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253화 (253/261)

253. 태양의 군주 (1)

열두 마리의 용을 베고,

백 개의 호수에 깃발을 꽂은 자.

황금의 씨앗으로부터 발아한,

진정한 판의 아들.

나른한 벌판의 지배자.

얼어붙은 숲의 주인.

세계를 선도하는 기수.

태양의 군주,

우리의 왕.

오오, 카한.

형제여, 자매여, 축배를 들라.

비로소 카한이 왔으니,

다시없을 춤판이 이 자리에 왔도다.

◈          ◈          ◈

축축한 감촉이 가장 먼저 왔다. 이어 훅 비린내가 끼치더니, 쓰라린 통증이 오른쪽 뺨을 긁어 내렸다.

강바닥의 묵은 모래를 뒤집어쓴 것 같은 이 느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조금 지나서야 알았다.

“나시파.”

아.

“나시파… 나시파.”

나시파의 머리에 도끼가 꽂혀 있다.

아니.

나시파의 머리를, 도끼가 쪼개 놓았다.

“…….”

나는 지금 그 파편을 뒤집어쓴 것이다. 뺨에서 떨어지지 않는 쓰라린 느낌은 그 중 단단한 조각이 박혀 들어 그런 것이었고, 끈덕하니 흘러내리는 느낌은 그 중 부드러운 부분에 의한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이해했다. 또는, 그냥 이해하지 못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나를 남겨두고 썰물처럼 흘러 나가는 것 같았다.

소리가 일그러지고, 세상이 멀어졌다.

“뭐야,”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였다.

“뭐야, 누구… 무슨 짓이냐! 신월공이 잡은 수급에 손을 대다니 감히 누가,”

“악!”

“으악!”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무슨,” 선배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히히히힝!” 투레질 소리와 함께 시야가 한 차례 흔들렸다가, 쿵, 말이 발을 구르는 충격에 다시 돌아왔다.

동시에, 멍한 느낌이 확 빠져나갔다.

머리가 돌아갔다.

도끼. 가리비수에게 빙의했던 첫 저승 임무 때부터 도끼는 내가 애용하던 무기였다. 아마도 그 기억이 실마리가 되었으리라.

나시파의 머리에 꽂힌 도끼. 선배는 이미 자신이 나시파를 토벌했노라 소리쳤다. 아군 병사들이 그것을 복창해 전파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시파의 목에 손을 댈 수 있는 아군은 없다. 선배의 말마따나 감히 누가 그럴 수 있겠는가.

가능성 1 아군 병사가 아닌 자들, 나시파의 병사들이 나시파를 해쳤다.

가능성 2 아군 병사가 아니고, 나시파의 병사들도 아닌 자가 이 자리에 있다.

새로 나타났다.

“각하! 습격입니다!”

“적, 아군 가릴 것 없이 도끼가 날아들고 있습니다!

그 말처럼, 나시파가 이끌던 검은 기병들도, 아군 기병들도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해 쓰러지고 있었다. “억!” “크윽!” 입은 옷이 다를 뿐 그 비명에는 고저가 없었고 튀어 오르는 피는 한결같이 붉었다.

모두 같은 왕국민의 비명소리였다.

“폐하!”

내가 외쳤다. 나시파의 부서진 얼굴을, 완전히 색이 빠진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내가, 나는 외쳤다.

외쳐야 할 것을 외쳤다.

“사람들을 추슬러 주십시오!”

“왜 내가 아니라, 아, 과연.”

선배는 일순 따지려다가, 곧바로 이유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폐하도 곧바로 깨닫고 소리쳤다.

“왕국의 핏줄이여!”

그렇다.

“같은 하늘을 짊어진 이들아! 달빛을 받고 자란 여신의 핏줄이여!”

그렇다… 그런 것이다.

“신월공이 이끌던 병사들은 물론이요, 통치자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던 나시파 령의 병사들도, 사연이 있어 잠시 왕국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가련한 이들도, 모두 귀를 모아들어라!”

선배가 사람들을 추스르면, 그 연설은 오직 아군들을 향한 것이 된다.

신월군. 태산군. 왕도에서 끌고 나온 병사들. 그들에게만 영향을 끼칠 것이고, 그들만이 질서를 되찾아 미지의 적에게 맞설 것이다.

“우리는 지금 습격을 받고 있다!”

그것은, ‘손해’다.

“왕국에서 나고 자란 모두가, 지금 습격을 당하고 있다!”

나시파의 병사들은 화공으로 이미 혼란에 빠진 상태. 거기에 통수권자인 나시파가 지금 죽어 나갔다.

“모두 무기를 거두어라! 그리고 새로이 나타난 적에게 그 무기를 돌려라!”

지휘관의 부재에 잘 훈련된 병사들은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기사(棋士)의 소실에 장기짝들로 준비된 이들은 대응할 수 없다.

“투항하라! 받아들이라! 함께 맞서자! 외부의 적에게!”

이는 곧 나시파가 이끌던 병력 전원이 무질서 상태에 빠졌음을 뜻한다.

“왕의 이름으로 공투를 명한다! 그럴 수 있는 자들에게, 달무리를 짊어진 자의 이름으로 현세와 내세 모두의 완전한 사면을 약속한다!”

이 혼란 상태에 빠진 나시파의 병력들을 흡수해야 한다. 흡수해서 이용해야 한다. 습격자들을 하나라도 더 물고 늘어지도록, 적들이 던지는 도끼를 하나라도 대신 맞게끔 앞세워야 한다….

‘나시파.’

그렇게 잘난 척 네게 지껄였던 주제에, 나는 네가 남긴 그늘 위에 서 있구나.

‘…….’

하지만 지금은 자기연민에 빠질 때도 자기 비하에 취할 때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는 나시파가 이 세상에 남긴 허물로부터 눈을 돌렸다. 대신 여왕 폐하의 투명한 목소리에 휩싸인 이들을, 그들이 얼기설기 헐거운 공조를 이루어 갑자기 나타난 공동의 위험에 대처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공동의 위험을 노려보았다.

타오르는 산 위에 그 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너무도 거대했고, 타고 있는 말 또한 그러했다. 남자도 말도 온몸의 굴곡마다 단단해 보이는 각이 져 있었다. 그래서 산 위에 놓인 바위로 비유할 수도 있었지만, 두 가지 이유로 그럴 수는 없었다.

첫 번째, 그런 바위는 없었다.

두 번째, ‘그런 바위’는 정말로 없었다.

자글거리는 아지랑이 속에 푹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는 실로 뚜렷하게 보였다. 불길의 춤이 드리우는 그늘도, 그와 나 사이에 놓인 높이와 거리로 인한 역광도, 그 남자의 모습을 뒤덮지는 못했다. 타고 있는 말조차 뒤덮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근육질로 무장한 거구의 인간 남자였고, 그런 인간 남자를 태우고 있는 커다란 말이었으며, 그 밖의 무엇으로도 오해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그 자리에 서있었다.

“…….”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분명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처음 보았을 것이다.

“카한.”

그렇지만, 그였다.

그일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의 존재감을 발할 수 있는 이가 그 외에 있을 리 없었다.

“야만 전사들의 왕….”

태양이 현현한 것 같은 남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

◈          ◈          ◈

“여기로 오는 동안 무너져 타오르는 돌더미를 보았다.”

남자는 천천히 말을 몰아 산을 내려왔다.

“그대들의 조상이 쌓아 올린 돌집이었다. 커다란 돌을 아래에 괴었다. 자그마한 돌들이 그 위에 놓였다. 위아래로 받혀진 돌들은 좌우로는 맞물렸으며, 그럼에도 떨어진 틈새는 진흙이 메웠다. 벌레는 물론이고 물조차 스밀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솜씨였다.”

쿵, 쿵, 말발굽 소리는 화포의 포탄이 산을 내리찍는 기세로 울려 퍼졌다.

“만들어낸 동굴 아래서 첫 잠을 잤던 그대들의 조상은 필시 들떠 있었을 테지.”

나시파가 늪지의 안개처럼 소리 없이 다가왔다면, 이 남자는 말 그대로 태양 같았다. 자신이 왔다는 것도, 여기에 있다는 것도, 우리를 향해 내려오고 있다는 것도, 그는 숨기지 않았다. 모조리 백일하에 드러낸 채 당당히 걸어 내려왔다.

“흐르는 세월이 그 돌집을 좀먹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허물어진 부분을 다시 쌓아 올리고, 허물어질 것 같은 부분을 더 튼튼히 빚어내면서 그것은 점점 커졌을 테지. 처음에는 한 사람의 몸만을 이슬에서 지켜주었을 돌집은, 시간을 먹으면서 한 가족을 품을 수 있을 만큼 자라났을 것이다. 그러며 자신을 만든 자의 핏줄을 대대손손 지켜왔을 것이다.”

“…….”

“그러나 지금 그 돌집은 불탔다. 무너졌다. 아마도 자신이 지켜왔을 핏줄의 일부와 함께. 숯덩이에 뒤섞여 돌 틈으로 삐져나온 어떤 장정의 다리가 그 흥망을 소리 없이 노래하고 있었다.”

“무슨,”

선배가 잇소리를 냈다.

주먹을 너무도 꽉 쥔 나머지, 선배는 카한이 왕국어로 말하고 있다는 것도, 자신이 왕국어로 받아 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네놈이 무너뜨렸잖아!”

카한은 고개를 틀어 선배를 내려다보았다. 여름날의 구름처럼 새하얀 자위 한복판에 자리 잡은 눈동자가 역시나 태양처럼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네놈이! 네놈이 이끄는 야만족들이! 이 일대를 불사르고, 어지럽히고, 무너뜨리면서! 그러면서 그 돌집도 무너진 것이 아니더냐!”

“그렇다.”

카한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이다.”

갑작스러운 긍정에 선배가 멈칫했다.

그런 선배를 일별하고 나서, 카한은 볕처럼 따갑게 고막을 울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튼튼하게 만들어져 오랜 시간 버텨왔을 그 돌집도 결국은 우리들의 창칼 앞에 무너진 것이다.”

“그래서?”

폐하가 말했다.

“만들고 유지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들지만, 부수는 데에는 그 1할의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고?”

역시 드물게도 거칠어진 어조로 폐하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줄을 서는 것이 나을 터. 앞서 똑같은 깨달음을 얻었던 자가 지금까지 천만 명은 될 것이고,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알게 된 자들도 백만 명은 될 것이니까.”

“아니다.”

카한은 역시 선뜻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 아니다.”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부정하고서, 카한은 계속해서 말을 몰아 내려왔다.

쿵, 쿵! 말발굽 소리는 더욱 커져 말 그대로 산야를 울리는 것 같았다. 쿵, 쿵! 발굽이 내리 찍힐 때마다 불타는 가지가 무너져 내렸다. 쿵, 쿵! 그리고 곧 그렇게 크게 울려 퍼지는 이유가 밝혀졌다.

말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카한의 뒤를 따라 말들의 머리가, 그리고 그 말 위에 탄 야만 전사들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깨달음을 입에 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군단을 끌고 내려오면서 카한이 꺼낸 말이었다.

“읏…….”

“으으…….”

병사들이 질려 버렸다.

카한이 이끌고 온 야만 전사들은 하나같이 거구였다. 그리고 장창이 화살처럼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말들을 타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 한 호흡으로 발을 딛을 때마다, 쿵! 쿵! 땅이 울렸다. 그리고 불길이 만들어낸 아지랑이는 공기마저 몸부림치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압도적이었다.

“이유가 뭐든 간에.”

이대로 쭉 압도당할 수는 없었다.

“직접 나타났다 이거로군.”

내가 말했다.

식은땀을 삼킨 채, 어떻게든 입가에 미소를 띠고서 카한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 폐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에게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 많아. 그리고 그 중 수많은 이들이 또한 이 자리에 있어, 카한, 그대에게 그 깨달음을 되돌려주고자 할 것이다.”

카한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대에겐 불행하게도, 그들과 그대 모두 이 자리에 있군.”

살갗이 타오르는 것만 같은 그 맹렬한 눈빛을 이겨내면서 나는 말을 이었다.

“우두머리로서는 좀 어리석은 행동 아닌가? 멀찍이 후방에 틀어박혀 휘하의 병대들을 내보내지,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이렇게 헐레벌떡 튀어 왔는지 모르겠어. 꽁무니에 불붙은 돼지새끼도 아니고.”

“…….”

“아. 혹시 내보낼 병대가 없어지기라도 했나? 하긴 이해해. 선봉이 그렇게 참패를 당하고, 나시파는, 나시파잖아. 뭔가 또 진중에서 사고를 쳤을 테지. 그 사고를 네가 수습해야 하는 신세가 됐을 테고… 그래서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렸다거나? 하아. 만약 그렇다면 진짜 쪽팔리겠네. 야만인 왕이 아니라 부하들의 실태를 책임질 사람 1에 불과하잖아?”

카한은 말없이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말했다. 카한을 향해서가 아니라 주변 병사들을 위해서. 그들이 더 이 분위기에 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음? 아냐? 에이. 맞잖아. 쪽팔려서 그래? 우리 사이에 뭐 쪽팔릴 게 있어. 사람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거지. 응?”

“…….”

“아니면 뭐야. 카한 씨. 우리 폐하께서 불타는 왕도에 백성들과 함께 남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극이라도 받았어? 질 수 없다 이거야? 그래서 이렇게 뛰어왔다 이거고? 우와. 남자다! 우리 카한 씨. 멋있어 아주. 적만 아니면 아주 그냥 악수라도 해주고 싶은데, 이걸 어쩌나. 그러기에는 지금 좀,”

“네 목소리를 안다.”

카한이 말했다.

내가 입을 다문 순간, 카한은 말을 이었다.

“그 혓바닥을 뽑아주겠다.”

“말해두는데,”

나도 바로 말했다.

곰이 앞발로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 한 마디의 말도 더는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공기를 억지로 잡아 찢으면서, 돌려주었다.

“그 말을 한 게 네가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거란다. 덩치 큰 꼬마야.”

카한이 탄 말의 발굽이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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