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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이 나라를 살림-256화 (256/261)

256. 태양의 군주 (4)

그렇다. 살아있다.

아직 나는 살아있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살아남을 경우를 생각한다.

내가 살아남는다는 건 카한이 죽거나 패퇴했다는 걸 뜻한다. 야만족들은 이 이상 침공해올 동력을 상실할 것이다. 나시파의 죽음으로 혼돈의 도가니로 변하게 될 왕국 북부를 침탈하여 머무른다 해도 거기까지. 차근차근 준비하여 밀고 나아가면 북벽 너머로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만한 능력이 여왕 폐하와 선배, 내게는 존재할 것이다.

반대로 여기서 죽는 경우를 생각한다.

내게 벌어질 일은 조금 전 생각했으니 나 외의 일을 생각한다. 그 경우에도 카한을 물리칠 가능성은 있다. 엄밀히 말하면 카한과 나의 죽음은 어설픈 줄기로 엮였을 뿐 서로 독립적인 사건이다….

‘그렇다면 질문이 어긋났네.’

내 생사여부보다 카한의 생사여부가 더 생각할 가치가 있는 주제였다.

‘그리고 그건 이미 내 손을 벗어난 문제고….’

선배는 군을 잘 이끌고 있을까?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나진 않았을까? 내가 카한에게 했던 일갈은, 그 순간에는 의미가 있었지만, 지금도 유지되고 있을까?

모르겠다. 알 수 없다.

내 손은 이제 거기까지 닿지 않는 것이다.

그 곳은 이제 카한의 영역이다.

‘카한….’

북부의 전쟁군주. 야만인 왕.

‘그 놈은 황야를 제패한 영웅이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성되어 있고. 그에 비해 나는….’

나는?

‘여왕 폐하를 구했지.’

선배와 합의를 통해 그 이후를 담보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여기서 죽으면 내가 선배와 결혼하지 못하니 합의가 깨지게 되겠지만, 이 또한 엄밀하게 말하면 내 손을 벗어난 일이었다.

선배는 500년간 이 땅에 뿌리내린 종교의 상징적 지도자가 갖는 가치를 이해할 것이다. 그 죽음이 순교가 되리란 사실을 알 것이다. 행정과 종교를 분리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실용적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여왕 폐하는 높은 확률로 살아남을 것이다.

‘내 사명은 다해낸 셈이군.’

그러니까 여기서부터는 여분의 삶.

의미 그대로 여생(餘生)이다.

‘딱 한 놈만 데리고 가자.’

그 정도면 비은공주한테 놀림 받지도 않을 것이다.

‘좋아.’

타닥, 타닥. 먼 곳에서 이름 없는 나무가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위이이잉, 가벼운 이명과 함께 가벼운 어지럼증이 머리를 짚어 누른다. 아지랑이가 파고들어 눈이 따갑고, 탄내가 흘러서 코도 맵다.

삼라만상이 총출동해 오감을 들쑤시는 난장판 속에서, 그러나 내 마음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바하타 무로!”

야만 전사 중 한 명이 휙, 올가미를 던져왔다.

나는 곧바로 바닥을 굴렀다. “욱,” 화살대가 땅바닥에 스쳐 속 전체를 울렸다. “쿨럭,” 피를 토했다. 곧바로 일어섰지만, 그때는 이미 세 놈이 동시에 올가미를 던지고 있었다.

정확하게 내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그 올가미들을, 나는 절대로 피하지 못해야 했을 거다.

그런 능력은 내게 없었으니까. 저승 임무 당시의 신체 기억이 내 몸에 되살아나는 일은 없었으니까. 멀쩡할 때도 불가능할 일을 다 죽어가는 지금 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그때였다.

- 오른쪽!

어디선가,

언젠가,

알고 있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나는 움직였다.

오른쪽이었다. 정확히 어떻게 발을 옮겼는지, 몸을 어떻게 틀었는지 모르겠다. 말 그대로 그냥 움직였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올가미가 내 목을 스쳐 지나갔다.

“한타!?”

“한타 한타 바라야!”

의외였는지 야만 전사들이 소란을 피웠다. 올가미를 던진 야만 전사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앞으로 가서 창을 크게, 옆으로 한 박자 틀어서, 오른쪽 위를 향해서!

그렇게 했다. 이번 역시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마치 조금 전 여왕 폐하께서 잡아당기는 힘에 몸을 맡겨 나무에 올랐던 그때처럼, 물살의 유도에 몸을 맡겨 떠내려가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퍽 소리가 났다.

“억,”

그리고 야만 전사 한 명이 죽음을 맞이했다. 보지 않고 찌른 것이라 그 죽음은 억눌린 비명, 세찬 몸부림, 창끝에 꿰인 채 펄떡이고 그 펄떡임을 따라 더 깊이 찢어진 심장, 세차게 뿜어져 머리를 적시는 뜨끈한 핏물로 전해졌다.

- 뭐해 임마! 바로 뽑아내!

- 동감한다. 이대로는 놈이 낙마할 때 창이 딸려갈 거다. 그대의 손목까지 함께 꺾이고 말겠지. 빼고 물러서라.

들려오던 목소리가 한 결 더해졌다.

“아하….”

나는 그렇게 했다. 이 목소리들이 왜 지금 들려오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했다.

내가 창을 뽑고 빠지자마자, 쿵, 심장이 찢긴 야만 전사가 무너져 내렸다.

“하무타!?”

“하무타 바라 소로이!”

“마루 바 한바 야가!”

놈들의 소란이 한층 깊어 졌다.

반대로 나는 여전히 바람 잔 날의 호수처럼 고적해지는 마음을 느꼈다.

분명 내 입가에도 그 비슷한 미소가 있을 것이다.

- 당황하고 앉았네. 근데 임마 너 몸에 근육이 그게 뭐냐, 평소에 잘 처먹고 사냥 좀 하지….

- 조용히! 지금은 그런 걸로 잔소리 할 때가 아니에요.

- 동감한다. 그보다는 지금 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필요하다. 내 지시를 따라 움직이도록. 우선 오른쪽.

그렇게 했다.

- 조금 더 뒤로.

그렇게 했다.

- 날 믿고, 돌아보지 않은 채 펄쩍 뒤로 뛰어라!

정말이지 기꺼이, 한 점의 의심도 없이 믿고 따를 수 있었다.

그 결과 나는 똬리를 튼 뿌리에 발 걸리는 일 없이, 조금 단차가 낮은 웅덩이에 발을 담글 수 있었다.

야만 전사들이 이를 갈았다.

“카하무!”

“한타 바라야!”

야만 전사들이 말을 몰아 그런 날 잡으려 달려들었다. 바로 그 순간, 탕 소리가 울려 퍼지고, 선두에서 달려오던 전사 한 명이 억 소리도 못 낸 채 떨어졌다.

- 잘 한다! 역시 내 후손!

- 냉정하게 따지자면 당신밖에 그 말을 할 수 없으리란 게 좀 부럽네요….

- 동감이다.

폐하께서 소형 총포로 나를 원호하고 있는 것이다.

“폐하, 감사합니다….”

기세 좋게 외치려 한 것인데 입술에서는 산들바람 같은 소리만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나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전해졌을 테니까. 전해지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 창 옆으로 세워서 막아!

이렇게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넘어 전해지는 목소리들이 있는데, 같은 이승에 사는 이들끼리 서로 의사를 통하지 못할 리 있을까.

- 조금 더 뒤로 물러서서….

- 왼쪽으로 몸을 틀고….

- 창 던져버려도 좋으니까 나무 뒤로….

나는 그렇게 했다. 거듭하여 그렇게 했다.

그 결과 무언가 대단한 기적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창은 적을 찌르기보다는 막거나 쳐내는데 썼고, 공격하기보다는 도망치는 순간이 더 많았다.

결과적으로, 내가 죽일 수 있었던 적은 처음 한 놈이 전부였다.

탕……!

그렇지만 잡히지 않고 버텨 낼 수는 있었다.

탕……!

소형 총포라 해도 장전에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오히려 소형이기 때문에 안정성이 부족하며, 따라서 재장전에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총포에 대해 뭘 알겠는가?

- 진짜 잘 한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아등바등 버티고 있으면 이따금 위에서 여왕 폐하가 원호를 해준다는 것, 한 발에 한 놈이 나자빠진다는 것뿐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이상 알아야 할 만큼 이 상황이 오래 가지도 못했다.

- 이런.

이상적인 상황은 결국 끝을 맞이하게 마련이다.

“카하다 마야!”

“카한 비로 호로마!”

숫자가 일곱으로 줄어들었을 무렵, 야만 전사들은 결단을 내렸다. 놈들의 눈동자에는 분노가 끓고 있었지만, 분노 자체와는 일선을 긋는 무언가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냉철한 각오였다.

그 각오가 무엇인진 금세 알 수 있었다. 놈들이 다시금 일사불란하게 활을 들어 올렸던 것이다.

- 저 새끼들, 살려서 잡을 생각을 버렸네.

그랬다.

놈들은 더 이상 내게 다가서지도, 위에 신경을 집중하지도 않은 채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냉철한 조준. 만에 하나라도 내가 피하는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조율된 살의와 차갑게 식은 살기가 내 전신을 향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잘 버텼다.

그 목소리는, 하지만 ‘지금까지 수고했다.’처럼 아쉬움 섞인 치하의 말은 아니었다.

- 이제 그 보상을 받을 시간이다.

덤불이 크게 흔들렸다.

다음 순간, 그 덤불에서 한 무리의 왕국병들이 뛰어나왔다. 이어서, 탕…! 타당…! 일제히 울려 퍼진 격발음이 야만 전사들을 삼켰다.

◈          ◈          ◈

“아….”

나는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들었다.

왕국 병사들을 이끌고 온 지휘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당신….”

특작조장이었다. 홍차에 우유를 섞은 다음 젓지 않고 내버려둔 것처럼 복잡한 얼굴로 그가 중얼거렸다.

“당신,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겁니까?”

그 말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냐는 뜻일까, 그 꼴로 어떻게 살아남았냐는 뜻일까? 정확한 질문을 받지 못한 나로서는 둘 모두에 대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잘….”

“이런 망할, 좀 누워 계십쇼. 여기는 제가….”

조금 전의 일제 사격에도 불구하고 아직 살아남은 야만 전사들이 있었다. 폐하야 백발백중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총포란 게 원래 그런 시발스러운 물건인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건재한 전사도 한 쪽 어깨를 늘어뜨린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왕국병들은 늑대를 사냥하듯 놈들을 몰아갔다.

오래지 않아 이 자리는 정리되겠지. 그렇게 판단한 나는 숨을 편하게 내쉬려고 했다.

그럴 수 없었다.

“쿨럭….”

거품 낀 피가 다시금 땅을 검게 물들었다. 특작조장이 당황해서 내 어깨를 붙들었다.

“누워 있으라니깐!”

“괜찮아….”

“아니 괜찮기는 무슨, 아, 폐하는, 폐하는 또 어디에… 아 진짜!”

“폐하께서는 무사… 위에… 아무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는 김에 손사래도 쳤다.

물었다.

“선배는…?”

특작조장은 입술을 사려 물었다.

“각하께서는… 아가씨께서는 무사하십니다…. 현재 지휘를 하고 계십니다.”

“전황은….”

“들어봤자 모르잖습니까….”

“그래도 좀….”

“난전입니다…. 놈들의 육신이 워낙에 우월해서… 그래도 일단은 이 쪽이 우세합니다.”

특작조장은 내 가슴에 돋아난 화살대를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당신과 폐하, 아가씨께서 하신 연설이 효과가 있어서… 병사들이 고무된 덕분에, 숫자의 이점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다만 산불이… 또 놈들의 돌파력이 상상 이상이라, 연결망이 끊긴 부대도 있고, 아아, 제기랄, 말해서 뭐해. 아무튼 지금은 좀 안정을….”

“음….”

나는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아, 누워 있으라고! 당신 진짜 죽으려고 그래!?” 인내심의 끈이 끊어진 것처럼 특작조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고개를 젓고는 버티고 섰다.

- 좀 쉬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들렸으니까.

- 곧 올 거야.

나는 말했다.

“놈이 올 거야….”

“놈? 누굴 말씀하시는,”

특작조장의 말에 답할 필요는 없었다. 특작조장 본인이 깨달은 표정을 지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쿵 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덤불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짓밟히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나무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읏.”

마치 쨍쨍한 햇볕처럼, 커다란 그림자들이 드리워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카한….”

나무 하나가 더 무너지면서 불티를 피워 올렸다.

연기가 만들어낸 안개를 흐트러뜨리며, 야만인 왕이 북부의 전사들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          ◈          ◈

“카, 카한….”

“야만인들의 왕…!”

왕국의 병사들이 동요하며 한 걸음씩 물러섰다.

특작조장은 버티고 섰다.

“도망치십쇼.”

특작조장이 잇소리를 내며 말이었다.

“여긴 우리가 막겠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아, 보물 요정 도주극이니 뭐니 하는 그 특유의 개지랄 있잖아요. 그걸로 어떻게 혼자 잘 튀어 보세요.”

“조장.”

“얼른요. 댁이 뒈지면 아가씨가… 아, 씨발. 됐으니까 가라고!”

“이런 상태로 어떻게 뛰겠어.”

나는 가슴에 꽂힌 화살을 보여주었다. 특작조장의 얼굴이 무너졌다.

“아 진짜, 자기 몸 하나는 그렇게 잘 간수하던 양반이 왜 이제 와서….”

“그러게 말이지.”

나는 그런 특작조장의 가슴을 짚고 밀어냈다… 앞으로 나섰다.

“뭐 주사위 눈이 나쁘게 나올 때도 있는 거지….”

기침을 했다. 기침에 섞여 나온 피를 일별하면서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댁이 가.”

“네?”

“선배한텐 댁이 필요할 거야.”

특작조장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내 손목을 잡아 밀어내더니, 벌린 손에 칼을 한 자루 쥐어 주었다.

“각하 곁에 저 같은 놈은 이미 많습니다.”

…….

“음.”

나는 특작조장과 어깨를 맞대고 섰다.

조금 웃었다.

“이런 아저씨랑 함께 죽긴 싫은데.”

특작조장이 쓰게 웃었다.

“저도 댁이랑 마지막을 같이 하긴 싫습니다.”

“그럼 둘 다 살아가야 하겠네.”

“완벽한 해답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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