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이타콰(完)
‘보인다.’
이그닐과 이타콰가 비춰준 건 나의 심상이다.
더 또렷하게 나 ‘자신’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나는 잠겨있던 문을 열 수 있었다.
‘심상세계.’
심상세계. 마법사들이 흔히 행하는 명상과 관조(觀照)의 최상위레벨로, 들어가면 미지의 영역이라 일컬어지는 심상세계를 구현할 수 있다.
마법사들 중에서도 심상세계를 구현할 수 있는 자는 극소수이며 그 중에는 과거의 나 역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상이고, 허상이고, 하지만 실제로 영향을 끼치는 장소.
본래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심상세계의 구현은 자각몽과 비슷하지만 더욱 고도의 집중력과 마력의 배치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과거에서 돌아온 뒤, 나는 쉽게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생각해야했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선택해야 했기에.
‘······ 된다.’
이그닐과 이타콰의 빛은 내 정신을 맑게 만들었다.
덕분에 나는 심상세계에 데몬로드의 신체 내부를 복사해 첫 줄기부터 늘어놓을 수 있었다.
그러자 녀석들 역시도 내 정신과 연결되어 주변에 나타났다.
꾸우우.
시이이?
이그닐은 여전히 멀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으며, 이타콰는 궁금증 가득한 듯 몸을 움직이려 애썼으나 쉽게 발을 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내 허락 없이 이 공간에서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나조차도 놀라고 있었다.
설마 ‘내 공간’, 그러니까 정신적인 영역에마저 들어올 줄이야!
‘이런 식으로 계속 놀라다보면 끝이 없겠군.’
슬슬 적응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 녀석들은 무한한 변수다. 내 관념의 틀 정도로 이 둘을 제단 할 순 없을 듯했다.
“움직이지 마라.”
나는 이그닐과 이타콰의 행동을 제한했다.
그러자 둘이 고개를 갸웃하며 내가 하는 것을 바라봤다.
‘이게 데몬로드의 신체 내부.’
확대했다.
전신에 흐르는 피의 흐름, 장기의 움직임, 미세한 떨림마저 모두 볼 수 있게 되었다.
큰 틀에선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그 점에서 나는 꽤 놀라고 있었다.
하여 나는 마력이 신체에 끼치는 영향을 먼저 살폈다.
‘마력의 미세한 움직임이 역동적이군.’
완벽한 순환이었다. 중단전과 상단전으로 흐르는 마나는 마치 접착제처럼 끈적끈적했고, 그 유대를 유지하고자 나선형으로 움직였다.
너무 작아서 놓칠 뻔했다. 수많은 나선형의 마력줄기가 수만, 수십만 다발이 엉켜 있었다. 언뜻 보기엔 하나의 줄기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내 의문은 더욱 커졌다. 이만한 숫자로 꼬여있다면 폭주해야 했다. 그만큼 정리가 잘 되어있다는 뜻일까?
‘마력의 역추적.’
데몬로드의 하단전에도 마력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는 분명히 하단전에도 마력이 통했었다는 방증이다.
성장하면서 하단전이 닫히고 중단전과 상단전만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흥분했다. 심상세계에 들어가서야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마력의 잔재를 따라가다 보면 방법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시간이 흘러갔지만 괘념치 않았다. 이그닐과 이타콰가 하품을 내뱉었다. 서로를 핥아주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을 때, 나는 또 다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위로 올라가는 게 아니었구나!’
하, 중, 상.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배꼽에서 심장 쪽으로, 심장에서 뇌의 방향으로 마력을 억지로 운용해 기의 활로를 뚫으면 될 줄 알았다.
잘못됐다. 이미 통로는 뚫려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통로는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럽게 닫히게 되어 있었다.
‘그럼 아주 어릴 때 각성해야 중단전과 상단전을 개방시킬 수 있다는 건가?’
하지만 안 될 일이었다.
아기를 각성시킬 경우 수명이 극도로 짧아진다.
마력을 다룰 수 있는 나이가 있다. 최소 15살은 되어야 했다. 그 전에 각성하거든 신체가 감당하지 못해 빠르게 늙어간다.
결국 또 다른 숙제였다. 이 닫힌 ‘문’을 어떻게 개방시켜야 하는지.
꾸우우?
시이이이!
그때였다.
이그닐과 이타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말로도 제어하지 못하다니. 그만큼 나와 긴밀하게 엮여있다는 걸까?
이어 작은 날개를 펄럭이며 둘이 동시에 빛을 쏘아댔다.
날개에서 쏘아진 황금과 백색의 빛은 데몬로드의 신체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기는 사혈(死穴)인데.’
백회혈(百匯穴)이라 부르는 정수리 부분.
급소다. 강한 충격을 주면 뇌부가 흔들려 치명적이었다.
나는 유심히 그 장소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아······!’
작은 깨달음이었다. 왜 이그닐과 이타콰가 그곳을 비추어 준 건지 알 것 같았다.
‘시작. 이곳에서 시작하는 거였구나!’
아래에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거였다.
인간의 신체와는 달리, 데몬로드의 신체는 그 부분만 아주 작게 열려있었다.
수많은 나선형의 마력이 다발로 뭉친 걸 지탱해주는 부분이 백회혈 쪽의 작은 구멍이었다.
이곳을 뚫으면······ 자연스럽게 중단전과 상단전이 열리고, 쓸모가 없어진 하단전은 천천히 닫혀갈 터.
하단전은 한 마디로 마력이 잠시 머무르는 장소였다.
나는 작게 몸을 떨었다. 심상세계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그닐과 이타콰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구멍을 인지하진 못했을 것이다.
‘마족의 몸은 저 과정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해낸다. 인간은 그렇지 않기에 그저 구멍만 뚫어선 안 돼. 나선형으로 마력을 억지로 꼬아주고 이어줘야 한다.’
수많은 신체 실험이 행해졌다. 그저 백회혈에 작은 구멍을 뚫는 게 전부였다면 진즉에 중단전과 상단전을 여는 방법이 알려졌으리라.
하지만 마력을 나선형으로 꼬아서 잇고, 순환시키는 시스템을 구축해야만 정상적으로 기능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다.
느끼는 중이었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었다.
‘할 수 있다.’
드디어, 드디어······.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심상세계를 접고 현실로 돌아왔다.
동시에 양쪽 두 볼을 타고 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분노도, 슬픔도 아니었다.
기쁨. 기쁨의 눈물이다.
과거, 인류 중 누구도 순수능력치 100에 달하는 마력을 채운 적이 없었다.
가장 높다고 알려진 그랜드 위저드 ‘가노우 료스케’가 겨우 97이었다.
95를 넘어가면, 능력치 1의 차이는 더욱 극명해진다. 특히 마력을 올려주는 장비나 칭호는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무엇보다 간절했다.
그런데······ 닿을 방법이 생겼다.
‘이번에야말로 극의를 본다.’
이번에야말로······.
100을, 그 이상을 넘보리라.
그리고 이 방법이 보편적으로 알려지면 인류의 성장속도가 훨씬 빨라질 것이었다.
마력의 순환은 결국 신체와도 연관이 깊기 때문이다.
과거에서처럼 그저 절망으로 얼룩진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펼쳐낼 때였다. 반격할 때였다.
꾸우우.
끼루욱.
내 감정을 느낀 이그닐과 이타콰가 눈물을 핥아줬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나는 양 손을 들어, 이그닐과 이타콰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
* * * * *
건질 건 다 건졌다.
이제는 정말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내 본신을 언제까지고 내팽개쳐둘 순 없으므로.
“정말 또 잠에 드시는 겁니까?”
라이라가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미 몇 차례나 말했지만, 막상 때가 되니 믿기 싫은 듯싶었다.
“아직 완벽하게 깨어난 건 아니다. 하지만 금방 다시 돌아올 것이다.”
100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
며칠 더 잠든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물론······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빨리 이타콰를 찾아야 했다. 이그닐과 이타콰는 공명하고 있었고, 문제가 생기면 바로 알 수 있을 테니.
실제로 몇 번 둘을 멀리 떨어트려놓는 실험을 해봤는데 이그닐과 이타콰는 마치 옆에 있는 듯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다. 주변 상황, 혹은 서로에게 문제가 생기면 즉시 알아차렸다.
“그럼 이타콰를 지구에 보내시겠다는 건······.”
“초석이다. 기둥이 단단해야 더욱 높은 성을 짓는 법. 다른 데몬로드와 같은 길을 걸어선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초석은 초석이었다. 내 성장을 위한 초석.
라이라가 이타콰를 바라봤다.
자신이 직접 이름을 지었기에, 라이라는 이그닐보다 이타콰를 더욱 애정 있게 다루고 있었다.
잡을 수만 있다면 잡아두고 싶다는 표정이 절절했다.
하지만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었다.
승리로 이어지는 길을 위해!
‘공간의 보석은 꼭 챙겨야지.’
다른 곳에선 상관없지만, 이타콰나 쉐도우 카임을 지구에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었다. 편의를 위해서라도 공간의 보석에 넣어서 사용해야 했다.
이타콰는 워낙에 활동적이니, 나는 공간의 보석을 쉐도우 카임에게 맡겼다.
보석 안에는 몇 가지 물약이 들어있었다.
‘암흑문.’
그리고 그간 벌어들인 포인트 중 1만 포인트를 사용해 암흑문을 구매했다.
그 순간 몇 가지 설명과 함께 내 앞으로 블랙홀과 같은 공간이 생겨났다.
[차원의 균열이 8.35%로 50% 미만입니다. 행성 ‘지구’와 ‘심연’이 직접 연결된 ‘문’을 생성할 수 없습니다.]
[한 차례 경유합니다. 암흑문 경유지의 좌표가 ‘나찰산 중턱(2~???Lv)’으로 설정되었습니다.]
[지구의 무작위 장소에 문이 생성되었습니다.]
[5Lv이하, 최대 5가지 것들만 입장이 가능합니다.]
블랙홀 안쪽에서, 나찰산 중턱과 지구에 생긴 문 모두에 대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곳을 보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찰산도 알고 있었고, 지구에 생긴 문의 위치도 눈에 익었다.
‘어이가 없군.’
나찰산. 내가 ‘탈혼무정검’을 얻은 장소다.
그곳에서 스스로를 나찰이라고 부르던 노인이 죽어가기 직전에 내게 탈혼무정검의 검술서를 줬다. 무척이나 절박한 얼굴이었다.
아마도······ 인간과 비슷했지만, 인간은 아니었으리라.
반면에 지구에 생긴 문도 눈에 익었다.
‘나찰산과 대전이라.’
무작위라더니, 데몬로드마다 정해진 구역이 따로 있는 걸까?
우리엘 디아블로는 한국과 연결이 되어있는 것 같았다. 이걸 지독한 악연이라고 해야 할지.
대전에도 문이 생겼다.
동물과 빙의를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았다. 즉통으로 연결되는 문이 대전 한 구석에 생성되었다. 아무래도 데몬로드가 만든 문은 빙의 형식으로 나타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또한 다행인 점이라면 나찰산 중턱은 그다지 위험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
이타콰가 충분히 버틸 수 있는 곳이었다.
쉐도우 카임이 도와준다면 훨씬 수월하리라.
‘다시 만나자.’
이타콰는 내 감정을 느낀다.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있음을 암시하자 이타콰가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쉐도우 카임과 함께 검은색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라이라를 바라봤다.
“돌아오마.”
“믿습니다.”
라이라는 한 자, 한 자 끊어서 힘을 담아 답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렬한 눈빛이었지만 그만큼의 신뢰도 담겨 있었다.
이후 나는 다시 성좌에 앉았다.
크릉!
이그닐이 나를 지키듯 내 어깨 위에 앉았다.
포효하듯 콧김을 뿜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이타콰와 달리 내성적인 녀석인 줄 알았는데 용은 용이라 이건가?
피식 웃으며 눈을 감자, 동시에 태풍이 몰아치듯 정신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이’ 시간이 만료되었습니다.]
[‘귀환’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