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이타콰(1)
암흑룡의 알에선 번쩍번쩍, 광이 났다.
20만 포인트란 거금을 들여서 구매했으니 아끼는 마음은 이해했다.
그것을 나에게 보여주는 건 과시욕의 일부고.
“무시하십시오. 말이 통하지 않는 자와 대화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게이트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라이라가 정확하게 짚었다.
카르페디엠. 그는 모든 게 자신의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였다. 오만하고, 직설적이고, 꽉 막힌. 전형적인 ‘말 안 통하는’ 범주에 들어가는 존재.
본래라면 무시했을 것이다.
말싸움을 해봐야 서로 같은 레벨임을 인증하는 꼴이니까.
하지만 선전포고를 받고서도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에 만날 땐 전장이라.’
좋은 말이었다. 덕분에 정신이 들었다. 내가 싸울 적은 강하고 많지만 당장 넘어서야 할 산은 저놈이었다. 멸제의 카르페디엠.
만약 놈이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진즉에 영지를 밀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을 질질 끌고 있다는 건 놈의 상황도 여유롭진 않다는 뜻이었다.
더불어······.
‘나를 경계하고 있다.’
저토록 자신의 위신을 내게 보이려 노력한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나를 경계한다는 의미다.
내가 가진 힘. 내가 가진 권능. 어느 것도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특히 디아블로에게 받은 지배의 힘은 아무도 모른다. 오직 나만이 알고 있었다.
라이라는 말했다.
디아블로. 그는 아주 강력한 마신이라고. 그나마 견줄 수 있는 이름은 브뤼시엘, 아르하임, 제로, 팔콘뿐이라고.
생각해보면 경계를 하는 게 당연하다. 권능의 종류와 그 힘의 크기에 따라서 전장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하여, 약하게 나갈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나는 도달할 수 있었다.
“로드시여······?”
나는 라이라의 충고를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카르페디엠의 앞에 섰다.
놈을 지키던 10마리의 괴물이 나를 막아섰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도 그 날이 무척이나 기다려지는군. 바닥을 기며 삶을 구걸하는 자가 누구일지.”
카르페디엠이 인상을 구겼다.
내가 이런 식으로 받아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현실을 깨닫지 못한 멍청한 놈 같으니. 이곳이 암흑상회라서 내게 그 따위 도발을 하는 거냐?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깟 영지쯤은 단번에 밀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량이 넓으니 라이라 디아블로, 그녀만 내게······.”
“너의 그 같잖은 괴물들이 네 목까지 지켜줄 수 있는 줄 아는구나. 또한, 라이라를 내놓으라?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를 달아달라는 말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군.”
카르페디엠. 그는 감정에 솔직한 자였다. 얼굴만 봐도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라이라가 전투태세를 갖추며 내 옆에 섰다. 카르페디엠의 하수인들도 한 마디 말만 떨어지면 바로 공격할 준비를 했다. 암흑상회는 전투금지의 장소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노옴······ 진정으로 나를 화나게 할 셈이냐? 무엇을 믿고 설치는지 모르겠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너야말로 나를 화나게 하지 마라. 내가 왜 100년이나 잠들어있었다고 생각하지?”
유독 길었다.
다른 데몬로드는 대부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어났지만, 우리엘 디아블로는 자그마치 100년이 걸렸다.
소문은 무성했다.
그중에는 ‘그만큼 강력한 권능을 하사받아서’란 소문도 있었다.
라이라에게 들은 말이긴 하지만, 나는 그 소문을 이용하고 부풀려볼 생각이었다.
내가 무심하게 말하자 카르페디엠이 눈썹을 더욱 구겼다.
약소 중의 약소. 허세인가 진짜인가를 가늠하고자 나를 살폈다.
나는 한 마디만을 더 남기고 몸을 돌렸다.
“전장에서 볼 때가 기다려지는구나, 카르페디엠. 진심으로 말이다.”
[우리엘 디아블로와의 영혼동화율이 69%까지 상승했습니다.]
뭐지?
몸을 돌리자마자 눈앞에 떠오른 글귀였다.
본래의 영혼동화율은 58%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그마치 11%가 상승한 것이다.
카르페디엠에게 허세를 부린 게 동화율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된 건가?
문득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라이라가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변하셨군요.”
게이트를 향해가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심 뜨끔했다.
우리엘 디아블로의 연기가 서툴렀을 수도 있다.
하기야 그의 기억 속에서도 허세를 부린다거나 강경하게 무언가를 하는 장면은 없었다.
대부분이 수동적인 삶이었다.
데몬로드가 되는 것도, 라이라가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도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랑은 안 맞아.’
안 맞은 가면을 썼던 건 과거의 한 번이면 만족한다.
어차피 상회를 만들고 카르페디엠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부터 이미 미래가 바뀌기 시작했다.
다소 치사한 방법이지만, 밀어붙이기로 하였다.
“변해서 싫은가?”
라이라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가끔 제가 기억하던 로드의 모습과 다른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습니다. 특히 오늘은.”
아예 눈치가 없는 건 아닌 듯싶었다.
굳이 입에 담지 않았을 뿐.
혼이 바뀌었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반응을 보면 오늘 내가 보인 모습이 썩 나쁘진 않았던 것 같다. 도리어 라이라는 수줍은 듯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자신을 진주와 비교하며 카르페디엠에게 넘기지 않겠다는 뜻을 명확하게 비쳤기 때문일까?
허나 나는 무겁게 말했다.
“바뀌어야 한다. 너도, 나도. 우리의 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렇다. 정해진 결과대로가면 결국 파국이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지구로 쫓겨나듯 도망가는 미래가 펼쳐질 터였다.
하지만······ 바꿀 것이었다.
우리엘 디아블로, 네가 하지 못했던 걸 내가 해내겠노라고.
너는 파괴와 살육밖에 남기지 못했지만 나는 보다 위대한 업적을 쌓고 쌓아서 최후의 결말까지 닿겠노라고.
그렇게 다짐했다.
“······ 명심하겠습니다.”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라이라가 수줍음을 감추고 작게 고개를 숙였다.
* * * * *
나는 황룡과 백룡의 쌍둥이 핵이 담긴 알을 바라봤다.
상회에서 돌아오고 이틀 째.
알의 부화가 얼마 남지 않았음이 느껴졌다.
그들은 마력주입이 실패했다고 했지만, 그저 완벽하게 흡수하여 티가 나지 않았을 뿐이다. 오히려 다른 알들보다 황룡과 백룡의 알이 더욱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분명히 공명한다고 했지.’
나는 다시금 심안을 열어 둘의 상태를 살폈다.
공명이란 서로를 느끼는 것이었다. 멀리 떨어져있어도 적용이 된다면 한 마리는 심연에, 한 마리는 지구에 놓아도 되지 않을까? 실시간으로 위급함을 전할 수만 있다면 즉시 전이하여 만약의 상황에 대비할 수 있을 진대.
문제는 방법이다.
‘암흑문을 통해서 지구로 보낼 수 있다고는 하나.’
떨어지는 위치도 문제고, 그것을 찾으러 가는 것도 문제였다.
확실한 건 분명히 ‘문’의 형식으로 나타날 거라는 점.
내가 가서 직접 문을 열어야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부딪혀봐야겠군.’
지배자의 연동도 직접 부딪혀봐야 아는 것이었다.
과연 데몬로드의 신체로 지배를 행한 것이 본신에게도 이어질 것인지.
이러한 실험은 빨리 해서 나쁠 게 없었다.
황룡과 백룡 중에 무엇을 보낼 지도 정했다.
‘백룡이 낫겠지.’
상상을 초월하는 육체능력. 반대로 황룡은 체력이 약했다.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에 적응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심연과 지구는 분명히 모든 게 다른 곳이었으므로.
“로드시여. 이름은 정하셨나요?”
불현 듯 라이라가 다가왔다.
용의 알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애정과 약간의 섭섭함이 느껴졌다.
처음으로 용을 길러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나, 진행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얼마 못 가 죽을 게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만히 턱을 쓸었다.
“이름?”
“용은 이름에 따라 특색 있게 성장한다고도 전해집니다. 강인한 이름을 붙이면 보다 강하게 자랄 수 있을 거예요.”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금동이, 은동이를 생각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된 순간이었다.
“생각해둔 건 없군.”
“그럼······ 제가 하나 의견을 올려도 괜찮을 지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라이라가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이타콰. 고대에 태풍을 다루며 수많은 거인들을 물리친 용맹한 야수의 이름입니다.”
“이타콰.”
착착 입에 달라붙는 이름이었다.
태풍을 다스리는 야수라. 황룡보다는 백룡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럼 나머지 한 마리의 이름은 ‘이그닐’로 해야겠군.”
내가 겪었던 가장 강력한 용의 이름이고, 무엇보다 이타콰와 같은 이씨 돌림이었다.
“나머지 한 마리라니요?”
“이 알 속에 두 마리가 들어있다.”
“······ 예?”
라이라가 잠시 벙찐 표정을 만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한 알에 두 마리가 들어있다니.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강인한 이름을 지어주려던 것도 용이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성장하길 빌어서다. 그다지 희망적인 느낌으로 지은 게 아니었던 탓이다.
“곧 부화하겠군.”
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쩌적! 소리와 함께 알의 균열이 커지며 갈렸다.
후우우웅!
주변의 마력이 요동쳤다.
내 심장마저 요동칠 정도로 강렬하기 짝이 없었다.
용의 부화는 나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 이 정도의 마력방출이라니······!”
라이라는 반쯤 기겁하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면 이 정도로 막대한 마력의 표출은 확실히 비정상적인 듯싶었다.
이윽고 알이 완전히 깨지며 두 마리의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은 황금빛이 찰랑이는 비늘을 지녔고, 다른 한쪽은 완연한 순백이었다.
아름답다. 그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황홀한 광경이었다.
크기는 이제 50cm 정도.
바닥에 앉아 꼬리를 파닥대며 둘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그닐, 이타콰.”
내가 두 이름을 부르자 녀석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동시에.
[지배자의 힘이 발휘됩니다. 황룡 ‘이그닐’과 백룡 ‘이타콰’에게 강력한 지배의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지혜와 현안의 어머니, 발푸르기스의 자식들입니다. ‘성현(聖賢)의 가호’가 부여됩니다.]
[‘성현(聖賢)의 가호’란 이름에 부여되는 자격입니다. 염왕의 힘과 태풍의 힘이 각각 적용되기 시작합니다.]
끝이 아니었다.
둘은 내 몸에 붙어 꾸역꾸역 오르기 시작하더니, 양 어깨에 도착하곤 꼬리를 살랑대며 흔들었다. 곧 이마가 빛나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번져나간 빛이 내 전신을 조금씩 감쌌다.
[‘혼의 연결’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그닐과 이타콰가 사용자를 부모로 인식합니다.]
[용은 외견이 아닌 혼의 연결로 죽을 때까지 대상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용의 태생이나 성장에 관해 내가 알 리 만무했다.
그 개체가 많지 않기 때문에 알려진 사실도 거의 없었다.
라이라조차도 이런 현상에 대해선 들어본 바가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 됐다.’
연결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이 둘의 감정마저 느껴졌다.
작게 전율했다. 연결뿐만이 아니다. 이 두 마리가 얼마나 ‘격 높은’ 존재인지도 알 것 같았다.
지혜와 현안의 어머니, 발푸르기스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자식인 이 두 마리의 용은 일반적인 용과는 종의 규격 자체가 달랐다.
무엇보다 정말로 이름에 힘이 주어졌다. 성현의 가호는 내가 알고 있는 어떠한 가호보다 더욱 값진 것이었다.
이는 하늘이 내게 내린 기회가 분명했다.
할짝!
할짝!
내가 전율하는 사이, 이그닐과 이타콰가 더욱 애교를 피우며 내 목덜미를 핥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