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17화 (18/251)

05. 요르문간드(1)

꿈. 의식이 옅을 때 겪는 정신 현상 중 하나.

실존하는 것을 볼 수도 있고, 내가 바라는 미지의 세계를 엿볼 수도 있는, 가상의 세계.

꿈이야말로 가장 인간의 ‘욕망’을 잘 나타내주는 도구였다.

그리고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었다.

“하악!”

거친 숨소리. 전신에 땀이 흐르며 격렬한 폭발을 맞이한다.

발작하듯 온몸을 후들대고 격정적인 환희를 느낀다. 하지만 작은 불씨는 이내 다시 되살아나 더욱 역동감있게 타올랐다.

마치 뱀 같은 여인이었다.

한 번 물면 결코 놔주지 않는.

몇날 며칠, 쉬지 않고 교합을 해댔다. 여인의 혓바닥이 내 몸에 닿을 때면 나는 어김없이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으며, 그럴수록 여인의 교성은 더욱 커다래졌다.

모든 정기가 빨리고 나서야 나는 지친 몸을 눕힐 수 있었다.

꿈. 꿈이다.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여인과 이토록 불 같이 타오를 수 있는 건 이 자체가 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분명히······ 그래야만 했다.

‘몽정이라도 한 건가?’

묘한 꿈을 꾼 뒤 눈을 뜨기 직전, 묘한 느낌을 받았다.

아랫도리가 축축했다.

하기야 혈기왕성할 신체였다. 아무리 내가 성욕을 절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몸은 정직한 법이었으므로.

나는 빠르게 이불을 걷었다.

‘피잖아.’

침대 전체에 피가 낭자했다.

몽정을 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피는 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건 나뿐이었다.

급히 세탁기를 돌리고, 샤워를 끝낸 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나는 어떻게 집에 돌아온 거지?’

일단 그것부터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오딘의 보물창고’에서 들어가고 나올 때의 기억부터가 흐릿했다.

집에 돌아온 기억은 더욱 없었다.

게다가 몸이 가벼운 듯 무거웠다.

일단 자잘한 상처는 모두 나았고, 머리가 맑아졌다.

하지만 정기란 정기는 모조리 빨려버린 그런 느낌이었다. 알 두 쪽이 허한 그런······.

핸드폰을 확인했다.

수없이 쌓인 메시지들. 부재중 전화목록. 하지만 내 눈길을 끄는 건 상단에 있는 숫자였다.

3월 30일.

‘10일가량 잠만 잤군.’

나는 그래도 시간관념은 철저한 편이었다.

오딘의 보물창고에 들어가서 3일을 지냈을 때가 대략 20일 전후.

거의 10일 가까이 잠만 잤던 셈이다.

평범한 일은 결코 아니다.

거기까지 기억이 미치자 한 이름이 떠올랐다.

‘요르문간드!’

손뼉을 쳤다.

맞다. 요르문간드와 계약이 완료되었다고 했었다.

그 직후 내 오른손을 감싼 뱀은 나를 물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이 이상수면이 그 계약과 관련이 있는 듯싶었다.

‘뱀은 그대로 있는데.’

내 오른손의 뱀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미동조차 안하는 이 녀석 말이다. 생명체는 아니고 장식품같은 느낌이었다.

자세히 바라보자, 관련 된 정보가 재차 떠올랐다.

<요르문간드(value-???)>

● 지능+5

● 마력 +5

● 에고(Ego)에 의한 형상변화

● 모든 뱀의 왕

● 끝없이 성장하는 뱀(1Lv, 성장도-24)●● 계약자는 모든 ‘밤의 저주’로부터 해방된다.

『신화로 전해지는 요르문간드의 거대한 뱀. 세계를 뒤덮을 정도로 거대했던 존재지만 모종의 이유로 인해 약화되어 ‘오딘의 보물창고’에 갇히게 되었다. 』

마력과 지능을 무려 5씩이나 올려주는 희대의 사기 장비.

과거에도 이만한 급의 장비를 나는 착용한 적이 없었다.

과거 둘렀던 흉멸의 망토도 힘과 민첩을 4씩 올려주는데 그쳤으니까.

하물며 모든 능력치 중 가장 중요하다는 마력을 포함해 총합 10을 올려주다니.

‘믿기지 않는군.’

적어도 3레벨의 창고에 있어야 할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치다. 한 차례 나는 전율했다.

내가 정신을 잃기 전 기억과 같았다.

아니, 같으면서도 조금 달랐다.

‘성장도가 올랐다.’

뱀의 성장도가 24가 되었다. 원래는 0이었을 것이다.

뭐지? 내가 뭔가를 먹인 건가?

문득 꿈이 떠올랐지만 크게 고개를 저었다.

설마······.

‘상태창.’

급히 십자 인을 그렸다.

[사용자 정보가 갱신됩니다.]

이름: 오한성

직업: 천지인(天地人)

칭호:

● 무자비한 놀 학살자(3Lv, 체력+4) 능력치:

힘 29 민첩 24 체력 26(22+4)

지능 25(20+5) 마력 44(39+5)

잠재력(134+14/456)

특이사항: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잠재력이 크게 상승했습니다. 요르문간드와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스킬: 심안(9Lv), 지배자(9Lv), 전이(???)

[전후비교]

힘 29 민첩 25 체력 28 지능 15 마력 16 잠재력(109+4/456)힘 29 민첩 24 체력 26 지능 25 마력 44 잠재력(134+14/456)아이러니하게도 내 능력치 중 가장 높은 게 마력이었다.

에인션트 원의 시련을 깨며 오른 20가량의 수치 덕분이었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올리기 힘든 능력치가 마력임을 감안했을 때 시작은 무엇보다 좋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계약이 되었다고 나온다.

‘요르문간드와의 계약까지 꿈이었던 건 아닌 모양이군.’

하지만 요르문간드는 신화적 존재다. 이러한 존재와 계약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성녀 시리아가 페가수스와 계약을 한 전례는 있었다. 하지만 요르문간드와 같이 무시무시한 녀석은 아니었다.

‘뇌신 토르가 요르문간드의 머리를 으깨고 죽였지만 그때 튀어나온 독성 때문에 토르조차 일곱 발자국을 걷고 죽었다고 했지.’

설마 그런 신화 속의 장본인과 계약한 걸까?

하지만 계약을 했다면 왜 내 팔목만 감은 채로 가만히 있는 걸까.

무엇보다 신화상으로 요르문간드는 분명히 죽은 놈이었다.

뇌신이자 투신인 토르가 머리를 으깨서 죽였다. 정작 토르도 죽긴 했지만.

‘신화 속 존재들의 이름을 딴 장비 같은 게 없는 건 아니었으니······.’

진짜 요르문간드라면 3Lv의 창고에 있는 것도 이상하긴 했다. 못해도 9Lv, 혹은 그 이상에 있어야 될 흉악한 존재가 요르문간드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름만 딴 다른 무언가 이겠지.

그런 장비들이 없진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한결같이 굉장한 능력을 발휘하곤 했다.

나는 컴퓨터 앞 의자에 앉아 전원버튼을 눌렀다.

‘북한산. 북한산부터 거슬러 올라가보자.’

애매모호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방편이었다.

뉴스에 최근 한 달을 기준을 두고 ‘북한산’을 검색하자 백여 개에 달하는 기사들이 떠올랐다.

많다. 게다가 기사들 제목 모두가 자극적이었다.

「북한산에 나타난 괴생명체의 정체는?」

「합성논란! 북한산에 괴물 나타나다.」

「북한산 등반 조심하세요!」

「개의 머리를 한 괴물에게 습격당한 등산객.」

「북한산 괴물, 알고 보니 불독의 돌연변이.」

“미친.”

흐릿하게 찍힌 사진 몇 장을 확인하자 욕설부터 튀어나왔다.

놀들이다. 내가 지배한 녀석들이 북한산을 배회하는 모양이었다.

탁!

이마를 짚었다. 인사불성한 상태로 집에 돌아오며 놀들도 함께 ‘문’을 건넌 것 같다. 평상시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실수다.

덕분에 지금 북한산엔 사람들이 몰리고 있었다.

잠잠해질 때까진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다는 뜻.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시내에는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이슈화가 된 건 이제 고작 이틀 째.’

아무래도 처리를 해야겠다.

많이 늦진 않았다.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띵- 동!

그때였다. 막 정리를 끝내고 일어나려는 순간, 현관 벨이 울렸다.

나는 인터폰으로 다가가 상대방을 확인했다.

그리곤 미간을 부여잡았다.

‘하필이면 이럴 때.’

민식이다.

게다가 민식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컴퓨터 전원을 끄고, 문을 열자 네 명의 사람들이 나를 반겼다.

“한성아······.”

민식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심 경계심을 가졌다. 녀석도 한라산에서 하산했다면 북한산과 관련된 소식을 들었을 터였다. 가장 먼저 나를 의심하는 게 타당했다.

“너 머리가 왜 그래?”

“······ 요즘 유행하는 패션이야.”

“도, 독특하네.”

반쯤 타버려서 파마를 한 것만 같은 머리.

에인션트 원의 제단에 들어가며 생긴 부상이었다.

몸의 다른 상처는 다 치유가 됐는데, 머리만은 그대로였다.

“학교도 안 가고 있다더라. 요즘 잘 지내는 거 맞지?”

“잘 지내려고 노력중이지. 그런데 옆에 분들은?”

여자 둘, 남자 하나.

균형 잡힌 조합이었다.

여자 두 명은 굉장히 예뻤다. 남자 한 명은 겉옷으로도 감추지 못할 만큼 근육질의 마초맨이었고.

‘전부 각성자로군.’

한 명 빼곤 다 초면이다.

연예인 뺨을 후려갈길 만큼 태가 사는 여인.

우유처럼 새하얀 피부와 골든 블론드 색깔의 단발 머리칼이 유독 잘 어울리는, 고아한 미인상!

‘성녀 시리아.’

그녀는 분명히 성녀 시리아였다. 지금은 아니겠지만, 민식이 이 녀석은 함께 갈 구성원으로 가장 먼저 성녀 시리아를 택한 것이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다.

성녀 시리아는 굉장히 높은 잠재력과, 특히 ‘회복’관련 스킬에 있어선 타에 추종을 불허하는 여인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녀는 본래 외국인이고 러시아 출신이다.

왜 그녀가 지금 한국에 있는 걸까.

물론 성녀는 마검사와 궁합도 잘 맞다. 나름 생각하여 영입한 듯싶긴 했지만 작은 의문이 남았다.

또한 남은 둘은 초면이었다.

‘싸우면 아슬아슬하게 이긴다.’

수많은 실전경험을 밑바탕삼아 결론을 내렸다.

저들이 각성자이긴 하나, 내 눈에선 모두 초보자와 다름이 없었다.

각성한지 길어야 3개월. 나와 능력치는 비슷하거나 조금 떨어지는 수준.

그나마 민식이가 마음에 걸리지만 마검사는 다른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안다. 녀석이 사용할 스킬과 그 스킬을 파훼하는 방법 모두 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이쪽은 시리아. 그리고 이쪽은 린린과 샤오팅 남매야.”

민식이가 말했다.

그나저나 참 글로벌하게 노네.

뒤의 둘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특히 시리아 쪽에 힘을 주는 거 보면, 내 반응을 떠보려는 건가?

나는 무덤덤하게 답했다.

“다 외국인이네?”

“맞아. 시리아는 러시아, 린린과 샤오팅은 중국에서 며칠 전에 왔어.”

나는 그들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설렁설렁한 태도였다.

아니, 아예 표정 하나 바뀌질 않았다.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건가?

“뭐, 일단 들어와. 변변치 않지만 왔으니 차라도 대접해줘야지.”

그대로 세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들을 집 안으로 들였다.

그러자 동시에 린린이라 불리던 여인이 코를 부여잡았다.

“피 냄새.”

한국말도 쓸 줄 아는군.

나름 창문도 다 열어서 환기도 했는데 아직 냄새가 덜 빠진 모양이었다.

나는 녹차를 타고 그들 앞에 찻잔을 내려놓은 뒤 말했다.

“와, 개 코네. 실은 얼마 전에 여자 친구를 사귀어서······.”

“정말? 잘됐다! 내가 아는 사람이야?”

“네가 모르는 사람.”

‘나도 모르는 사람.’

심지어 사람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자 민식이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래도 기뻐하는 거 보니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아직 일말의 의심은 남았지만 어쨌거나 녀석이 ‘영웅’을 지향하는 건 확실한 것 같았다.

“나중에 꼭 소개시켜줘.”

“알았어.”

이 주제는 별로 좋지 않았다.

시리아와 린린의 눈이 나를 짐승마냥 바라보는 듯했다.

나는 내심 혀를 차고, 바로 주제를 바꿨다.

“그런데 웬일이야? 갑자기 우르르 몰려오고. 나는 네가 이렇게 국제적인 녀석인지 몰랐는데.”

“사귄지 얼마 안 된 친구들이야. 내가 연락해서 한국에서 보자고 했거든.”

나는 당황한 것처럼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사귄지 얼마 안 됐는데 비행기 티켓을 끊어서 한국까지 왔다고?”

“그런 사정이 있어. 안 그래도 그거랑 관련해서 너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기도 하고.”

녹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찻잔을 내려놨다.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의사다.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민식이가 내 양 손을 붙잡았다.

“한성아. 우리와 함께하자.”

“뭘?”

내가 의문을 갖고 되묻자 녀석이 눈에 힘을 꽉주며 말했다.

“함께 세상을, 세상을 구하자.”

······ 이건 또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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