그러한 종류의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저주’와 관련된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하지만 내게는 ‘밤의 저주’로부터 면역을 시켜주는 요르문간드가 있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고민이 끝나자 행동으로 옮기는 건 빨랐다.

‘삼키면 된다고 했지.’

최대한 입을 벌려 무지갯빛 야차석을 머금자, 동시에 야차석이 흐믈흐믈 녹았다.

두근······!

이윽고 심장이 타는 듯한 격통과 함께 모든 혈관이 빳빳이 일어났다. 보석의 마력이 심장 쪽으로 집중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거미줄처럼 뒤엉킨 나선형의 마력은 엄청난 안정감을 주었다. 순식간에 야차석의 마력을 중화시킨 것이다. 이후 야차석의 마력은 중단전을 타고 상단전으로 흘러, 내 오른쪽 귓불 부분에서 멈춰 섰다.

[검은색 야차의 인이 새겨졌습니다.]

[1~50계층의 이동이 자유로워집니다.]

[소아귀를 사냥하여 ‘전사의 의식’이 완료되었습니다.]

[‘나찰각’으로의 입장이 가능해졌습니다.]

오른쪽 귓불에 인(印)의 글자가 한자로 새겨졌다. 능력치가 오르거나 스킬이 생기진 않았지만 그 이상의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1~50계층의 자유로운 이동.

그리고 나찰각의 입장이라니.

‘나찰각?’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하물며 전사의 의식은 또 무어란 말인가.

자세히 쳐다보자 관련 된 정보가 떠올랐다.

<전사의 의식>

- 야차족이 성인이 되거든 치루는 의식입니다.

- 소아귀를 사냥한 야차는 ‘야차의 인’과 함께 성인으로 인정받고 ‘나찰각’에 입장할 권리를 얻습니다.

야차족의 성인식이란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야차족이 아니다.

그럼에도 의식이 완료되었다고 나타난 건 내가 ‘야차의 심장’을 삼켰기 때문인 것같았다.

소아귀가 계층을 내려온 것도 이해가 됐다.

성인식을 치르던 도중 실패한 야차가 잡아먹히고, 그 핵으로 말미암아 소아귀가 25계층까지 내려온 것이다.

‘소아귀는 용을 잡아먹으면 대아귀로 거듭날 수 있지.’

처음부터 이타콰를 잡아먹을 생각으로 25계층까지 온 게 아닐까 싶다. 아귀는 강한 존재를 먹을수록 진화하는데, 용을 삼키면 그 즉시 대아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으니 말이다.

기가 막힌 우연의 중복이지만 덕분에 이곳 나찰산의 실체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나찰각. 이름부터가 이 산의 ‘중심’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너무 성급하게 생각은 말자.’

일단은 성장이 먼저였다.

1에서 50계층 간의 자유로운 이동. 이는 엄청난 특혜였다. 나찰산은 ‘최고의 사냥터’로 인정받았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사람이 모였던 계층들이 있었다.

하지만 소문을 타면서 별의별 집단이 모여들어, 각 계층을 사유화하고 통제하기 시작했다. 입장료를 내야하거나 그 집단의 사람이 아니면 아예 출입이 불가하도록 만든 것이다.

헌데······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게다가 ‘프리패스권’까지 손에 넣었다.

‘완벽한 조합이군.’

이보다 완벽한 조합이 또 있으랴!

물 만난 물고기. 적어도 한동안은 거리낌 없이 사냥하며 성장을 도모할 셈이었다.

‘이런 걸 광렙이라고 하던가?’

MMORPG류의 게임에서 캐릭터의 레벨을 미친 듯이 상승시키는 걸 보고 ‘광렙’이라는 표현을 쓰곤 했다. 지금은 그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상황이 받쳐주자 불현 듯떠올랐다.

손이 근질근질했다.

단순히 능력치의 강화뿐만이 아니라, 장비도 얻을 기회였으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경쟁자도 없으며, 내가 얻고자 하는 걸 내가 원하는 때에 얻을 수 있는······.

그야말로 ‘광렙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 * * * *

“물러나지 마라! 좀비는 등을 보이는 자를 가장 먼저 노린다!”

민식이 검으로 좀비의 목을 잘라내며 외쳤다.

동굴안에선 비명이 울려 퍼졌고 피가 난무했다.

“씨발, 씨발, 씨바아아알!”

“제발 죽어! 죽으라고!”

“서, 성녀님, 치, 치료 좀······ 끄아악!”

아비규환. 지옥이 있다면 이러한 모습일까.

살아남고자 조잡한 무기 따위를 휘둘렀지만 좀비는 쉽게 죽지 않았다. 목을 확실하게 잘라 내거나, 불에 전소를 시켜야만 하는데 이제 막 각성한 현대의 사람들이 곧바로 그런 행동을 보이길 기대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물론 살아남고자 발악은 하고 있었지만, 50명을 넘어서던 인원도 불과 삼일 만에40명가량으로 줄어있었다.

그 사이에서 시리아는 쉼 없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빛의 정령들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돌보고 상처를 치유했다.

하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성녀님. 제발, 제 다리 좀, 제 다리 좀 붙여주십시오!”

“붙일 순 없어요. 미안해요.”

자신의 다리 한 짝을 들고 기어온 남자를 향해 시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잘려나간 걸 다시 붙일 수는 없어.’

뼈가 보일 정도의 상처까진 어떻게든 회복시킬 수 있지만, 신경다발이 잘려나간 신체부위를 다시 이어 붙이긴 어렵다.

괜히 도전했다간 막대한 마력마저 들어간다.

다른 사람 10명을 치료할 수 있는 마력이 한 명에게 소모되는 것이다.

오한성. 그가 충고한 것 중에는 ‘좀비킹 아크시즈를 상대하기 전까지 최대한 마력을 아끼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었다.

“붙이라고! 할 수 있잖아! 이 개 같은······ 아악!”

시리아가 지혈을 해주려고 하는 찰나, 좀비들이 달려들었다.

동시에 빛의 정령들이 방패를 만들어 시리아를 지켰다.

민식이 검을 던져 좀비를 죽였지만 이미 남자도 숨을 멈춘 상태였다.

‘여긴 지옥이야.’

왜인지 치료사가 아닌 성녀라고 불리고 있지만, 무력했다.

그래서 더욱 독해져야 한다.

여기서 멈춰 섰다간 모두 죽을 것이기에.

민식은 돌아가는 길을 없앴다. 좀비킹 아크시즈를 죽이지 않으면 다시 현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이윽고 좀비소굴의 전투가 끝났을 때, 남은 인원은 38명이었다. 고작 20여분의 전투로 네 명이 죽었다.

민식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 썩은 책장 위에서 두꺼운 책 하나를 쥐어보였다.

“악령 오르비온의 마법책. 처음으로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악령 마법사’의 직업을 계승할 수 있다. 누가 가질 테냐?”

꿀꺽!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독을 들였다.

지난 며칠 간 직업을 얻은 사람들은 강해졌다. 기적과 같은 능력을 발휘하며 더욱쉽게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다. 그만큼 희귀했고 경쟁자도 많았다.

그런데 ‘악령 마법사’라니.

여태껏 있었던 직업들보다 강해보이는 이름이다.

이에 민식이 쐐기를 박았다.

“악령 마법사는 말 그대로 악령들을 부릴 수 있다. 부리는 악령의 질이 높아지면 대신해서 싸워주기도 하는 꽤 좋은 직업이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그중 한 명이 민식에게 다가와 크게 소리쳤다.

“나한테 줘! 응? 돈을 원하면 돈을 줄게. 10억이면 돼? 아니면 20억? 말만 하라고!”

퍼억!

민식이 주먹으로 청년을 내쳤다.

대한민국 100대 대기업 중 한곳을 다스리는 회장의 첫째 아들.

하지만 민식의 표정은 변함이 없이 냉정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이곳에서 그깟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민식은 고개를 내저으며 이어서 입을 열었다.

“그리도 얻고 싶다면 싸워라. 투쟁해라! 거저 얻을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 펼쳐질 세상에선 더더욱!”

민식은 오르비온의 마법책을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비켜!”

“내, 내꺼야!”

“으아아아악!”

난장판이 벌어졌다. 민식은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리아는 입술을 깨물곤 겨우 입을 열었다.

“이런 방식은 좋지 않아요.”

“이런 방식이 왜 좋지 않지?”

“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서열을 만들죠?”

이미 직업을 얻은 사람들은 피식 웃으며 그 아수라장을 지켜봤다.

벌써 내부에서 서열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민식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리아는 명망 있는 군부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정돈 된 힘이 가지는 힘을 잘 알 텐데.”

“그들도 서로를 헐뜯도록 만드는 방식을 사용하진 않아요.”

“이 역시 생존의 방식이다. 약육강식!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는 살아남는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아직도 나를 못 믿는 건가?”

민식. 그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마치 미래를 알고만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말하면 모든 게 척척 들어맞았고,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는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중국인 남매인 샤오팅과 린린도 민식을 따랐다. 시리아 역시 편지에 적힌,과거와 미래를 암시하는 내용들이 아니었다면 한국으로 오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니······ 이 역시 맞을 터였다.

결국에는 강자존의 세상이 된다는 것.

세계 전역에서 괴물들이 침공하고 혼돈이 찾아온다는 것 모두.

하지만 시리아는 이 불신의 공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그러져 있군요.”

“최종적으로 저들은 나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내가 아니면 어차피 죽을 자들. 또한 이미 죄를 지은 자들이니 저들이 죽으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환호할 것이고, 살아남는다면 저들이 속죄할 기회가 주어지는 셈이지.”

민식은 사람들을 선별하고 구분하여 ‘문’ 안으로 모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미 큰 죄를 지은 자들이었다.

“저들이 죽고 사는 걸 당신이 결정하는군요. 마치 신이라도 된 듯이.”

“내가 하는 게 싫다면 네가 결정해라. 어차피 저들의 생사는 시리아, 네 손에 달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 말을 끝으로 민식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차분한 시선으로 저 난장판을 바라볼 뿐이었다.

분명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른 길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는 결과주의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결과만 올바르다면 과정은 올바르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도저히 한성님과 친구라고 여겨지지 않아.’

오한성. 그도 많은 걸 숨기고 있었다. 민식 역시 그를 대할 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다. 서로가 서로에게 비밀이 있는 것이다.

민식에게 한성은 뭐랄까, 건드려선 안 되는 역린과도 같았다.

하물며 둘의 성향도 백팔십도 달랐다. 온도차이라고 해야 할까.

그 간극의 사이에서 시리아는 혼란하고 있었다.

‘지금은······ 내가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시리아. 그녀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말만으로 민식을 비판할 생각은 없었다. 살릴 것이다. 적어도 허무하게 죽는 사람은 없게끔 만들 것이었다.

저 비뚤어진 영웅에 의해 더욱 많은 이가 죽는 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 * * * *

29계층.

알라무어의 쉼터.

‘사막의 패잔병’이라 이름 붙은 괴물을 없애고 그들의 창고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거의 다 쓰레기들뿐이군.’

창고는 컸지만 대부분이 썩거나 상했다. 하지만 창고를 전부 뒤져서 그나마 멀쩡한 몇 개는 건질 수 있었다.

<갈라파고스의 방패(value-700)>

● 튼튼하다.

● 착용 시 ‘방패병’ 직업을 얻을 수 있다.

<알라무어의 직검(value-4,300)>

● 힘, 민첩+1

● 단단하고 날카롭다.

이런 것들이었다.

별의별 계승 장비도 넘쳐났고, 의외로 쓸 만한 검 같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내겐 이미 어느 것보다 뛰어난 ‘천지인’의 직업이 있었다.

방패병이나 창병과 같은 직업을 굳이 얻을 필요가 없었다.

‘알라무어의 직검. 이건 꽤 괜찮네.’

한창의 사냥 끝에 겨우 검 한 자루를 건졌지만, 나쁘지 않은 성능이었다.

그리고 벌써 실망할 필요가 없었다.

아직 가볼 곳은 많았다.

< 11. 야차(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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