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친구 따라 회귀했다(2)
‘어찌할까.’
잠시 고민했다.
양만우의 검은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하기엔 내가 너무 성숙하고 말았다.
어렸을 당시에는 그의 강압적인 말투와 행동이 무서워 어쩔 수 없이 따랐지만 지금 그러기엔 양만우가 무척이나 작고 허술해 보였다.
나보다 못한 이에게 끌려 다니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회귀 전의 나였다면, 이런 무례한 자를 결코 가만히 두지 않았을 터다.
문제는 여전히 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바뀔 미래였다.
내가 다른 선택을 할 경우 생길 변화들.
‘일단은.’
양은하를 바라봤다. 살짝 넋을 놓은 것처럼.
그런 시선을 이해한다는 듯 양은하가 도도하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고무장갑을 끼고 그릇을 닦았다. 물론 그냥 물만 묻히는 수준이고 가사를 거의 안 해본 듯 솜씨는 형편없었다.
그런 내 얼굴을 보고서 양만우가 득의에 찬 미소를 지어보였다.
“한성아. 언제까지 이 넓은 집에 혼자 있을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느냐? 뒤는 내게 맡기고, 일단 우리 집에 들어가자.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네 아비 볼 낯이 없다.”
“······.”
“세상은 험하다. 너는 울타리가 필요해. 아저씨가 이제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마. 네가 바란다면 나를 아빠라고 불러도 좋다.”
양만우는 내 가정사를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고아인 아버지,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어머니.
덕분에 외가와도 연락을 끊고 살아서 장례 때에도 나를 데려가려는 친척은 없었다.
세상에 홀로 남았으니 자신의 손을 잡으리라고 그는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사실 그의 말은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지 저울질을 해보고 있을 뿐이다.
승낙하면 나는 자유를 잃는다.
반대하면 그 변화를 민식이가 읽을 것이다.
그런 내 표정을 ‘긍정’으로 착각한 양만우가 이어서 말했다.
“원한다면 은하랑 같은 학교로 전학도 보내주마. 잘 챙겨줄 거다. 은하가 한성이 너보다 한 학년 아래이긴 하지만 그래도 친구가 많으니 어울리는데 지장은 없을 게야.”
확실히 양은하가 잘 챙겨주긴 했다. 머슴처럼 부려져서 문제였지.
덕분에 제대로 공부할 시간도 없었고, 결국 대학도 못 갔다. 물론 그다지 공부를 잘하는 편도 아니긴 했지만.
이미 5일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다.
양만우와 양은하가 찾아올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결론을 내긴 했지만 마지막까지 신중에 신중을 가하는 중이었다.
‘나는 자유를 택하겠다.’
어쨌거나 계기는 있었다.
민식이가 회귀한 직후 나를 찾아왔던 게 꿈은 아닐 테니.
단지 그것을 어떻게 포장하느냐가 내게 주어진 숙제였다.
양만우는 자신 있는 표정이었다. 내가 이미 낚인 물고기라 생각는 듯했다.
결론을 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요.”
“······ 그게 무슨 소리냐? 필요가 없다니?”
양만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약간의 노기마저 엿보였다. 그러나 내 의견에 변함은 없었다.
“저를 신경써주실 필요 없어요. 제 앞가림은 제가 하고 싶어요.”
양만우가 탄식했다.
“지금 네 꼴을 봐라. 그 꼴로 앞가림? 지나가던 거지가 비웃을 거다.”
강압적인 말투와 눈빛.
그것들이 나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이왕지사 할 거라면 제대로 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들러붙지 않으니까.
“아저씨 말을 듣고 반성 많이 했어요. 누군가가 챙겨주지 않으면 위험할 정도로 제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걸요. 그렇죠, 산 사람은 살아야죠.”
“너 혼자선 힘들다. 이럴 때일수록 뭉쳐야 해. 아직 해결 못한 일이 수두룩한데 너 혼자 그것들을 다 할 있겠냐?”
양만우는 필사적이었다.
그는 큰 빚을 지고 있었다. 도박. 한 단어면 설명은 충분하리라.
그러니 내가 가진 돈이 무척이나 탐도 날 것이다.
“저 혼자 해보려고요. 보름동안 많이 생각해봤어요. 아저씨 말을 듣고 확신했네요. 아버지도, 부모님도 지금 이런 제 모습을 보면 많이 걱정하시겠죠?”
“그건······.”
양만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올곧게 자신의 눈을 바라보는 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보름 전 장례를 치룰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가보셔도 돼요. 청소도 제가 할게요. 보아하니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거 같은데.”
양은하가 설거지를 멈추고 나를 쏘아봤다.
네까짓 게?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어리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소녀는 도도하고 예뻤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나는 최후의 영웅이란 수식어를 달만큼 인류에게 있어선 막강한 존재였다.
그녀보다 더한 미녀들을 숱하게 만났고 안아봤다.
그중에는 각지의 모델이나 톱스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눈앞의 소녀 정도로는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설령 움직인다 하더라도, 단순 외견만 가지고 끌리기에 나는 너무 많은 경험을 했다.
꿀꺽!
양만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정말 괜찮겠느냐? 나는 네가 걱정돼서 그런다. 일단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이 이야기는 더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불안해서 그러는 게야. 은하야! 너도 같이 말해다오.”
양은하는 코웃음을 치며 설거지를 중단했다.
고무장갑을 걸어놓고 차분하게 걸어와선 정확히 내 눈앞에 앉았다.
나를 앞에 두고도 다른 소리를 할 수 있겠냐는 듯.
은근하게 묻어나는 교태를 보면 남자 여럿 울릴 상이었다.
“같이 가요. 보아하니 친구도 별로 없는 거 같은데. 제가 친구 해드릴게요.”
나 같이 예쁜 여자애가 친구를 해준다는 걸 영광으로 알라는 것처럼 별 감흥 없는 미소와 함께 양은하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내밀어진 손을 무시하며 말했다.
“친구가 많다고 꼭 좋은 건 아니더라고.”
특히 앞으로 펼쳐질 세상에선, 친구를 잘 골라야 한다.
양은하가 던진 ‘친구’란 ‘노예’ 혹은, ‘머슴’을 뜻한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무심하게 던진 말에 양은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래도 혼자보단 낫지 않을까요?”
“차라리 혼자가 낫지.”
나는 시선을 돌렸다.
명백한 무시의 의사다.
양은하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느냔 표정을 지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양은하가 뭐라 하건 그런 건 내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아저씨. 지금 저 약 올리러 온 겁니까?”
“그럴 리가! 나는 순수한 의미로 너를 돕고 싶어서······.”
“여기서 나가 주시는 게 저를 돕는 길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네요.”
명백한 문전박대였다.
양만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쐐기를 박았다.
“조심히 가십시오. 나가는 문은 저쪽입니다.”
양만우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내가 이처럼 완고하게 반대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모양.
“은하야. 가자!”
그러자 양은하가 훽! 나를 째려보곤 몸을 돌렸다.
쿵!
문이 닫혔고, 혼자 남은 나는 즉시 화장실로 향했다.
‘일단 씻자.’
양만우와 양은하를 보냈으니 한 차례 고비는 넘긴 셈이다.
특히 양만우는 고집이 센 편이니 한동안 나를 괴롭힐 일은 없으리라.
이로써 어느 정도 자유는 보장됐다.
누군가의 감시도 없었다.
거울을 봤다.
보름간 씻지 않아 추레한 몰골이지만, 눈빛만은 살아있었다.
이제야 돌아온 게 실감이 되었다.
미래는, 바꿀 수 있다.
* * * * *
다음날 늦은 저녁.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민식이가 집으로 찾아왔다.
대강 예상은 하고 있었기에 놀라진 않았다.
녀석의 몰골 또한 말이 아니었다.
옷은 찢어져 있었고, 머리는 산발했으며, 전신이 모래투성이였다.
하지만 민식이는 나보다 더욱 놀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너······.”
“조난이라도 당했냐?”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 깔끔해진 모습과 방의 풍경에 민식이는 동공을 마구 흔들어댔다.
“뭐가? 그러는 너야말로 어떻게 된 거냐?”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내가봐도 완벽한 연기다.
사실, 이 며칠간 민식이가 무엇을 했는지 대강 짐작은 갔다.
‘각성을 하러 갔군.’
심연으로의 문을 찾았을 것이다.
각성조건 중 하나가 바로 ‘문’과 접촉하는 것이었으니.
돌아온 걸 보면 성공한 듯싶었다.
슬쩍 시선을 돌려 민식이의 왼쪽 어깨를 바라봤다.
본래는 없었던 3개의 점. 그리고 가슴팍 주머니에 있는 낡은 양피지 하나.
저것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명확했다.
‘마검사. 마검사가 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