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너로 정했다(2)
구르망디는 누더기를 입고 나타났다.
뼈도 오랜시간 제대로 안 닦은 듯 까맣고 누리끼리한 냄새가 났다.
아무리 리치라지만 왜 다른 이들이 멀리 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 외엔 금색의 외안경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심각한 빈티지 패션과는 괴리감이 있을 정도로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저······ 를 보고자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옆에 라이라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서있었다. 구르망디가 라이라의 눈치를 보는 걸 보면 말로만 해서 끌고 온 건 아닌 듯싶었다.
그리고 나를 앞에 두자 굉장히 조심하는 태도가 느껴졌다.
‘심안.’
궁금하기도 했다. 리치는 통상적으로 8Lv의 괴물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곧이어 녀석의 상태창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름: 구르망디(value-94,000)
종족: 리치
칭호:
● 미치광이 과학자(7Lv, 지능+9)● 정수 약탈자(6Lv, 지능+7)능력치:
힘 75 민첩 75 체력 75
지능 98(82+16) 마력 85
잠재력(392+16/395)
스킬: 38개의 스킬이 존재합니다.
과연 리치다운 능력치 분포였다.
하지만 유독 눈에 뜨이는 건 지능이었다. 98이라니. 어지간한 마법은 저 뼈다귀에 기스 하나 내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어지간한 스킬을 배워도 남들보다 수십, 수백 배는 빠르게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스킬의 개수가 38개나 됐다.
‘잡스럽기 그지없군.’
실험을 위해서인지 분해나, 대장장이 기술이나, 심지어 재봉마저 익혔다. 그 스킬들의 대부분이 그래도 6~7Lv의 언저리는 되는 걸 보면 새삼스럽게 지능의 역할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오래 살아온 탓도 있겠지만.
나는 초조해하는 구르망디를 향해 말했다.
“재주가 좋다고 들었다.”
“별 볼일 없는 재주일 뿐입니다. 아, 혹시 제 작품이 피해를 끼쳤습니까? 제 주 고객층은 괴짜 마족이나 마법사들밖에 없어서··· 설마 데몬로드께서 이용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저,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과도할 정도의 몸짓이었다.
100년 만에 깨어나서 이름도 거의 날리지 못했는데도 이런 반응인 걸 보면 데몬로드의 위상이란 게 그만큼 대단한 모양이었다.
“네 작품이 암흑상점에 꽤 많이 배치되어 있더군.”
“그것이······ 암흑상회에 신청만 하면 그들은 어지간한 건 다 받아줍니다. 저······ 그리고 대부분의 데몬로드들께선 상점을 이용하지 않고 이름 있는 자들과 직접 거래를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암흑상점은 데몬로드들을 위한 판매처라기보다 일종의 ‘오픈마켓’형식인 듯싶었다.
그래서 내가 상점에서 자신의 물건을 산 게 꽤나 신기한 듯했다.
나는 대답 대신 품에서 공간의 보석을 꺼냈다.
“이것도 너의 작품이냐?”
“그, 그렇습니다. 아공간의 내부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상품이었습니다만, 왜인지 여태껏 하나밖에 안 나갔습니다. 며칠 전에 추가로 하나가 더 팔려서 의구심을 가졌었는데······.”
왜 내 예술을 몰라주느냐는 투정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좁은 아공간 하나를 얻자고 2,000pt나 사용할 머저리가 어디 있겠는가.
이윽고 구르망디가 슬쩍 나를 바라봤다.
맞다. 그 하나를 구입한 게 나였다.
‘장사치 스타일은 아니야.’
장사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잘하면 생각보다 일이 더 잘 풀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와 동업을 해볼 생각은 없느냐?”
“동업이라면, 같이 일을 해보자는 것입니까?”
“그렇다. 나는 네가 가진 ‘공간의 보석’으로 일을 하나 벌려볼 생각이다.”
구르망디가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실제로 눈이 없으니 눈빛도 없겠지만 분위기가 그렇다는 소리다.
짝!
내가 한 차례 손뼉을 치자, 내 뒤에 위치한 문이 열리며 100여 마리의 슬라임이 모습을 드러냈다.
슬라임들은 대부분이 각기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심연에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슬라임마저 있었다.
“허, 대단합니다. 슬라임의 돌연변이들이 상당히 많군요. 개체값도 굉장히 훌륭합니다. 저도 돌연변이 연구를 하고 있지만 이 정도의 이상변이는 본 적이 없습니다.”
돌연변이라. 구르망디는 가지각색의 슬라임들을 그렇게 보는 것 같았다.
겁을 먹은 상황에서도 하나도 빠짐없이 살핀 걸 보면 영락없는 과학자였다.
개체값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슬라임들은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 진화한다.”
“예? 그게 무슨······.”
나는 성장치가 임계점에 다다른 슬라임 하나를 골랐다.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남겨둔 것이다.
용암거미 하나를 산채로 먹이자 곧이어 슬라임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슬라임’이 ‘마그마 슬라임’으로 진급했습니다.]
[성장 한계치가 ‘50’증가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구르망디가 기겁했다.
그럴 만도 했다.
슬라임은 보통 주변 환경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며 적응하고 진화해왔다. 아주 오랜 시간이 들어가는 일이다.
마그마 슬라임은 화산 근처에 사는 희귀종이다.
당연히 평범한 슬라임이 화산으로 간다고 마그마 슬라임이 되진 않는다. 그게 상식이고 정상인데 지금 눈앞에서 일어난 일은 구르망디가 보기에 ‘기적’과 다를 바 없을 터였다.
“오로지 나만이 가능한 일이다. 또한 나는 이 슬라임들을 ‘공간의 보석’에 넣어서 판매할 생각이다.”
“힘들 겁니다. 공간의 보석은 지난 30년 동안 하나밖에 안 팔렸던 제품이고, 사실 저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물건이라······ 하지만.”
구르망디가 다시금 진화한 슬라임을 바라봤다.
그리곤 뼈마디를 잘게 떨어대며 말했다.
“제 친구들에게 팔면 좋아하겠군요. 진화하는 슬라임이라니! 혹시 무슨 마법이나 연금술을 사용한 건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는 말을 아꼈다. 두 가지 권능이 합쳐진 우연의 산물이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침묵을 구르망디는 마음대로 해석했다.
“죄, 죄송합니다. 그런 핵심 기술을 알려다는 것 자체가 무례한 일이지요. 제가 잠시 흥분했었나봅니다. 돌에서 금을 만들 수 있는 연금술은 있지만, 종의 색깔을 바꿔버리는 건 키메라를 제외하곤 불가능한지라······.”
눈앞에서 봤다. 서로 다른 종을 섞어버린 키메라완 본질적으로 달랐다. 구르망디가 흥분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뀨!
그때였다. 이제 막 일어난 듯 눈을 비비며 쉐도우 카임이 천천히 날아왔다.
자연스럽게 구르망디의 시선이 쉐도우 카임에게 닿았고, 동시에 그는 기겁하며 입을 크게 벌렸다.
“카임! 저건 카임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하더군.”
“하지만 카임은 날개가 없는데······ 게다가 개체값이 카임치곤 말도 안 되는······.”
“개체값이란 게 무슨 소리지?”
아까부터 ‘개체값’을 운운하는데 의구심이 생겼다.
그러자 구르망디가 천천히 자신이 쓴 외안경을 벗었다.
“모든 종에는 한계가 있고, 그 종도 개체마다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다릅니다. 제가 만든 이 안경은 각 개체의 성장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모든 골격, 외피, 근육의 모양이나 내부의 기관, 마력의 질 따위를 투시하고 종합해서 결과를 만드는 거지요. 300년간 모든 종류의 괴물을 연구했고 대부분의 개체마다 수백, 수천 개의 표본으로 대조해서 오차를 최대한 줄였습니다.”
장황한 말을 쏟아냈다.
자랑 아닌 자랑이었다.
300년간 노력한 결실이라니, 확실히 평범한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로드시여. 말은 그럴싸하지만 정말 쓸모없는 물건입니다. 현혹되지 마시길.”
라이라가 나섰다.
그녀는 구르망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구르망디가 겁에 질려 몸을 위축하자, 라이라가 이어서 말했다.
“고블린이 약하고, 용은 강하다는 걸 모르는 자는 없습니다. 그걸 세분화시켜가며 나눈다는 건 시간낭비에 불과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각 종족의 한계는 분명히 있었고, 개체가 아무리 강해져봐야 고블린이 용을 이길 순 없다. 불변의 진리였다.
하지만 궁금했다.
“써보고 싶군.”
“그, 그러십니까?”
구르망디조차도 놀랐다.
반응을 보아하니 그다지 평가가 좋지는 않던 모양.
이윽고 구르망디가 뼈마디를 마구 떨어대며 외안경을 조심스럽게 넘겼다.
그것을 착용하고 쉐도우 카임을 바라보자 변화가 생겼다.
[‘성장투시 안경’을 착용했습니다.]
[‘심안(9Lv)’이 ‘성장투시 안경’의 기능을 흡수했습니다.]
이름: 쉐도우 카임(value-4,470)
힘 40b 민첩 50b 체력 45b
지능 30b 마력 60a
잠재력(225/270)
뭐지?
‘기능흡수?’
처음 보는 현상이었다.
게다가 심안으로 본 결과가 달라졌다.
능력치의 숫자 뒤에 알파벳이 달려 있었다.
더 자세히 바라보자 그와 관련된 설명이 떠올랐다.
※ 각 개체의 성장치를 세분화시킨 기능입니다. f, d, c, b, a, s로 등급이 나뉘며 s에 다가갈수록 높은 성장가능성을 보입니다.
- f는 최대 30까지의 성장가능성을, - d는 최대 50까지의 성장가능성을, - c는 최대 70까지의 성장가능성을, - b는 최대 80까지의 성장가능성을, - a는 최대 90까지의 성장가능성을, - s는 최대 100까지의 성장가능성을 나타냅니다- 절대적인 수치는 아니므로 참고만 할 것. 성장가능성이 높은 능력치는 빠르게 올라갑니다. 그러나 잠재력의 한계에 막히면 성장가능성이 높아도 더 이상 성장이 불가합니다.
말하자면 천부적인 재능을 수치로 표현한 것이었다.
신체적 능력에 특화된 사람은 힘이나 체력이 잘 오르고, 마법에 재능을 지닌 사람은 지능이나 마력이 잘 오른다. 하지만 오랜 시간 확인하고 겪기 전까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것까지 볼 수 있다니.’
순수한 마음에서 나는 놀라고 있었다.
심안의 기능만으로도 대단한데, 각 능력치의 성장가능성마저 엿볼 수 있게 될 줄이야!
나는 천천히 외안경을 벗었다.
그럼에도 기능은 유지가 되고 있었다.
‘이것도 천지인의 힘이다.’
스킬의 업데이트.
안경 하나 썼다고 스킬의 보완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들어본 적도 없다.
“어, 어떠십니까?”
“훌륭하다.”
“그, 그렇습니까?”
칭찬이 어색한 듯싶었다.
나는 가만히 구르망디를 바라봤다.
분명히 훌륭한데, 약간씩 핀트가 어긋나서 유행을 못 타는 것 같았다.
“구르망디여. 솔직히 말하마. 나는 네 능력이 탐난다.”
사실대로 말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누군가를 인정하는데 나는 인색하지 않았다.
[지배자의 권능이 발현되었습니다. 구르망디의 상태가 ‘경계’에서 ‘감격’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이라면 25%할인 된 ‘70,500’ 포인트에 그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고작 한 마디.
구르망디가 인정에 굶주려 있었다는 방증이었다.
그럴 여유는 없지만, 어쨌거나 경계가 풀렸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
구르망디는 감동한 태도를 지우지 않으며 말했다.
“저도······ 동업 제안이 무척이나 탐이 납니다.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소문이 퍼지면 위험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아예 내 밑으로 들어오는 걸 기대했는데 동업으로 선을 그었다.
안타깝지만 첫술에 배 부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지금은 오로지 슬라임만 판매할 생각이다. 그리고······ 감히 누가 나를 위협하지?”
“죄, 죄송합니다.”
강하게 나갔다.
어차피 슬라임만 있다면 소문이 날 것도 없었다.
간혹 다른 종으로 진화할 경우에도 방법이 있었다.
‘진화는 내 지배의 힘이 작용할 때만 기능하지.’
몇 번이나 실험을 해봤다.
예컨대 용언과 지배의 힘으로 ‘진화를 하면 전신을 터트려라’라고 명령했더니, 슬라임 하나가 진화의 순간 폭사해버렸다.
마찬가지로 판매할 물건엔 ‘슬라임 외의 종으로 진화를 하게 되면 폭사하라’라고 각인을 새겨놓으면 그만이었다.
물론 반대로 ‘~종으로 진화하라’는 명령은 먹히지 않았다. 도리어 그 종으로 진화를 못하자 슬라임이 녹아내리며 자살했다. 슬라임이 자살하는 광경을 그때 처음 보았다.
“그렇다면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지요?”
“상회명은 절대지배. 수익은 7:3로 나눈다. 이는 ‘공간의 보석’을 독점형식으로, 투자형식으로 건넸을 때의 조건이다. 아니면 다른 분배방식을 원하나?”
“어차피 썩고 있는 재고였으니 3이나 주시는 점에선 불만이 없습니다만, 다른 계획은 세워 두셨는지요?”
“유행은 선도하는 것이다.”
“유행, 이요?”
이곳에선 유행의 개념이 희박한 건가?
구르망디도, 라이라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내가 유행을 만든다.’
상관은 없었다.
유행은 따라가는 게 아니었다.
온갖 더러운 수를 써서라도 선도하는 것이었다.
가장먼저 첫 발을 내딛은 자는 오랜 시간 기억에 남는 법이었으니!
* * * * *
나는 먼저 이름 있는 흑마법사들과 리치들에게 ‘연구용’ 목적으로 슬라임을 담은 ‘다마고치’를 넘겼다.
재고 중 53개를 사용해 30개는 연구용으로, 10개는 심연의 도시를 주름잡는 존재들의 ‘아이들’에게 설명서와 함께 보냈다.
역사를 살펴봐도 유행을 주도하는 건 언제나 그렇듯 ‘급’있는 자들이었다.
‘심연에도 도시가 있을 줄은 몰랐군.’
그렇다. 놀랍지만 심연에도 도시가 있었다. 괴물들이 모여 사는 꽤 살벌한 곳이.
대부분이 사대왕과 연관이 있거나 데몬로드들이 지배하는 장소였지만, 그러지 않은 곳만을 골라서 선별해 보낸 것이다.
절대지배 상회. 일단은 내 이름 대신 ‘라이라’와 ‘구르망디’를 전면에 내세웠다.
적당히 무르익었을 때 내가 나서도 늦을 건 없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구르망디의 인맥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소문은 별로지만, 썩어도 리치였다. 거기다가 공짜로 준다는 것을 마다할 자는 없었다.
남은 13개는 암흑상회에 넘겼다.
상점에 등록되고 ‘다마고치’라는 이름으로 올라간 걸 확인한 뒤 미소를 지었다.
‘가격은 800포인트.’
들어보니 ‘공간의 보석’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원재료값이 200pt 정도라고 하였다.
그걸 2,000에 팔아먹었으니 폭리도 이런 폭리가 없다. 안 팔린 이유를 알겠다.
너무 비싸선 안 된다.
내가 노리는 건 박리다매였다.
슬라임은 많았고, 키우기도 쉬웠다.
그리고 13개의 애매한 숫자는 의도한 것이다.
재고가 얼마 없어보이게끔.
‘반응이 언제 올지 모르겠군.’
문제는 시간이었다.
전이의 시간이 만료되기까지 앞으로 5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에는 모든 일을 구르망디와 라이라가 해야 한다.
이틀이 더 지나자 헐레벌떡 라이라가 뛰어왔다.
“로드시여. 다마고치가······ 완판 되었다고 합니다.”
감정이 벅차는 눈빛이었다. 뭔가 울먹이는 느낌도 섞여 있었다.
이해했다. 여태껏 빚에만 허덕이다가 드디어 빛을 본 것이다.
다 큰 여자가 다마고치 다 팔렸다고 감동 먹은 모습을 보니 느낌이 묘하긴 했지만, 어쨌든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른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