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35화 (36/251)

09. 나찰산(2)

분식집을 찾았다.

김밥과 라면, 떡볶이를 먹으며 빈속을 달랬다.

그 다음 커피를 한 잔 마시곤 머리를 밀었다.

“훌륭한 두상이로고.”

요르문간드가 말했다.

에인션트 원의 제단을 찾으며 타버린 머리카락을 드디어 정리한 것이다.

시리아는 주변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고, 둘은 마치 태풍처럼 남녀 모두의 시선을 강탈하고 있었다.

나는 그 중심에서 여유롭게 무게를 잡는 중이었다.

‘나쁘지 않네.’

어차피 머리는 금방 자란다. 신체적으로도 나는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불과 한, 두 달 사이에 3cm는 큰 것 같았다.

민머리의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어때?”

“시원해······ 보이네요.”

시리아가 어렵게 입을 뗐다. 갑자기 내가 머리를 밀어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모양이다.

자리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뽀글이 파마가 아니라 정상적인 머리로 자라다오.

“손님. 저분 모델 맞죠? 들어보니 러시아어인 거 같은데 용케 말이 통하시네요.”

그 사이에 미용사가 호들갑을 떨었다.

나와 시리아는 서로 각성했기에 말이 통한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시리아의 말은 러시아어 이상이 아니었다.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이 신기해보였을 것이다.

“교환학생입니다.”

“어쩐지! 그리고 저 과묵한 여성분, 여자인 제가 봐도 반할 거 같아요.”

“눈썹정리 좀 해주세요.”

“아, 예. 잠시 만요.”

귀환을 마치고 반나절.

나는 동화의 영향에서 벗어났다.

우리엘 디아블로로써 행하던 말투가 다시 진정된 것이다.

“와, 눈썹 되게 진하시다.”

“어딜 보고 말하는 겁니까?”

“예? 앗!”

미용사가 눈썹정리기를 가져와서 눈썹을 다듬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시리아와 요르문간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마냥.

덕분에 자칫 잘못했으면 눈썹을 그대로 밀어버릴 뻔했다.

“제 눈썹에 집중해주시죠.”

“죄, 죄송합니다.”

미용사가 땀을 삐질 흘리며 집중하였다.

미용사의 잘못은 아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정신없이 두 여인을 훔쳐보기 바빴다.

특히 요르문간드. 녀석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데 탁월했다. 내가 추측키로 요르문간드는 인간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페로몬’같은 걸 뿌리는 것 같았다.

쉽게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요르문간드를 본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넋을 잃기 마련이었으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속보입니다. 작년대비 20배에 달하는 실종신고가 불과 며칠사이에 서울시내에서 걸려왔다고 합니다.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특이한 동물의 시체와 이상한 구멍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분식집에서도, 커피숍에서도, 심지어 미용실에서마저 시끌벅적한 주제. 연달아 계속해서 속보가 터지고 있는 내용이었다.

“세상 참 흉흉해.”

“실종돼서 돌아온 사람들이 초능력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애들도 아니고. 그런 소문을 믿냐?”

“그러고 보니 초능력자 이야기는 몇 년 전부터 있지 않았던가? 동영상으로도 본 거 같아. 몇 시간 만에 삭제됐지만.”

사람들이 웅성댔다.

세상은 아직 ‘문’의 존재를 모른다.

알고 있는 자들은 그야말로 극소수.

대부분 정부에서 통제하며, 은폐하고 있었다. 다른 세계와 연결이 된다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사람들에게 공론화할 순 없으니까.

그나저나······.

‘민식이 녀석이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군.’

갑작스럽게 실종사건이 늘어났다. 내 기억과는 다른 일.

변수라면 민식이 뿐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예견은 하고 있었다.

민식이는 ‘빠른 진행’을 원했다. 빠르게 강해지고, 인류를 빠르게 각성시켜, 그들을 이끄는 진정한 ‘영웅’이 되고자 말이다.

그래서 모든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대부분이 저급한 괴물뿐이 없는 ‘하얀색 문’이겠으나 각성하는데 문의 종류는 상관없었으므로.

‘녀석이 안 했으면 내가 했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너무 이르지 않나?’

나도 상당부분은 동의하는 바였다.

각성의 시기를 당기는 것. 앞으로 2년은 지나야 ‘문’의 존재가 대두된다.

말인 즉, 과거 인류는 2년이란 시간을 낭비했다는 의미다.

그 시간을 당긴다. 하지만 나의 경우엔 어느 정도 기반을 잡고 하려고 했다.

그래야만 어지간한 변수를 직접 컨트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식이는 그마저도 배제한 듯싶었다. 아니면 자신이 다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일 수도 있고.

“경복궁 쪽은 아예 경찰들이 통제하고 있다더라. 그쪽에 무슨 일이 생겼나봐.”

“나 그거 알아. 그거 그거지? 보라색 블랙홀이 나타났다는 소문!”

보라색 블랙홀?

나는 눈썹정리 도중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용사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섬과 동시에 나는 두 소녀에게 다가갔다.

근처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었다. 양은하. 양씨 아저씨네 딸이 저 학교를 다니는 탓에 잘 알고 있었다.

“학생들. 그 이야기 좀 제대로 들을 수 있을까?

“뭘요?”

앞에 있던 당차보이는 소녀 하나가 답했다.

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보라색 블랙홀.”

“별 거 없어요. 경복궁에 웬 이상한 구멍이 나타나서 경찰들이 틀어막고 있대요. 그런데 아저씨, 저 언니랑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으면 안 돼요?”

“내가 어딜 봐서 아저씨야?”

“생긴 건 오빠인데 대머리 오빠는 처음 봐서요. 그리고 오빠는 학생들이란 표현 안 쓰거든요?”

한 방 거하게 얻어맞는 것 같았다.

아무리 신경쓰고 말투를 조정해도 티가 나는 듯싶었다.

내가 잠시 할 말을 잊고 가만히 있자 여학생이 계속해서 말했다.

“저렇게 예쁘고 멋있는 언니는 진짜 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으면 안 될까요? 아저씨가, 아니 오빠가 부탁 좀 해주세요. 제가 갔다가 거절당하면 심장이 멈춰버릴 것 같아요. 애들한테 자랑하게요. 예?”

“흠······ 좋아. 그럼 그 블랙홀에 대해 더 자세하게 말해주면 찍게 해줄게.”

그러자 소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굶주린 하이에나와 같은 눈빛으로 마치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저도 들은 건데요. 살인사건이라는 소문도 있지만 사실은 블랙홀이래요. 몇 백 명이나 되는 경찰들이 동원됐는데 뉴스 하나 없는 거 보면 알겠죠? 숫자 같은 게 적힌 보라색 블랙홀이 경복궁에 생겼다나 봐요. 이미 수십 명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하더라고요.”

보라색 문.

이름 있는 ‘고유의, 태고의 괴물’들이 기거하는 장소.

간혹 ‘거짓된 신’의 이름을 가진 놈들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보라색의 문은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열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빨려들어갔다는 건, 반쯤 문이 열렸다는 것이다.

‘강제로 열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그 정해진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계속해서 문과 ‘빙의’된 동물을 죽이면 된다. 네 번에서 다섯 번쯤 반복하면 특정장소에 형상이 고정되는데, 그것이 지금 말하는 블랙홀이었다. 사람들이 그 블랙홀 안으로 많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시간이 단축된다.

그래서 보라색 문은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해방 직전의 괴물을 제거하기 위해 선별하고 또 선별하여 정예만 들여보내는 이유였다. 그 전까진 철저하게 내용물을 통제한다. 누구도 들어갈 수 없도록.

나는 턱을 쓸었다. 곧이어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경복궁과 보라색 문······ 좀비킹 아크시즈의 땅굴!’

좀비킹 아크시즈!

5Lv로 측정 된 괴물이지만 앞으로 2년 뒤의 혼돈 속에서 나와야할 놈이었다.

천여 마리의 좀비를 다루며, 하나하나가 수제다. 직접 좀비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지능이 있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놈에 의해 잡혀가선 좀비화가 됐다.

설마 그 문을 열려는 건가?

“그 묘한 놈이 너의 하녀에게 남긴 말이 있도다. 그게 걸리는군.”

어느새 요르문간드가 다가왔다. 나를 따라하듯 턱을 쓸며 말하자, 시리아가 부연설명을 하였다.

“어제 저한테 연락이 왔어요. 조만간 들어가야 할 ‘문’이 있다고요. 이미 중국인남매들은 들어가 있다고 그랬어요.”

“다르한의 검······.”

“예?”

“아니다.”

대충 얼버무렸다.

민식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다르한의 검을 구하려고 그러는구나.’

좀비킹 아크시즈의 심장에 꽂혀있는 것.

다르한의 검 외엔 다른 이유가 없었다.

마력을 1올려주는 것 외엔 능력치적인 보너스는 없다. 그러나 거기에 새겨진 ‘월광(月光)’은 A랭크의 공격스킬이었다.

칠흑의손길을 얻은 시점에서 내겐 그다지 필요 없는 스킬이지만, 인류의 기준으로 A랭크의 스킬은 상위 1%만이 가질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그나마 공략하기 쉽고 보상이 좋은 괴물이 아크시즈였다.

겸사겸사······ 함께 들어간 사람들을 구하고, 키워내겠다는 뜻일 터.

의도를 알겠다.

‘조급해졌군.’

놀 샤먼을 만난 뒤 산 채로 잡힌 게 여간 자존심에 금이 간 듯싶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는 중이었다. 보다 빠르게 강해지고자.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아크시즈 정도는 공략하는 방법만 알면 그다지 어려운 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놀 샤먼보단 훨씬 쉬웠다.

“민식이 그 녀석과 함께 가라.”

“제가 말인가요?”

시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를 따라다니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듯싶었다.

하지만 나찰산은 좀비킹 아크시즈의 땅굴 따위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었다.

그곳엔 공략법도 없다. 함께 다니긴 위험하다.

“몇 가지 충고를 해주지. 내가 하는 충고만 지키면 사람들이 죽는 걸 최소화할 수는 있을 거다.”

“한성님은······ 함께 안 가시나요?”

“나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다.”

이타콰를 얻고 나찰산을 오르는 것!

다르한의 검을 얻는 것보다 훨씬,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값진 일이었다.

대신 그만큼 어렵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저기요. 되게 무거운 이야기하는 거 같은 분위기인 건 알겠는데요. 약속은 지키시죠?”

가만히 듣고 있던 고등학생 소녀가 내 등을 콕콕 찔렀다.

당돌한 소녀였다. 양은하도 당돌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는데 이 정도면 쌍벽을 이룰 것 같았다.

내가 요르문간드에게 시선을 주자, 그녀가 자신의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았다.

“작은 인간소녀는 제법 풍미가 있지.”

“먹지 마라.”

나는 계산을 마친 뒤 머릿속을 정리하며 바깥으로 나왔다.

* * * * *

―미안, 미안하다. 한성아. 정말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선글라스를 쓴 채 집으로 향하며 전화를 걸자 민식이가 내게 남긴 말이었다.

녀석은 밑도 끝도 없이 사과만 했다. 자신이 부족했다고.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고. 미안하다고.

내가 굳이 변명을 해가며 ‘함께 하기 싫다.’는 뜻을 내비칠 필요도 없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너를 끌어들이는 건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그러니까, 만나는 건 나중에······ 내가 더 당당해지면 데리러 갈게. 생각보다 일이 복잡해지기도 했고.

“무슨 일인데 그래?”

―앞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날 거야. 나는 그 변화가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도록 조정해야 돼.

변화는 벌써 시작됐다.

추정키로, 적어도 수백 명이 각성했을 터였다.

부랴부랴 한국정부가 나서서 막고는 있지만 소문의 확산마저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힘을 내보이게 되거든 ‘각성자’와 ‘문’의 존재가 순식간에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내가 할 일을 민식이가 해줘서 다행이긴 했으나, 덕분에 나도 속도를 더 올려야하게 생겼다.

―그리고 한성아. 그 ‘요르’라는 여자, 조심해. 시리아랑 안면이 있는 각성자인 거 같은데 정을 빼먹는 스킬을 가졌을 확률이 높아. 너를 노리는 기색이었어.

“내 정기를 빼먹는다고?”

―그냥 가까이만 하지 않으면 돼. 다행히 큰 힘은 없어보였으니까. 그럼, 끊는다. 잘 있어.

“야, 잠깐, 야!”

뚝!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수화기를 통해 계속해서 바람소리가 나는 걸 보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자괴감도 느껴졌다. 여유가 없는 목소리.

저런 상태여서 시리아와 요르문간드의 변명 아닌 변명이 먹힌 모양이었다. 나를 의심하지 않는 건지, 않으려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실패’가 녀석에겐 보다 더 심장을 찌르는 비수로 남은 것 같았다.

‘나도 여유를 부릴 입장이 아니군.’

민식이가 하고자하는 게 뭔지는 알겠다.

나도 대부분은 그 의도에 찬성하는 편이었다.

인류의 빠른 각성, 영웅의 대두, 질서정연한 무리의 생성.

그 과정에서 괴물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 역시 이해하고 있었다. 진정으로 위협을 느껴야만 움직이는 게 우리나라 정부인 탓이다.

민식이가 안 했다면 나찰산을 오른 뒤 내가 했을 것이었다.

문제는······.

‘초기에 무작위로 각성을 시키는 게 과연 올바른 선택일까?’

시작부터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각성해버렸다.

서울에서만 족히 수백 명.

빠른 성장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지만, 그것도 판이 짜인 다음에다. 분명히 부작용도 잉태할 터였다.

그 순간이었다. 한 남자가 내 앞을 막아섰다.

“하, 부러운 대머리새끼! 양 옆에 꽃이 따로 없네.”

예컨대······.

이런 놈.

남녀노소 시리아와 요르문간드를 바라보지만, 다가오진 못한다.

이는 요르문간드가 가진 특유의 기질 때문이다.

약한 자는 다가오지 못하고, 반대로 어느 정도 ‘기준’을 넘은 사람은 이렇게 다가올 수 있었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

잔뜩 충혈된 눈. 노란이빨을 드러내며 나를 향해 웃는, 척 보기에도 정상은 아닌 사람.

몇 시간 전부터 누군가가 따라붙는 기색이 있긴 했다. 설마 사람 많은 공원 한복판에서 나타날 줄은 몰랐지만.

‘각성자로군.’

개나 소나 각성하면 자기 힘을 주체하지 못해 ‘잘못된 길’로 빠지는 사람들이 나올 수도 있었다.

내 눈앞의 남자 역시도 그중 하나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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