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신사냥꾼-4화 (5/251)

02. 전이(1)

살육이었다.

느닷없이 출현한 괴물들, 느닷없이 출현한 데몬로드.

인간들은 적응했고 강해졌으나 그들 모두를 막는 건 역부족이었다.

특히······ 괴물들의 왕, 데몬로드는 그 격을 달리했으니.

인류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500명의 영웅이 달려들어 겨우 죽였다.

최후의 1인.

마검사 오한성, 바로 나에 의해.

거대한 심장에 검게 타오르는 검이 꽂혔다.

끝났다. 놈의 피를 전신에 흠뻑 뒤집어쓴 나는 생각했다.

이 빌어먹게 기나긴 전쟁도 드디어 끝이라고.

“나는 시작일 뿐이다.”

바닥에 추락한 괴물들의 왕이 작게 읊조렸다.

놈을 따르던 500명의 창기병들도, 영웅들을 농락하던 전율의 여왕도, 지금은 곁에 없다.

그럼에도 놈은 의기양양했다.

“너는 절망하리라. 앞으로 시작될 거대한 혼돈의 틈바구니에서 좌절하고 또 좌절하리라. 나는 낙오된 한 명의 왕일뿐이니······.”

동시에, 나는 심연 속을 보았다.

데몬로드가 마지막 힘을 이용해 자신이 본래 머물던 세계의 문을 살짝 연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압도되고 말았다.

전신이 떨리고, 영혼이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수없이 많은 괴물들. 거대한 존재들.

정녕, 끝이 아니었던가?

믿기지 않았다. 데몬로드 하나를 잡고자 수많은 것들이 투입되었건만!

인류에게는 더 이상 뒤가 없었다.

끝이라고 생각하여 아끼지 않고 쏟아 부었으니까.

그만큼 데몬로드의 존재는 세계를 위협하기에 충분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유예의 시간 동안 헛된 희망 속에 살아라. 거짓의 탈을 쓴 인간이여.”

데몬로드. 놈이 웃었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발치에 흐르는 핏물들.

다 죽었다. 죽음은 평등했다.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하지만 돌아가지 않을 순 없었다.

이 승전보를 알려야만 했다.

절망으로 얼룩진 인류에게 조그마한 희망이라도 전달하려거든.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웃었다. 말마따나 거짓된 가면을 썼다.

강력한 괴물들이 출몰하면 어김없이 출동하여 피에 물든 검을 들었다.

“최강이자 최후의 영웅, 오한성! 그가 있는 한 우리 인류는 안전합니다!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오한성! 오한성!”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나면 나는 단상에 올라 손을 흔들었다.

조그마한 오차도 없게.

아주 작은 틈이 생기면 저들은 마음대로 해석하고 절망하려 들 테니까.

나는 저들에게 희망이었다. 등불이고 거센 파도였다.

짧은 유예 속, 영웅은 거짓된 가면을 쓰고 그저 웃었다.

지긋지긋하지만.

어차피 얼마 안 가 세상이 멸망하리란 사실은 나만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진정으로 좌절하는 건 나 하나면 족했다.

그때였다. 내 귀에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오라, 내게 오라, 돌아오라······.

* * * * *

“허억!”

잠에서 깼다. 머리가 어지럽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동시에 인상을 마구 구겼다.

‘개꿈을 꿨군.’

하필이면 과거를 두루 살피는 꿈이라니. 이런 개꿈도 또 없을 것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물을 한잔 벌컥 들이마신 뒤 나는 마지막에 들렸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 목소리는 뭐였지?’

눈살을 찌푸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분명히 익숙한데,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임엔 분명한데, 다시금 떠올리자니 즉시 희미해져가는 것이다.

평범한 현상은 아니다.

‘회귀하며 생긴 부작용인가?’

오라, 내게 오라, 돌아오라······.

어디로 돌아오라는 뜻인지.

애당초 돌아갈 곳이 있긴 한 건가?

혀를 차곤 환청으로 치부했다.

나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베란다의 커튼을 펼쳤다.

높게 뜬 태양. 눈이 부셨다.

벌써 점심 무렵인 모양이었다.

쿵쿵쿵!

순간 누군가가 대문을 두드렸다.

“택배입니다! 오한성씨 댁 맞으십니까?”

나는 크게 기지개를 펼치곤,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문으로 향하기 위한 모든 준비물들.

과거 잃어버린 문명의 이기란······.

특히 그중에서도 인터넷은 정말 편리한 것이었다.

* * * * *

등산용 배낭 하나, 손전등과 초콜릿과 같은 고칼로리의 식품 몇 가지, 편한 운동화, 방한이 잘 되는 옷가지 등을 준비한 뒤 나는 택시에 올랐다.

“아저씨, 북한산이요.”

북한산. 그곳에 ‘문’이 열렸다.

물론 문은 하나가 아니다. 민식이가 마검사 클래스를 구했다면, 녀석이 향한 곳은 북한산이 아니라 한라산일 것이다.

아니라면 고작 며칠 만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문이 열렸다고 하더라도 당장 괴물이 튀어나오진 않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괴물들은 순차적으로 등장했다.

약한 놈부터 천천히.

우리는 어떠한 ‘법칙’이 적용된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아무리 약한 괴물이라도 인간의 살점 따위는 가볍게 찢어발긴다.’

나는 문 안쪽으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래야만 ‘에인션트 원’의 힘을 얻을 수 있으므로.

진짜 심연 안으로 들어가는 건 아니고, 집으로 비유하자면 신발장까지만 들어갈 셈이었다.

그곳에 숨겨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망가진 제단들이 나온다.

그중 하나가 ‘에인션트 원의 제단’이었다.

‘제단을 복원하는 방법은 주어진 시련을 해결하는 것.’

제단마다 내려주는 시련은 다르다. 나는 에인션트 원의 제단이 어디 있는지는 알지만, 그곳의 시련이 무엇인지까진 알지 못한다.

가봐야 안다.

하지만 과거 에인션트 원의 힘을 얻었던 사람도 아무런 능력 없이 시련을 해결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라고 불가능할 리 없었다.

30분가량을 움직이자 곧 커다란 산봉우리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북한산. 평일이고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은 몇 없었다.

“감사합니다. 여기요.”

현금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

선선한 봄바람이 주변에 살랑거렸다.

푸른 내음 가득한 이곳이 설마 지옥의 입구일 것이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신발의 끈을 제대로 묶고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많이 바뀌었군.’

산책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문’의 주변엔 항상 절망이 소리친다. 푸름 따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산이, 대지가, 바다가 오염되고 생물들은 절멸해나갔다.

때문에 이런 환경이 오히려 내겐 낯설었다.

‘아직은. 아직까지는.’

2년. 그 시간이면 많은 걸 이룰 수 있다. 바꿀 수 있다.

민식이가 정말 영웅의 길을 걷겠다면 나로선 감사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영웅은 필요한 법.

사람들을 이끌고 앞장서줄 영웅은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해야 했다.

다만, 내가 다시 그 역할을 맡긴 싫을 뿐.

‘문은 계속해서 장소를 옮긴다.’

북한산 안쪽에서 ‘문’은 시시각각 위치를 바꾼다.

이제 막 열렸으니, 작은 동물 따위에게 기생하고 있을 터였다.

그 동물을 사냥하면 잠깐 진짜 문이 나타난다. 문이 다른 동물에게로 전이되기 전에 들어가면 된다.

‘문을 쉽게 찾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지.’

그러나 그것도 앞으로 2년까지다.

괴물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2년 뒤엔 ‘문’이 고정된다.

마치 게이트처럼 거대한 암흑을 드러내며 심연 속에서 꾸역꾸역 괴물을 뱉어내는 것이다.

그때엔, 들어가고 싶어도 쉽게 문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다.

나는 정해진 길을 이탈해 산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이어 가방에서 새총을 꺼냈다.

‘작은 동물을 사냥하는데 새총만큼 적절한 무기도 없다.’

적은 힘으로 살상을 하는데 가장 뛰어난 무기 중 하나가 새총이다.

가격도 싸고 구하기도 쉽다. 돌멩이가 아니라 새총전용 쇠구슬까지 구할 수 있다면 나름 궁수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내가 구한 새총은 직경 9.52mm짜리 강구도 고정이 가능한 종류였다.

요령만 있으면 큰 힘 들이지 않고도 이 새총 하나로 살을 뚫고 뼈도 부술 수 있다.

쉬이이!

푹!

연습 삼아 새총에 쇳덩이를 걸고 당겨봤다.

목표했던 나뭇가지가 뚝! 하고 떨어졌다.

“실력이 녹슬진 않았군.”

마검사가 됐지만 무기를 구하지 못해 내가 가장 먼저 사용한 게 새총이었다. 근접전을 펼치자니 겁도 조금 났고, 활은 양궁선수가 아닌 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고블린 정도는 새총으로도 사냥할 수 있었다.

사정거리가 짧다는 게 흠이긴 하지만 그건 순발력의 문제이고.

나는 자화자찬과 함께 몇 번 더 연습을 한 뒤 다시금 자리를 옮겼다.

‘어디보자.’

‘문’은 작은 동물에게 빙의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문은 마치 성장하듯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을 제외한 더욱 큰 동물에게 옮겨가며, 보통 2년에서 3년 정도가 지나면 전이를 멈추고 온전히 완성되어 특정장소에 뿌리를 박는다.

그 문으로 통하는 길은 모두가 다르다.

괴물이 있는 장소, 보물이 있는 장소, 용암으로 떨어지는 장소 등등.

그리고 북한산에 있는 ‘문’은 여러 무너진 제단들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 ‘문’을 찾기 위해선, 문과 빙의된 작은 동물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조류는 아니다. 간혹 조류와 연관 된 문도 존재했지만 북한산 일대에서 발견 된 문은 분명히 고정되어 있었다.

‘문과 빙의된 동물은 변이를 일으키지.’

찾는 게 어렵진 않다. 발견하기만 하면 즉시 특정이 가능하다.

동물을 추적하는 법 정도야 진즉에 익혔으니.

‘찾기 전에 하산은 없다.’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나는 과거 독종으로도 유명했다. 한 번 물면 결코 놓지를 않았다.

그런 끈기가 있었기에 데몬로드를 죽였고, 알레테이아를 거의 궤멸직전까지 몰아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문을 찾기 전엔, 결코 하산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는 주변 수풀이 우거진 곳들을 중심으로 작은 동물의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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