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259화 (259/261)

259. 간신이 나라를 살림 (1)

“어서 오십시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깜빡였다. 뭉개지고 흐려졌던 시야가 깨끗한 빛깔로 재조립되었다.

“음.”

일어서 기지개를 켰다. 온몸의 피가 손끝부터 발끝까지 순환하며 고대에 잊혀진 그 어떤 힘을 일깨워주는 듯했다….

“키가 크는 쭉쭉이 체조입니까?”

묻는 말이 들려왔다.

나는 약간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제 키는 이미 충분히 큰데요.”

“당신의 말을 빌어 해설하자면, 간신이여. 6척 1리는 항상 6척보다 크겠지요.”

“제 생각의 사생활은 대체 어디에….”

“저승에 사생활 같은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저승에 있으며, 저승 외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저승에 반대하는 그 무엇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나를 위한 저승, 저승을 위한 하나입니다.”

“여기가 바로 지옥이었군요.”

헛소리를 주고받는 우리 둘 중 보통 나는 마지막까지 입을 놀리는 쪽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먼저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내가 말했다.

“천사님.”

“예.”

“울고 계십니까?”

침묵이 흘렀다.

나는 말없이 천사님을, 다른 삶을 살고서 다르게 죽어야 했던 여왕 폐하를 바라보았다.

그 분은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복면을 벗은 그 얼굴. 날 마주 보는 눈동자에서는 은빛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목에 난 상처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고여 있던 독기가 빠져나온 것처럼, 그 눈동자는 이전에 보았던 때보다 더 투명해진 채였다.

나는 혼자 걸을 수 있게 된 무렵을 떠올렸다. 정원에 나가 맨발로 흙을 딛고,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본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는 어렸고, 달은 심장에 박히듯 아름다웠다.

“그랬지요.”

문득, 그런 느낌으로 내가 말하자, 여왕 폐하께서는 눈가를 닦으며 되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생각해보면, 행복을 느끼기 위해 꼭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왕 폐하는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침묵을 말로 받아들였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람이란 행복을 위해 점점 필요한 것들이 많아지도록 설계된 존재겠지요.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해 버리면 문명의 개화도 기술의 발전도 있을 수 없을 테니까요.”

“…….”

“하지만 그런 세세한 원리는 모두 무시하더라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여왕 폐하가 어깨를 수그렸다.

그 어깨 너머는 옅은 묵빛이었고, 그래서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한 차례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시현군의 몸으로 나투아와 전쟁을 치렀을 무렵. 함호와 최후를 같이 한 다음, 아직 전장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무렵.

“당신에게는….”

어깨를 수그린 그대로 여왕 폐하는 말했다.

“당신에게는 지금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수그린 어깨로부터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중 첫 번째 선택지는, 아.”

여왕 폐하가 도중에 입을 다문 까닭은 내가 그 어깨를 감싸 안았기 때문이다.

나는 손을 들었다. 다행히 이곳에서도 내 소매는 길었다. 나는 쉬이 폐하의 뺨을 닦아줄 수 있었다.

“선택지 같은 건 언제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뺨을 흥건하게 적신 물기가 수은처럼 소매에 녹아들었다.

내가 말했다.

“지금은 그냥 잠깐 이렇게 있지요.”

“……음.”

폐하는 숨을 크게 삼켰다. 어깨를 추슬렀다. 어깨의 떨림은 사그라지었지만, 소매를 적시는 뺨의 물기는 멎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폐하가 말했다.

“그러지요… 그럽시다, 간신이여….”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했다.

◈          ◈          ◈

그리하여 우리는 어깨를 맞댄 채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저 서로를 향한 호칭에 대해서였다.

“해왔던 대로 천사님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폐하라고 고쳐 부르는 게 더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간신이여.”

“아직 간신이라 부르시는 겁니까.”

“당신이 정했던 닉네임대로 김충신이라 불러드립디까?”

“아뇨, 생각해보니 그것도 좀 용 쩐다 급으로 부끄럽네요….”

“그렇지요. 그러니 그냥 해왔던 대로 하겠습니다.”

“아, 그러십니까요. 저는 그럼 반대로 여왕 폐하라 불러드리지요.”

“예.”

“예.”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오래는 아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좀 웃고 나서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저승의 동향에 대한 것이었다.

“제가 임무 들어간 순간부터 생중계됐다고요?”

내가 깜짝 놀라서 묻자 폐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은월들의 목소리가 닿은 순간에 이미 짐작은 하지 않았습니까?”

“으어, 그렇긴 했지만… 갑자기 좀 쪽팔리는데….”

돌무더기를 헤치고 깨어난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가 보인 모습들이 눈앞을 스쳐갔다.

폐하는 살짝 웃었다.

“새삼스러운 반응이군요.”

“으음. 그야 새삼스럽습니다만, 그 왜 유명한 예시가 있지 않습니까. 혼자 있을 때는 알몸으로 춤을 추어도 쪽팔리지 않지만, 누군가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와 그런 자길 목격하면 죽음과 같은 수치심이 엄습해온다는 이야기 말이에요.”

“애초에 왜 알몸으로 춤을 출 필요가 있는 겁니까?”

“그러게요…. 분명 어릴 적의 상처가 그런 식으로 발현이 된 거겠지요. 물론 저한테 그런 상처가 있다는 건 아니고, 제가 한 일도 알몸으로 춤을 춘 것과 동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뭐라고 하나….”

나는 알맞은 말을 고르기 위해 애썼다. 폐하가 그런 내 수고를 덜어주었다.

“개인적인 모습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이 폐하께서는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예.”

자기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개인적인 모습의 노출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꽤나 역설적인 노릇이었지만, 그렇게 따지면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상인 이 장소 자체가 이미 충분히 역설적이었다.

나는 뒷머리를 긁으면서 말했다.

“이번 임무는 처음부터 끝까지 ‘저’의 이야기였으니까요.”

“음.”

“지금까지처럼 누군가 이미 살던 삶을 잠깐 맡는 것이 아니었어요. ‘이 지경에 놓이게 된 건 내 탓이 아냐.’ 하고 말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어요.”

다시금 나는 쓰게 웃었다.

“사실 삶이란 원래 그런 법이고, 또 그게 당연한 법이지만요. …그래도 부끄럽네요.”

“부끄러운 생애를 살았습니다, 입니까.”

“아. 그 말씀이 딱 들어맞네요. …웅, 어디선가 인용하신 문구입니까?”

“글쎄요.”

폐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폐하께서는 이렇게 가끔 영문 모를 지식을 차입해 오기도 한다.

“하지만 간신이여,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폐하는 그렇게 말하더니 내 어깨에 자신의 몸을 더 기대어왔다.

“당신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제대로 그 어깨에 짊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무게를 스스로 감당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지요.”

이승이 아닌 이곳에서, 몸이란 곧 그 사람이 갖는 본질이겠지.

그렇다면 체중은 곧 그 사람이 가진 본질의 무게일 것이다.

“당신은 불평하지 않았고, 탓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 자신이 갖고 있는 것들을 갖고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무게를 내게 맡기면서, 폐하는 조용하게 말했다.

“당신은 멋졌습니다.”

음.

나는 다시금 뒷머리를 긁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뭐라고 하나… 겸연쩍네요.”

“그럴 필요 없다니까요, 간신이여. 언제나처럼 팔짱을 낀 채 크게 웃으면서 ‘음하하하 제가 그렇게 용 쩌는 인간입니다.’ 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일입니다.”

“제발 그 빌어먹을 신조어 좀 없앨 수 없겠습니까? 저 진짜 괴로운데요. 한 순간의 실수로 대체 언제까지 괴롭힘 당해야 되는 겁니까요….”

“글쎄요. 아마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저승 태학관에서는 이미 국어의 변천사 과목의 중대 예시 중 하나로 채택된 모양이더군요.”

“진짜 쪽팔리네요….”

“이 또한 당신의 이야기니까요. 받아들이십시오.”

정말이지 이 폐하 앞에서는 말 한 마디를 함부로 못 하겠다….

“본래 말이란 함부로 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이 기회에 확실하게 깨달으십시오.”

아니, 이렇게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걸 고려하면 생각 하나 함부로 못하겠다고 해야 하나….

“흥.”

폐하께서 시선을 흘겼다.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예를 표했다.

“멋지다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들 보았답니까?”

“세 은월의 반응이야 보았을 테고… 나머지도 대체로 저와 비슷한 평가였습니다. 당신을 응원하는 한 편, 당신이 위기를 넘기면 다 같이 가슴을 쓸어 내렸지요.”

그런가.

하긴, 그렇겠지.

“물론 당신한테 ‘야, 나와봐 내가 할게.’를 시전하고 싶어 하는 이들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일일이 ‘아니 저기서 단기대결을!?’ 같은 식으로 반응하면서 당최 집중하질 못하더군요.”

“맞춰볼게요. 비은공주지요?”

“그리고 마나도요.”

뭐지….

아니 정말 뭘까, 그 둘은….

“그래서 그 둘이 제 대신 했다면 대체 어떻게 했을 거랍니까?”

“마나는 애초에 여왕을 구하지 않았을 거라고 하더군요. 대신 당신 선배와 함께 손을 잡고 왕국 남부를 평정하는데 힘을 쏟았을 거랍니다.”

“그것 참 등신 같은 발상이네요…. 여기서 여왕이 곧 여왕 폐하, 그러니까 저승의 실권자인 천사님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중으로 등신 같고요…. 비은공주는요?”

“여왕을 구하는 데까진 자잘한 방법차가 있을 뿐 당신과 대체로 비슷합니다. 다만 마지막 순간 나시파 변경백 분기를 탔을 거랍니다.”

“아, 비은공주가 나시파를 좋아할 것 같긴 했어요. 그치만 나시파는 비은공주를 싫어할 텐데….”

“그렇습니까?”

“예에. 비은공주 같은 애들은 뭐라고 하나, 애들한테 빵가루 같은 걸 던지면서 좋아하는 유형이잖아요? 그치만 나시파는 그냥 제발 짱 박혀서 책이나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단 말이죠.”

“과연. 그렇게 말하니 교실 내 카스트 구도가 한 눈에 들어오는군요.”

카스트가 뭐지?

하여간 자모신과 관련된 단어들은 근본이 없다니깐.

…….

“그러고 보면.”

“예.”

“이제 우리 세계 사람들도 저승에 올 수 있습니까?”

“어리석은 질문이군요.”

여왕 폐하는 내게 좀 더 무게를 맡겨 왔다.

“애초에 당신이 마지막 임무에 도전했던 것 자체가 그것을 위해서 아니었습니까.”

“그랬지요.”

나는 길을 떠나기 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대화와 지금의 대화를 조립하여 알아낸 사실을 입에 담았다.

“아리야처럼, 폐하께서도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셨군요.”

나 또한 폐하의 어깨에 내 무게를 맡겼다.

“다행입니다.”

“…….”

불행한 삶을 살다가 죽은 사람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 삶의 원인이 되었던 사람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었고, 다시금 그 삶의 계기가 되어준 사람이 있었다.

폐하도, 나도, 그 네 종류의 사람 모두에 해당되는 이들이었다. 폐하의 삶이 불행하다는 것은 알기 쉬웠으나 나는 내 삶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살아서 불행했다. 나는 폐하를 구해냈고 폐하는 내 삶을 깨우쳐주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위한 계기가 되었다.

의미 그대로 서로가 서로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관계였다.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공유한 시간을 통해 전해지는 것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의 무게를 맡긴 채 가만히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어차피 시간은 많았으니까. 하지만 아마 시간이 촉박했다고 해도 우리는 그만한 시간을 들였을 것이다.

그 침묵의 시간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폐하.”

이윽고 내가 말했다.

“예, 간신이여.”

폐하가 답했다.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말씀하셨던 두 가지 선택지를 들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          ◈          ◈

폐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짐작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만.”

“예. 그래도 폐하께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폐하는 살짝 웃었고, 다시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도 끄덕임도 맞닿은 어깨에 잔물결을 일으켰다.

폐하가 말했다.

“이대로 저승에 오십시오.”

“…….”

그것이 내게 주어진 첫 번째 선택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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