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252화 (252/261)

252. 그늘의 변경백 (9)

산이 타오른다.

불어 닥친 바람에 잿불이 흐트러지고, 튀어 오른 불똥이 퍼져 나가며 초록을 태워 나간다. 열이 섞인 공기가 허파를 데우고, 비강에 검은 가루가 눌어붙은 듯 매캐한 내음이 차오른다.

그리고 천만 개의 바늘 같은 빛이 산야를 쑤신다.

- 아….

나시파가 신음을 흘렸다. 고오오오…. 타오르는 산이 내지르는 비명 속에 그 신음은 한숨처럼 가늘게 울려 퍼졌다.

- 아아….

바람이 분다. 불붙은 가지에서 이글거리는 잎사귀가 흘러내린다. 드리워진 그림자들, 발작하듯 나부끼다가 그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조금씩 타들어간다.

그늘이 허물어진다.

녹아내린다.

“아아아아….”

불에 놀란 말들이 일제히 투레질을 하고, 산새들이 불규칙한 박자로 날아오르는 가운데, 자연히 이 일대는 전에 없던 소란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시파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거기냐!”

노호한 선배가 화살을 날렸다. 팟……! “억.” 그 화살은 지금까지처럼 정확하게 적 기병의 목을 꿰뚫었다.

“아….”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달리 나시파로부터 반응을 이끌어냈다.

“보인다!”

적 기병이 낙마하여 바닥을 구른 순간, 튀어 오른 불티가 나시파의 머릿자락을 비추고 지나간 것이다.

“간다!”

선배가 말을 박찼다.

치열한 훈련을 극복하고 무수한 전장을 돌파한 선배의 말은 주변이 불지옥으로 변한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다그닥, 다그닥…! 선배가 이끄는 방향에 놓인 세계가 흔들리면서 확대되어 왔다.

그 확대된 세계 안쪽에 나시파가 있었다. 확실하게 보였다. 튀어 오른 피를 뒤집어써 붉어진 얼굴은, 더 이상은 놓치려고 해도 놓칠 수가 없었다.

“읏.”

눈 깜빡할 사이에 쇄도해 들어간 선배가, 활을 내버리는 동시에 창을 치켜들었다. 말과 창이 드리운 그림자가 나시파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음 순간에는 실체를 가진 창날이 나시파를 덮쳤다.

“아…!”

다시금 한숨처럼, 신음이 터졌다. 턱의 윤곽이 벌어지고, 쇠촉이 파고든 복부로부터 느릿하게 피가 흘러나왔다.

“우으…….”

나시파가 고개를 수그린 채 헐떡이는 모습을, 선배는 차갑게 내려다보면서 외쳤다.

“적장을 쓰러뜨렸다!!”

그 외침은 아군 병사들의 이목을 끌어 모았다.

기병으로 보내온 세월과 신월 공작가의 가신으로 보내온 세월이 일치하는 이들, 어쩌면 후자가 더 긴 이들이 소리 높여 복창했다.

“변절자가 쓰러졌다!”

“신월공께서 달의 적 나시파 변경백을 베셨다!”

사방에서 환성이 터졌다. 주위를 둘러보지 않아도 기세가 우리 쪽으로 넘어온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나시파 역시 느꼈을 것이다. 환부에서 넘쳐흐르는 피처럼 그 입술에서 한탄이, 말이 흘러내렸다.

“아… 졌네요….”

“…….”

나는 묵묵히 그런 나시파를 바라보았다.

화공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던 우리, 그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적병들. 여기서 이미 대응에 차이가 생기는 것에 더해, 병종 구성과 자리잡은 위치도 적도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내가 말했다.

“너는 사람을 장기말로 쓰는데 능숙하지.”

“…….”

“그래서 누군가의 약점을 파악하는데 익숙하고, 그 동력을 자길 위해 쓰도록 몰아가는데 능숙해. 덕분에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것들 대부분을 네 예상대로 돌릴 수도 있고.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제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있을 때는 쉽사리 무너진다… 는 말씀이신가요…?”

“아니.”

나는 고개를 젓고서 말을 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네가 이용하는 이들이 네 예상을 벗어나는 분투를 보여주는 일은 없어.”

“아핫….”

나시파가 켈룩, 피를 토했다.

“예…. 저의 세계에서는 행운도 기적도 벌어지지 않으니까요….”

검붉은 피였다. 마치 눈동자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까맣기 그지없던 나시파의 눈동자는 잿빛으로 옅어졌다.

“응…….”

나시파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그 손가락 끝이 축 가라앉았다. 나시파의 턱선에 맺힌 피가 뚝, 떨어져, 손등 위를 때렸을 때에도 그 가느다란 손가락들은 이미 생명을 잃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 손가락. 나는 그 손가락을 보고 있었다.

나시파는 그런 나를 보고 있었다.

“장의, 님….”

나시파가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보았다. 몸이 자그마한 만큼 그 육신이 가진 내구도는 너무나도 약했다. 단 한 번의 창질을 허용한 것만으로도 그녀는 죽음의 문턱 위에 까치발을 선 채 서있었다.

“…….”

역설적이게도 나시파가 말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 역시 선배의 창에 꿰인 탓이었다. 결코 오래 이어지지 못할 균형이었고, 그것을 나도 녀석도 알고 있었다.

“선배.”

“…….”

선배는 살짝 잇소리를 냈다. 한숨을 내쉬었다. 창대를 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를 막지도 않았다.

“빨리 해.”

“고마워요.”

“됐고, 빨리 하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시파를 향해서 나는 말했다.

“잘 지냈어?”

“아하…….”

나시파가 웃었다. 그 너머에서 불에 뜯겨 자신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게 된 가지가 우지끈,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러는 장의님은요…?”

“잘 지냈지. 내가 어디 가서 밥도 못 챙겨 먹을 사람은 아니잖아.”

“으음… 그렇지요…. 얄밉게시리….”

“그래서, 잘 지냈어?”

“네… 잘 지냈어요….”

“거짓말.”

다시 웃음소리. 잔기침과 피가 섞인.

“알면 왜 여쭈시나요…?”

“확실히 듣고 싶어서.”

“장의님은, 참 때리고 싶은 사람이지요….”

“동감이야. 대신 때려줄까?”

마지막 말은 선배가 꺼낸 것이었다.

나시파는 다시 조금 웃고, 살랑바람에 몸을 맡긴 민들레처럼 작게 고개를 가로젓고는, 웃기 전보다 더 옅어진 눈동자로 나를 보았다.

“예… 잘 못 지냈어요….”

“…….”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아무리 편안한 침대에서 잠을 자도… 아무리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도… 그 밖에 여러 가지 시도를 해도… 완전히 즐겁지는 않았어요….”

나시파가 어깨를 움직였다. 팔이 움직이고, 손목 아래로 아래 축 늘어진 손은 그런 팔에 걸린 짐짝처럼 뒤이어 올라갔다.

“나눌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렇게 자신의 손을 이마 위에 올려놓고 나서, 나시파는 말을 이어갔다.

“장의님과 나누고 싶었는데….”

나는 다시 그 손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그 손이 내게 내밀어졌을 때를 떠올렸다.

그 때와 같은 말이 입에서 흘렀다.

“미안해.”

“으응, 아니요….”

나시파는 파르스름한 얼굴로 힘없이 웃었다.

“결국… 저도 제 자신의 철학에 철저하지 못했다는 거니까요….”

“…….”

“혼자서 행복해졌으면 됐을 텐데… 그럴 수 있었을 텐데…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느끼는 짐승은 세상에 없었을 텐데….”

다시 기침 소리.

“그런데도 저는 그럴 수가… 혼자서는… 홀로 행복해질 수가 없었어요….”

태학관 시절부터 그러했다.

“인정받고 싶었어요…. 사랑받고 싶었어요…. 너는 잘못되지 않았다고… 틀리지 않았다고… 이 세상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도록 우뚝 서서 증명하고 싶었어요….”

“그렇다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의 목소리도, 내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보다 투명하게 비치고 맑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활활 타오르는 산으로부터 넘쳐흐르는 탄내와, 그걸 들이마셔 거뭇해진 허파를 씻어 내리는 것처럼 깨끗한 목소리가 말발굽 소리와 함께 가까워졌다.

“그대가 먼저 인정해주고, 사랑해주지 그랬느냐.”

여왕 폐하였다.

자신을 배반한 변경백을 바라보는 은월의 눈동자는 처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대가 여기 불러 모은 반란군들도. 그대가 배신하는 통에 대비할 틈도 없이 죽어야 했던 왕도의 병사들도. 인정받고 싶었을 것이다. 사랑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대는 그럴 수 있었지 않은가.”

“…….”

“어째서 그리 하지 않았는가.”

폐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시선 또한 폐하를 따라 주변을 훑었다.

산그늘이 불길에 구축당한 지금, 더는 숨을 곳이 없게 된 나시파의 매복병들은 일방적으로 사냥당하고 있었다. 횃불 빛에 훤히 노출당한 박쥐 떼처럼 우왕좌왕하다가 조직적인 창칼 앞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 지금, 그들은 더 이상 불길하기 그지없는 그림자 군세의 일원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재해를 피해 달아나다가 어디로도 피할 곳이 없다는 걸 깨닫고 만 왕국민처럼 보였다.

그들을 둘러본 폐하는 입술을 악물었다.

“내게는 왜 그리 할 수 없었는가.”

여왕 폐하는 드물게도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왕궁에서 자신을 두고 떠난 고위 귀족들에게도 원망의 기색을 비치지 않던 폐하가,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그대에게 부족한 왕이었는가? 도저히 인정할 수 없고 도무지 사랑할 수 없었는가. 그래서 그리도 간단히 배신하고, 이 많은 이들을 왕국의 적으로 만들었는가. 꼭 그래야 했는가.”

그것은 단순한 억하심정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나라가 이렇게까지 커다란 전화에 휘말리고, 왕도가 말발굽에 짓밟힌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피해가 이토록 확대된 이유들 중 나시파의 모반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북벽의 문이 열어젖혀진 순간, 그 너머에 있던 재해가 왕국으로 쏟아져 들어온 순간, 그 열쇠는 나시파의 손에 들려 있었다. 언제나처럼 나시파의 손에 있었다.

폐하는 그것을 알았다.

“만약 조금만 더.”

그러기에 폐하는 왕국민 복장을 차려 입은 이들을, 사방에서 죽어가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무너지는 왕도를 다시 보는 느낌을 받은 것이겠지. 비수를 자루째 삼킨 것처럼 억눌린 폐하의 목소리는, 그리하여 심장의 판막으로부터 느릿하게 배어 나오는 핏물 같았다.

“만약 조금만 더, 내게 기회를 주었다면….”

“…….”

“아픈 자들을, 다친 자들을, 왕국에 상처 입은 자들이 있음을 내게 알리고, 내가 이들을 돌볼 수 있게 해주었다면….”

그리고 그것은, 나시파만이 책임을 느껴야 할 말은 아니었다.

나도, 선배도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고위 귀족의 핏줄로서, 또한 나름의 입지를 가진 신하로서 이 모든 일에 책임이 있었다.

조금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금 더 폐하를 잘 보필하고, 조금 더 민초들을 잘 달래고, 조금 더 북방과 좋은 관계를 맺어서, 조금 더, 조금 더. 그게 무엇이든, 지금 이것보다 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만한 힘이 우리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시파보다도 오히려 우리가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저는…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요….”

나시파는 웃었다. 언제나와 같이 웃었다.

누군가를 조소하기 위한 웃음이 아니었다. 아주 어릴 적, 그녀가 자신이 지내던 성의 냄새와 성 바깥의 향기를 구분하지 못할 무렵부터 엷게 들러붙은 웃음이었다.

“사랑할 수가 없어…. 사랑할 수가… 아무리 해도… 도저히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어….”

그 무채색 웃음은 이제 점차 명도까지도 잃어가고 있었다.

“모두 다… 모조리 거짓말을 하는 걸… 그게 아니면서… 속내는 그게 아니면서… 여왕님도… 폐하도… 저를 처음 봤을 때… 제게 잘 부탁한다고… 거짓말을… 저를, 으응,”

나시파는 흐느끼듯 웃었다.

“저희 모두를 경멸했으면서….”

폐하는 숨을 멎었다.

“짐은,”

“응… 알아요… 알아… 폐하가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란 걸…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시파가 말했다.

“사랑할 수가 없어… 사랑할 수가… 사람을 도저히, 저는….”

다리가 망가진 사람이 억지로 지팡이에 의지해서 산을 오르듯, 필사적으로, 실로 안간 힘을 다해서 나시파는 말했다. 전했다. 전하고자 했다.

여왕 폐하가 입을 다물었다. 열었다. 다시 다물었다.

폐하는 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시파.”

“응… 장의님….”

나시파의 입술이 떨렸다. 그 입술도 이제는 창백했다. 추위를 느끼는 듯 덜덜 떨면서, 이제 완전히 흐릿해진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장의님… 보고 싶어요… 보고 싶었어요….”

“…….”

“거기 있나요…? 지금 거기에… 장의님… 장의님이 저를… 절 이해한다고… 이해해 주신다고, 제가, 저를 똑똑하다고… 똑똑한 아이라고, 그래서, 그래서 저는….”

아프다.

“저, 노력했어요…? 많이많이… 장의님이랑 행복해지려고… 사람이 살면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말씀해주셔서…? 저, 부끄러울 것 없다고… 부끄러워할 게 뭐 있느냐고, 가슴 쭉 펴고, 살라고… 허리, 굽어진다고, 장의님이, 장의님이 그 날 그렇게,”

심장이 아팠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나시파.”

내가 말했다. 내가, 내가 말했다.

“알아.”

내가 말했다… 말했다.

“안다. 아니까.”

나는 침을 삼켰다. 말의 목 위에 축 몸을 늘어뜨린 나시파를 향해서 말했다.

“이제 쉬어.”

“…….”

“눈을 감고… 잠에 든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아무튼 눈을 감으면, 그러면.”

왕국을 배신한 나시파가 저승에 올 수 있을까?

나시파에 의해 죽은 자들. 나시파로 인해 불행해진 사람들. 그런 이들이 있는데, 나시파를 저승에 불러들이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일까? 저승에서 마지막 임무에 투입되기 이전 이미 한 차례 결론 내렸던 이 문제를, 정작 지금 또 풀 수 없게 된 이유는 어째서일까?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전하고 싶었다. 죽어가는 이 순간만큼은 이 녀석을 안온하길 바라고 싶었다.

한때 함께 책을 읽고 감상을 교환했던 이 아이를 편애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든 도끼가 나시파의 머리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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