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절대지배(2)
그렇다고 아예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나를 다시 사랑하게 된다면······.’
과거 우리는 짧은 연인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나로선 그녀의 어둠을 치료해줄 수 없었다. 이미 망해버린 가문의 그림자에 시리아는 너무나도 많은 정신을 쏟아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 역시도 속이 썩어 문드러진 상태였다.
최후의 영웅, 유일한 희망. 그딴 미사여구가 나를 조여 왔다. 정해진 절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에도 나는 가짜의 행세를 해야 했다.
그 결과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만을 줬다.
서로를 보듬어주지 못했다. 그러기엔 여유가 없었으니까.
지금이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제할 순 없다. 5년 뒤 알 아락사르가 출현한다. 이는 나로 인해 벌어진 재앙이었지만, 그 이전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굵직굵직한 사건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사랑을 싹틔우고 결말을 맺기까지 과연 기다려줄 수 있을 것인지. 하물며 그 끝이 ‘완벽한 지배’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사랑은 무슨.’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의 관계만으로도 충분하다.
내 운명엔 해결해야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아직 데몬로드와 요르문간드에 대한 파악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하물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 중에는 나조차 승산이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일들도 많았다.
기다려주라고, 기도해주라고, 그런 무책임한 말을 떠넘길 수는 없었다.
‘6개월 뒤, 세계 곳곳에 싱크홀이 나타난다.’
가장 급한 건 바로 이것이었다.
앞으로 6개월 뒤에 있을 변화의 전조!
수많은 인명사고가 발생하고, 세계적으로 떠들썩해지는 일이지만, 정확한 원인은 누구도 규명하지 못했다.
나중에야 싱크홀 깊숙한 곳에 모종의 ‘시련’이 생성되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싱크홀들이 서로 연결되며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거대한 투기장이고 도서관이었다.
어떠한 존재의 주도하에 벌어진 일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초월적인 존재’의 개입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곳에 도달한 사람들은 모두 각성했으며, 그중 극소수는 굉장한 능력과 클래스, 장비 등을 얻었다.
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많은 사람이 죽었다.
‘비밀조약 때문에 늦게 알려진 사실이지.’
그곳을 나온 사람들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이유.
초월적인 존재의 개입과 그가 건 금제 때문이었다.
정작 나중에도 그 존재가 누구인지, 한 명인지 다수인지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그중에는 영웅이라 칭해지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들에게까지 영향력을 계속해서 행사한 걸 보면 심상치 않은 일임에는 분명했다.
나는 가서······ 진상을 파악해야 한다.
그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혹은 또 다른 누군가인지.
얻어야 할 것도 있었다.
‘7대 주선. 그중 인내를 얻어야 한다.’
7대 죄악과 반대개념으로 사용되는 언어가 7대 주선이었다.
순결, 절제, 자애, 근면, 인내, 친절, 겸손!
그중 하나인 ‘인내’를 그곳에서 구할 수 있었다.
불굴의 영웅, 그락시오. 그가 거기서 그것을 봤다고 했다.
아무도 얻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그 자리에 인내가 있었다고.
7대 주선 중 세상의 표면에 나타난 건 몇 개 없지만, 그것들은 하나같이 ‘이적’을 발휘했다. 모두 모으면 모든 악을 제거할 수 있다는 소문마저 돌 정도로 강력하기 짝이 없는 장비들.
인내 역시 그럴 것이다.
“한성님?”
내가 가만히 입을 닫고 있자 시리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님은 빼라.”
“그럴 순 없어요.”
그녀가 고집을 부렸다. 나는 시리아의 고집이 얼마나 질긴지도 안다. 내게 고마움을 표하는 걸로 나를 높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럼 적어도 다른 사람이 있을 땐 그냥 이름으로 불러라.”
“예.”
시리아가 대답을 하곤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입을 닫곤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녀가 무엇을 묻고 싶었는지, 대략은 알 것 같았다.
‘나와 민식이의 관계.’
그녀가 한국으로 온 건 며칠이 채 되지 않았다. 그 시간동안 ‘동료애’같은 게 싹틀 리도 없었다. 다만, 나와 민식이의 관계에 대해선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그럼에도 묻지 않은 건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으리라 여기는 것이었다. 그녀 본인처럼. 나를 만나기 전까진 정령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 연기하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알아서 잘 대처할 터였다.
‘쉽게 죽을 녀석은 아니지.’
다시 돌아가 영웅이 되겠다는 집착은 나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고작 이런 곳에서 죽고자 돌아온 건 아닐 테니 나는 마음을 편하게 가졌다.
무엇보다 마검사의 능력이면 이러한 위험쯤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었으므로.
지금은 그것보다, 놀 치프를 지배하고 사냥하는 게 더 급했다.
* * * * *
시리아는 시선을 옮겼다.
고작 삼일을 사냥한 것으로 17마리의 놀들이 모두 놀 워리어로 진화했다.
그러자 사냥에 더욱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동시에, 오한성. 그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 사람이 맞는 걸까?’
시리아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한성의 움직임은 자신이 겪었던 중국인 남매와 민식보다 더 뛰어났다. 시리아가 본 가장 강한 사람들보다 더욱 빠르고 강력하게 놀들을 깨부수는 중이었다.
“돌로 만든 검도 제법 쓸 만하군.”
가장 놀라웠던 건 고작 몇 시간 만에 돌을 갈아서 검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일견 조잡해보이나 균형미가 갖춰진 검이었다. 저것으로 벌써 수십의 놀들을 도륙했다.
놀라운 검술이었다. 러시아 군부의 사람들 중에서도 저렇게 검을 쓰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철저한 실전 검술, 방어를 도외시한 미친 검격. 그러나 놀랍도록 정교하여 조잡한 돌검이 부서지지 않고 버텼다.
“놀 치프의 영역 중심으로 들어간다. 잘 따라오도록.”
그는 쉬지 않았다. 모든 정비를 끝내고 원래 목표했던 적을 죽이고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문’을 발견하고 각성하며 계속해서 신기한 일들을 접하고 있었다.
지구의 생명체가 아닌 존재들. 거기다가 시리아는 ‘빛의 정령’까지 접했다.
한성에 의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이런 능력을 한꺼번에 지닌, 사람 같지 않은 사람. 그게 한성이었다.
시리아는 빛의 정령을 소환해보았다.
마람. 가장 크고 강력한 정령의 이름.
“한성님을 도와주렴.”
절레절레!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빛의 정령인 마람이 고개를 저었다. 공포가 묻어났다.
왜일까? 가장 강한 정령임에도 다른 정령들처럼 한성에겐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정말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유를 말해주지 않을래?”
―무서워! 그는 정말 무서운 존재야!
‘그렇게 무섭지는 않은데.’
무섭다는 게 이유의 전부다. 더 자세하게는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시리아는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상냥했다. 이러한 따스함을 시리아는 거의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줘서만은 아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의 눈빛은 묘한 따스함을 담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분명히 자애로웠으니.
그녀는 사람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어려서부터 그러한 환경에서 자랐다. 하여 처음에는 혼란했다.
자신의 어머니 외에 그런 눈빛을 자신에게 준 건 그가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는 정말 순수한 의도로 자신을 돕고 있었다.
그 도움에, 무엇이라도 보답을 하고 싶었다.
―뭔가가 왔어. 아주 불길한 존재야. 조심해.
마람이 말했다. 불길한 존재? 한성님을 말하는 걸까?
하지만 아니었다. 마람은 분명히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 먼 장소였다. 육안으로 거의 확인이 힘들 정도로.
그곳에, 흑색 로브를 뒤집어쓴 늙은 놀이 있었다.
늙은 놀은 다른 놀들과 다르게 지팡이를 쥔 상태였다.
그 상태로 주문을 외우며 지팡이를 한 차례 휘두르자 검은색 불꽃이 떠오르며, 한성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위험해요!!”
시리아는 본능적으로 달렸다.
하지만 검은 불꽃이 도달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한성은 놀들을 상대하느라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콰아앙!
* * * * *
“아!”
시리아의 탄식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귀가 멍멍했다. 나는 바닥을 굴렀다.
“쿨럭!”
피를 토해냈다.
빌어먹을! 지능이 낮다보니 마력에 대한 감지가 늦었다. 깨달았을 땐 이미 검은 불꽃이 나를 덮친 뒤였다.
[‘거미줄의 저주’에 걸렸습니다.]
[강력한 저주입니다. 모든 치유의 효과가 지연됩니다.]
“놀 샤먼······!”
“괘, 괜찮으세요? 움직이지 마세요. 지금 당장 치료를!”
시리아의 손을 타고 새하얀 빛이 쏟아졌다. 빛의 정령과 함께하자 치료의 힘이 두 배로 증가했다.
“대체 왜, 왜 치료가······.”
“소용없다.”
마력낭비다.
내 전신에 거미줄처럼 퍼진 검은색 그을음들. 상처의 치유를 방해하고 성스러운 힘이 통하지 않도록 하는 저주였다.
시리아는 아직 저주를 해소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내가 고개를 젓자 시리아의 눈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이어 나는 검은 불꽃이 날아온 장소를 바라봤다.
놀 샤먼! 설마 이런 장소에 득도한 녀석이 있을 줄이야.
놈은 수많은 놀들과, 놀 치프마저 대동하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영역의 중심에 들어섰으니 사자의 입 안에 스스로 머리를 들이민 꼴이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놈이 원흉이었군.’
놀들의 습격, 놀 치프의 이상한 움직임.
어쩐지 일반적인 놀치곤 너무 똑똑하다고 했다.
‘하필이면 놀 샤먼이라니.’
놀 샤먼은 깨달음을 얻은 존재다. 극악의 확률로 나타나는 유니크한 괴물.
일반적으로 이런 장소에 있을 녀석은 결코 아니었다.
놈이 있을 줄 알았다면 놀 치프의 영역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변이었다. 모든 걸 파악하고 움직이자 했지만 이러한 변수마저 읽어내진 못했다.
당연히 지금의 나로선 대적하기 힘든 적이었다.
하물며 주변에 있는 놀들도 뿌리치기 쉽지 않았다.
내장이 저릿했다.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면 피해야 한다. 그런데 도망칠 수 있을지.
냉정하게 생각했다.
‘둘 중 하나만 살아갈 수 있다.’
시리아와 나, 둘 다 도망치는 건 힘들다.
누군가는 희생해야 한 명은 살 수 있었다.
나는 부상을 당했고, 시리아는 걸음이 느렸다.
먼 미래를 위해선 당연히 내가 살아야 한다. 그렇다고 시리아를 희생시키는 게 옳은 선택일까?
이성과 감성이 치열하게 부딪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역전할 수 있지?
‘지배자.’
나는 놀 치프를 지배하고자 했다. 놀 샤먼은 지금 가진 포인트로는 구매가 되지 않았다. 녀석은 6Lv의 괴물이다. 10,000의 포인트가 있어야 지배가 가능했다.
[‘놀 치프’의 지배가 불가합니다. ‘놀 샤먼’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습니다.]
제기랄!
누군가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상황에선 지배가 안 되는 건가?
두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나는 이를 갈았다.
그 순간이었다.
나는 홀린 듯이 심장 쪽에 위치한 은빛의 뱀을 쥐었다.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어쩌면.’
요르문간드. 이 녀석이라면, 다른 건 몰라도 내게 걸린 ‘저주’도 먹어치울 수 있을 터였다. 빛의 정령도 두려워하는 나의 정기를 빼먹는 녀석이었으니!
불가능하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리고 요르문간드의 존재에 대해 인지한 순간 내 이해의 저변이 넓어졌다.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 나는 입을 열었다.
“먹어치워라.”
스으으윽!
동시에, 뱀이 입을 벌리고 움직였다. 내 전신을 돌며 그을음을 먹어치웠다.
이윽고 모든 그을음이 사라지자 또 다른 현상이 나타났다.
[‘요르문간드’와 계약한 사용자는 ‘모든 밤의 저주’로부터 면역을 가집니다.]
[‘요르문간드’가 ‘거미줄의 저주’를 먹어치웠습니다.]
[‘요르문간드’의 레벨이 1->2로 상승합니다.]
[‘요르문간드’가 현상변화를 시작합니다.]
현상변화!
은색의 뱀이 내 신체에서 떨어지더니, 몸을 부풀리며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