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6화 (7/251)

02. 전이(3)

뭐라는 거야?

아무리 나라도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견할 순 없었다. 상상조차 못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는데 당황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뭐?

꿰뚫어 보는 자. 나의 로드?

마음 같아선 그쪽의 머리를 꿰뚫어보고 싶은데······.

전율의 여왕.

정확히 말하자면 ‘전율과 학살의 여왕’이라 이름 붙은 그녀.

냉혹하고, 냉정하던 그녀가 저런 충성심이라니.

나는 눈동자가 흔들리려는 걸 막으며 애써 담담한 몸짓을 취했다.

촛불 몇 개로 밝혀진 어두컴컴한 방. 거대하기 짝이 없으나 쓸쓸함마저 느껴지는 이곳에서 나는 상황을 정리하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왜 대답이 없으신지요? 아아, 설마?”

내가 한동안 대답이 없자 고개를 갸웃하던 전율의 여왕이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곤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너희의 주인께서 깨어나셨다! 뭐하느냐? 당장 소집하지 않고!”

표독스러운 표정. 나를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다.

이윽고 멀리 있는 거대한 문이 열리며, 500기의 기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을 본 나는 작게 탄식했다.

오······ 주여.

전율의 여왕뿐만이 아니었다.

데몬로드를 따르던 500기의 창기병들. 놈들이 분명했다.

용의 뼈로 만들어진 죽음의 말을 타고, 온 나라를 휘젓던 극악무도한 놈들!

잠시 꿈을 꾸는 건가 했다.

“저······ 로드시여.”

전율의 여왕이 은근슬쩍 나를 바라봤다.

확실히 인간이나 창기병을 볼 때와, 나를 볼 때의 그녀는 온도차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전율의 여왕은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침묵하는 게 그녀의 마음을 건드린 모양.

“죄송합니다. 오랫동안 전쟁을 치러온 탓에······ 이 ‘심연’에 남은 병력은 이들이 전부랍니다. 혹시 실망하셨나요?”

“거울을.”

“예?”

나는 두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입을 열고도 내심은 놀라고 있었다.

목소리도 달랐다. 거기다 의문은 점점 확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확인이 필요했다.

잠시 내 말을 되새기던 전율의 여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거울! 알겠습니다.”

차악!

그녀가 중지와 엄지를 부딪치자 거대한 공간이 허공에 생겨났다.

아공간(Demi-plane)!

본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 독립된 세계를 뜻하는 단어이며 마법이다.

인류 중에서도 그 공간을 다룰 수 있는 자는 손에 꼽았다.

전율의 여왕은 그것을 손가락을 부딪치는 것만으로 소환한 것이다.

안은 어쩐지 거의 비어있었지만 아공간의 크기만큼은 나 역시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쿵!

이윽고 거대한 공간이 아공간에서 떨어졌다.

거울은 내 전신을 비출 정도로 커다랬는데, 그것을 본 나는 멈췄던 숨을 크게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들리지 않는 비명을 내질렀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내가 아는 그 모습이 아니었다.

아니, 알고 있긴 했다.

이 모습. 이 거대한 악마를.

‘데몬로드······!’

여덟 장의 날개, 이마에 솟은 우뚝한 염소의 뿔, 검은색 피부와 강인한 근육들. 어깨와 중요 부위들만 가린 은색 갑주가 묘하게 어우러져 강렬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손을 들어 턱을 만졌다.

놀랍게도 거울 속의 데몬로드가 똑같이 움직였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데몬로드가 됐다.

왜? 어떻게?

갖은 의문들이 샘솟았다.

북한산에 올라 변이된 청설모를 발견했다.

이후 머릿속에서 주문이 되새겨졌고, 다시 눈을 뜨니 이 몸에 안착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당시 떠오른 글귀들이 있었다.

본래는 각성해야만 보이는 허공의 글자들 말이다.

‘일시적 영혼전이가 시작됐다고 했지.’

몸은 분명히 데몬로드였다. 그러나 이질감이 있었다. 영혼만 이동이 되었다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가지만, 여전히 ‘왜?’라는 의문이 남는다.

나는 과거 데몬로드의 심장에 검을 꽂았다. 놈의 피를 뒤집어쓴 채 돌아와 남은 생을 영웅으로 살았다.

그게 원인이 된 걸까?

내가 놈을 죽여서?

놈의 피를 뒤집어썼기 때문에?

여전히 말이 없자, 전율의 여왕이 입을 열었다.

“로드께서 잠들어 계신지 어언 100년. 소녀는 한 번도 로드를 눈에 새기지 않은 날이 없답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우신 분이시여.”

진심이 느껴졌다. 단순한 아부가 아니다.

진짜 ‘사랑’이 그녀의 눈엔 있었다.

맙소사. 전율의 여왕이 사랑이라니. 게다가 분명 이 몸을 두고 ‘아버지’라 표현하지 않았던가?

물론 인간들의 상식에 그녀를 집어넣는 건 말이 안 될 수도 있었다. 악마들끼린 근친상간도 밥 먹듯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오른손으로 십(十)자의 인을 새겨보았다.

이 인은 정보창 등을 떠오르게 만드는 열쇠다. 각성한 자들에게만 주어진 특혜이며,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데몬로드도 그 힘을 사용했었다.

[사용자의 정보가 갱신됩니다.]

이름: 우리엘 디아블로

직업: 데몬로드

종족: 용마족

칭호:

● 데몬로드(10Lv, 모든 능력치+8)● 꿰뚫어보는 자(9Lv, 마력+15)능력치:

힘 108(100+8) 민첩 108(100+8) 체력 108(100+8)지능 108(100+8) 마력 123(100+23)잠재력(500+55/500)특이사항: 영혼이 동화 된 상태입니다(남은시간 2,864분).

스킬: 검은 별(10Lv), 심안(9Lv), 용언(9Lv), 칠흑의 손길(9Lv), 지배자(9Lv)간단하게 떠오른 상태창을 보고 나는 기겁했다.

우리엘 디아블로.

게다가 그 밑에 떠오른 ‘완성 된’ 상태창은 전율을 느끼게 만들기 충분했던 것이다.

모든 각개의 능력치는 100이 완성이었다. 총합 500은 지성생명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의 수치이며, 인류 중에선 이 영역에 닿은 이가 없었다.

마검사이고 최후의 영웅이었던 나조차도 총합 잠재력을 450가량 채웠던 게 전부였던 것이다. 애당초 그 그릇이 내가 클 수 있는 잠재력의 전부이기도 했지만.

‘잠재력은 말 그대로 그 존재가 가질 수 있는 힘의, 그릇의 크기다.’

헌데 우리엘 디아블로, 이놈은 500이었다.

이야기로만 들었던 그 영역을 내 눈으로 확인하게 된 셈이다.

하기야 이 정도로 강력했으니 홀로 수백 명의 영웅을 상대한 것이겠지.

10Lv의 칭호나 스킬도 나로선 어안이 벙벙한 것들이었다.

‘이런, 젠장 할.’

욕만 나왔다. 자기위안도 되지 않았다.

이어 나는 특이사항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은시간 2,864분.’

대략 이틀의 시간이 주어졌다.

일시적인 전이라면, 이 시간이 지나면 변화가 생기리라.

“로드시여. 저희를 이끌어주시옵소서. 오로지 로드만이 진짜 로드이십니다. 가짜들을 처단하고, 온전히 승리하여 ‘거신’의 혼을 취하시옵소서.”

전율의 여왕이 다시금 무릎을 꿇었다.

창기병들도 엄숙한 분위기로 대열을 정리했다.

나는 전율의 여왕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자동으로 내 ‘눈’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심안(9Lv)이 발동됩니다.]

이름: 라이라 디아블로(value-300,000)

직업: 가시의 여왕

종족: 용마족

칭호:

● 가시의 여왕(9Lv, 마력+13)

● 학살자(8Lv, 힘+10)

● 전장의 지배자(7Lv, 모든 능력치+4)

능력치

힘 104(90+14) 민첩 87(83+4) 체력 88(84+4)지능 90(86+4) 마력 105(88+17)잠재력 (431+43/495)특이사항: 피와 살육을 좋아하지만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던질 각오가 되어있는 순정적인 모습 또한 있습니다. 단지,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일 뿐.

스킬: 가시지옥(9Lv), 가시칼날(8Lv), 비정(8Lv), 전장의 표범(7Lv)놀라운 일이었다.

설마 상대방의 상태창까지 엿볼 수 있는 능력이라니.

내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동으로 발현되었다. 처음엔 아니었는데, 내 상태창을 스스로 갱신한 뒤 변화가 생긴 듯싶었다.

‘벨류?’

다른 건 내 것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이름 뒤에 붙은 설명이 눈에 거슬렸다.

벨류(Value). 즉, 가치라는 뜻이다.

나는 손을 뻗어 그 부분을 어루만져보았다.

[지배자(9Lv)가 활성화 되었습니다. 지배자는 지배 대상의 가치를 지불하면 그 대상을 강제로 지배할 수 있게 만드는 힘입니다.]

[구매가 불가합니다. ‘라이라 디아블로’는 이미 사용자에게 귀속되어 있습니다.]

다시 손을 뗐다.

그러자 글귀가 사라졌다.

이런 힘도 있었군. 내가 몰랐던 이놈의 힘인 듯싶었다.

그때였다.

전율의 여왕이 나를 향해 촉구했다.

“모든 가짜 왕들에게 로드께서 깨어나셨음을 공표하겠어요. 저희의 영역을 침범하고 호시탐탐 노리던 ‘멸제의 카르페디엠’도 이 사실을 알게 되거든 꼬리를 내리겠지요!”

그녀는 흥분했다.

데몬로드가 깨어났다는 사실에.

동시에 절박함도 느껴졌다.

전쟁을 반드시 치뤄야하는 어떠한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아름다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전쟁이에요!”

“멈춰라.”

전쟁은 무슨.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나에겐 이미 전쟁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전율의 여왕 라이라를 제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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