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전이(4)
“로드시여. 왜 그러시나요?”
도리어 라이라는 이해를 못하겠단 모습이다.
손꼽아 기다린 오늘. 당연히 내가 허락할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전쟁’이란 험악한 단어가 들어간 이상 나는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심연 속의 데몬로드는 ‘우리엘 디아블로’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이놈을 죽이면서 알게 되었고, 어쩌면 ‘라이라 디아블로’가 꺼낸 전쟁이란 단어 역시 그와 연관되어 있을지 모른다.
‘내가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기 전에 알아내야 한다.’
그래서······ 알아내야 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대략 48시간.
그 뒤 나는 전이를 끝내고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아마도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테지.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귀환하고자 하는 본능 말이다.
그러니까, 이 48시간은 잘 활용하여 우리엘 디아블로를 포함한 데몬로드들의, 그 강력한 존재들의 비밀을 캘 셈이었다.
언제 다시 이 몸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기약이 없으니.
무엇보다 그녀가 말했던 ‘거신’이란 단어도 신경이 쓰인다.
‘이건 기회다.’
처음엔 놀랐다. 하지만 나는 본래의 냉정함을 되찾았다.
누구보다 냉철하게 상황을 살폈다.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주어질지 모른다.
적을 알고, 나를 더욱 잘 알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
“먼저 내가 알아야할 사항을 말해보라.”
하지만 나는 조심스러웠다.
라이라 디아블로. 그녀는 우리엘 디아블로의 열렬한 추종자였기에.
행동 하나, 말 한 번에 의심을 살 수도 있었으므로!
‘이놈의 언행은 대강 기억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놈을 내가 죽였다는 것이다.
강압적이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게 우리엘 디아블로라는 걸 잘 알았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언행을 보이면 된다.
슬쩍 라이라를 바라봤다.
다행히 라이라는 의심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실책을 깨닫곤 탄성을 자아냈다.
“과연! 과연 신중하신 분! 전쟁을 벌이려거든 ‘아는 것’이 먼저지요. 그 간단한 것조차 소녀는 그만 잊고 있었답니다. 죄송해요.”
다행이었다. 라이라는 알아서 해석하는 재주가 탁월했다.
흔히 말하는 콩깍지.
가장 찬란하며, 가장 위험한 착각.
내가 기다리자 라이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어서 설명했다.
“로드께서 잠들어 계신지 어언 100년, 그동안 저희는 멸제의 카르페디엠과······.”
“처음부터.”
“처음부터, 말씀이십니까?”
최대한 말을 아꼈다. 그러나 본질을 흩트리진 않았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이놈의 계보다. 우리엘 디아블로와 다른 데몬로드들이 걸어온 그 역사를 확인하고 싶었다.
‘너희들은 대체 뭐지?’
어쩌면, 인류 최초로 진실에 도달하게 될지 모른다.
심연의 정체. 괴물들과 데몬로드의 출현 이유.
그리하여 이들이 지구를 노리게 된 그 경위를 파악하고 파헤쳐서 대안을 준비하는 게 나의 작전이었다.
말 그대로 이것은 ‘나만의 전쟁’인 셈이다. 나 홀로 준비하고 나 홀로 진행하는. 아무도 알아선 안 되고, 나 스스로를 속이며 ‘완벽함’을 추구하는 전쟁!
과거엔 영웅을 연기했다.
하지만 이번엔 악당이다.
라이라는 잠시 고민했다.
“제가 태어난 날 로드께선 제게 영원한 푸른꽃 한송이를 선물하셨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선 그날 하늘에서 유니콘들이 노니며 축복을 내렸다고 하셨어요.”
가슴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푸른색의 묘한 기운을 풍기는 푸른색의 작은 꽃 한 송이.
자랑인듯. 보물처럼 소중하다는 듯 푸근한 눈동자로 바라봤다.
물론 감동스럽긴 하지만 내가 원한 처음은 라이라의 탄생이 아니었다.
“전쟁의 시작부터 말이다.”
“전쟁의 처음은······.”
라이라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세상에! 그 전율의 여왕이 부끄럼을 타다니!
나는 경악에 입이 벌어지는 걸 겨우겨우 막아섰다.
이어 라이라가 말했다.
“이곳 심연은 무질서했습니다. 모든 존재들이 서로의 생존을 걸고 투쟁했어요. 그럴 때 ‘위대한 별’이 떠올랐습니다. 위대한 별은 말했습니다. 가장 강한 하나에게 자신의 ‘격’을 넘겨주겠다고.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바뀌었다?
그 ‘위대한 별’이라는 게 그토록 탐나는 걸까?
심연의 강자들마저 달려들 정도로 말이다.
이윽고 라이라가 손을 한차례 휘저었다.
그러자 공간이 흔들리며 주변의 배경이 바뀌었다.
넓고 메마른 땅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놓인 시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단순히 몇 만, 몇 십만의 수준이 아니다.
억······ 어쩌면 그 이상.
그럼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엘 디아블로는 그 중심에 있었다.
가장 강력한 존재들과 함께.
“우리는 싸웠으며, 로드께선 ‘최후의 72명’의 명단에 들어갔습니다. ‘위대한 별’은 그들에게 성을 주었습니다. 진정한 신이 될 자격을 부여한 것입니다. 로드께선 ‘디아블로’의 이름을 잇게 되었지요. 물론 저 역시도.”
그녀는 디아블로의 이름을 소유하게 된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72명. 우리엘, 이놈과 같은 데몬로드가 71명 더 있다는 뜻이었다.
하나를 잡는데도 그 많은 전력을 투입했건만, 71명이 더 있다니!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조용히 격분하고 있었다.
‘우리엘 디아블로······!’
이래서 시작이라고 한 것이냐?
끝나지 않았다고, 계속해서 좌절하라고?
라이라는 계속해서 그 작고 도톰한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오로지 저희만이 진정한 마신의 ‘적통’입니다. 카르페디엠과 같은 송사리의 이름을 잇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요! 브뤼시엘, 아르하임, 제로, 팔콘······ 그나마 가짜들 중에서 정통의 이름을 빌린 존재는 이들이 전부.”
그 이름들을 나는 안다.
디아블로, 브뤼시엘, 아르하임, 제로, 팔콘.
괴물들, 혹은 이종족들이 추앙하던 ‘신’의 이름이었다.
“모든 차원의 신들이 이곳 ‘심연’을 주시하고 있어요. 우리의 전쟁이 끝나거든 탄생할 단 하나의 차원신! 신 중의 신인 그 존재의 출현을 목도하고자. 감히 소녀는 그 영광의 장소에 로드께서 올라가실 것임을 한 치도 믿어 의심치 않는답니다.”
그 영광의 장소에 같이 올라가고 싶다는 희망과 믿음이 엿보였다.
그나저나······ 디아블로가 이름을 빌려준 건 한 마디로 투자인가?
신과 괴물들의 관계에 대해서 정리가 잘 되질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의 전쟁이 지구에까지 번졌다.’
나는 직접 겪었다.
그 잔재가 얼마나 강렬한지.
아직은 아니다. 어쩌면 심연에서의 전쟁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에야 그들은 지구로의 진출을 계획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우리엘 디아블로. 놈은 철저하게 혼자였다. 다른 데몬로드들과 연합을 이루지 않았다.
문득 놈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너는 절망하리라. 앞으로 시작될 거대한 혼돈의 틈바구니에서 좌절하고 또 좌절하리라. 나는 낙오된 한 명의 왕일뿐이니······.
낙오된 한 명의 왕.
이놈마저 다른 데몬로드들의 공격에 위협을 느꼈다는 뜻일까?
그로부터 도망쳤다는 뜻일는지.
“다만, 로드께선 100년 전 전쟁에서 겪은 상처를 치유하고자 긴 수면을 취하셨습니다. 그동안 저는 로드를 대신하여 영토를 다스렸습니다만······ 최근 ‘멸제의 카르페디엠’이 호시탐탐 이 땅을 노리는 바람에 많은 병력을 잃었어요.”
라이라는 침울한 얼굴이었다.
억울하고, 자존심에 금이 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다시 밝은 표정을 보였다. 역시나 ‘나’에게만.
“이제는 로드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감히 멸제의 카르페디엠 따위는 로드를 상대할 수 없어요. 이 사실을 공표하고 공격해야합니다. 그리하여 다른 가짜 왕들이 긴장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동안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지난 100년. 우리엘 디아블로의 대행을 맡았다면 ‘격’이 맞지 않긴 했다.
그런데 전쟁. 전쟁이라.
결국 우리엘 디아블로는 졌다. 내 추측은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지구로 도망, 내지 탈출했으리라고.
다시금 같은 길을 걸으면 패배를 반복할 따름이었다.
내 입장에선, 이놈이 최대한 지구로 늦게 건너올수록 좋았다. 심연 속에서 다른 데몬로드들과 함께 죽는다면 더욱 좋았고.
나는 한 번 좌절했다. 그러나 다시 좌절하진 않을 것이다.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하리라.
잠시 후 배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겠다.”
* * * * *
솔직히 기대감이 없었다면 거짓일 것이다.
우리엘 디아블로. 데몬로드의 격을 지닌 녀석의 ‘영역’이 얼마나 화려하고 웅장할지.
이곳을 둘러보며 희미한 단서 하나라도 잡을 줄 알았지만, 주변을 쭉 살핀 결과 나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금은보화는 눈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중세시대의 양식에 걸맞은 검이나 그림 하나 없다.
그야말로 텅! 비었다.
아주 텅텅! 비었다.
그나마 칭찬할만한 건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다는 정도일까.
성이 컸고, 첨탑은 높았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내심 혀를 찼다.
‘이거 완전 거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