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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이 나라를 살림-250화 (250/261)

250. 그늘의 변경백 (7)

포위는 3배의 병력을 가졌을 때 시도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나 또한 몇 차례 저승 임무를 거치면서 알게 된 일이다. 검은 열도에서야 마을 자경단 3백 명이 포위섬멸진을 펼쳐 5천의 요괴를 요격하는 전승도 전해온다지만 현실은 비정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와 비슷한 병력을 가진 나시파는 우리를 포위할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성(城)은 사람 셋의 역할을 한다는 말도 있다.

성의 본질이 곧 인공적으로 쌓아 올린 지형임을 감안하면, 지형은 합연산이 아니라 곱연산으로 작용한다는 의미이다. 기병이 움직이기 어려운 고갯길 한복판에 장해물을 설치한 뒤 경보병으로 진을 치고 기다리는 것은 확실한 전술적 우위를 담보해주는 행동이었다.

“항복하실 건가요…?”

그래서일까, 나시파 변경백은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만약 그래주신다면, 그에 걸맞은 인도적인 대우를---.”

나는 똑바로 나시파를 올려다보면서 말을 잘랐다.

“네 수고를 줄여주마.”

“으응…?”

“항복은 하지 않아. 시간을 벌게 해줄 생각도 없어. 선배.”

“응, 똘똘아.”

선배는 곧바로 손을 들어 올리고, 휘둘렀다.

“전원!”

그 명령은 일순간에 퍼졌다.

“준비!”

병사들이 일제히 조총을 들어 올렸다.

지휘관들은 깃발을 들어 각기 다른 무리를 겨냥했다. 병사들은 그런 지휘관의 겨냥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적도들을 겨누었다.

“개전!”

총성이 터졌다.

◈          ◈          ◈

집총, 조준, 발포를 모두 합쳐 채 6초도 걸리지 않았다. 달려오는 동안 이런 상황이 벌어지리란 걸 전파해둔 덕이었다. 총포의 장전과 마음의 준비를 미리 마친 이상 명령과 실행 사이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억!”

“흐악!”

왕국민들의 그림자가 물질화한 것만 같던 나시파의 병사들도 총포에 맞자 과연 비명을 터뜨렸다. 튀어 오른 피는 우리들의 것만큼이나 붉어서 잎사귀와 가지를 천연색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혼란에 빠지지는 않았다.

“…….”

“…….”

우릴 포위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펼쳐져 있다는 뜻이다. 거기에 산림이라는 지형의 이점까지 누리고 있다. 안 그래도 명중률이 낮은 조총으로 쏘아 얻을 수 있는 성과에는 한계가 있었다.

“산개….”

그런 적들이, 나시파의 명령을 받고 흩어졌다.

“아하….”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는 것 같았다.

나시파의 웃음소리가 퍼져나감에 따라, 적도들은 엄폐물을 찾아 숨어들었다. 나무 옆에 붙고, 수풀 속에 웅크리고, 바위 뒤에 쪼그려 앉았다. 사아, 사아…. 잔바람이 두어 번 산을 스치고 지나가자, 짙은 그늘 속에 녹아든 적도들은 말 그대로 한데 뭉친 그림자처럼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흑마다!”

“흑마를 노려!”

조금 전 일제 사격에 참가하는 대신 조준에 시간을 들이던 병사들이 나시파가 타고 있던 흑마를 노려 쏘았다. 탕! 이들은 특히 숙련된 병사들이었고, 긴 시간을 들여 조준한 만큼 그 총탄은 같은 순간, 같은 지점을 향해 날아갔다. 히히히힝! 그늘 속에 숨기엔 너무 거대했던 흑마는 한 차례 몸부림을 치고는 쓰러졌다. 풀썩! 흙먼지가 물안개처럼 피어났다.

그러나 피어 오른 안개가 스러진 자리에 나시파는 없었다.

- 아하하하하….

웃음소리만 거죽처럼 벗어놓은 채, 나시파의 인영은 기병들의 그림자 속으로 스러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적들의 공세 또한 시작되었다.

탕……! 타당…! 사방에서 콩을 튀기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파파팟…! 뒤이은 화살 세례는 하늘에 깔린 짙은 구름과 맞물려 소낙비처럼 보였다.

“억!”

“히힝-!”

운이 나쁜 병사들과 그보다는 운이 좋았던 병사의 말들이 한데 얽혀 비명을 터뜨렸다.

그러나 역시, 혼란에 빠지지는 않았다.

“부대별로 움직여라!”

“시야를 좁게! 눈앞만 보아라!”

“앞서 전달했던 대로 행동한다!”

지휘관들이 외쳤다. 그 외침을 따라 병사들이 움직였다. 녹은 쇳물처럼 나뉜 병력들은 무수한 비수처럼 굳어졌다.

쏘아졌다.

“태산군! 좌우로 갈라져 길 열고 방패 들어!”

“산오 자작군은 총 놔! 활 들어! 우측으로 일제히 지원 사격!”

“성곡 자작군 말에서 내려! 우측 산을 접수한다!”

“신월 본군은 즉각 반전! 나시파 기병들을 박살낸다!”

하나의 덩어리로부터 무수한 조각들로 나뉜 병력들이, 각 지휘관의 지시를 받고 찔러 들어갔다.

“우오오오오!”

“찾아라! 쳐라! 죽여 없애라!”

살 얼어 수정 파편마냥 날카로워진 눈발이 사람의 살갗을 찢어발기듯, 아군 병력이 흩어진 적들을 전방위적으로 후려쳤다.

거기에 적들이 다시 반격하여, 북하산 고개 일대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난전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          ◈          ◈

나는 여전히 선배와 같은 말을 타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나시파 기병대를 향해 달려드는 신월군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을 뜻했다.

- 으응… 대단하네요….

또한 나시파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충분한 위치에 있음을 뜻하기도 했다.

- 대비했다는 거지요. 아하… 설마 이걸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산 고개여서인지, 타고난 특질 때문인지, 나시파의 목소리는 한 곳에서 발신되는 것이 아니라 사방에서 반사되어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은 채 답했다.

“설마 이런 식일 줄은 몰랐었지.”

- 으흠… 그렇다면…?

“하지만 병력을 조달해올 거라고는 생각했어. 포위를 할 거라고도 생각했고. 그럼 남는 건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뿐이지. 과연 어디서 어떻게 병력을 조달해올지 고찰하는 게 아니라.”

- 우선은 눈앞의 문제에 집중한다… 이 또한 장의님답네요….

나시파의 기병대는 전원 흑마로 이루어져 있었다. 더불어 기병대 전원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걸쳤다.

그리하여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시파의 기병대는 커다란 덩어리로 보였다. 기병대에 속한 개개인은 오직 갈기와 옷자락의 펄럭임이 낳는 윤곽의 명멸, 드물게 드는 볕으로 인한 눈동자의 번뜩임만으로 구분되었다.

- 그뿐 아니라, 지금 이 상황도 놀라워요….

날 뒤덮었던 습한 느낌이 조금 가셨다. 그와 동시에 선배가 살짝 몸서리를 치는 것이 느껴졌다. 나시파의 시선이 선배에게 옮아간 것이다.

- 으음… 음… 아무래도 장의님을 넘겨줄 생각은, 없는 것 같네요….

선배가 비장하게 외쳤다.

“당연하지! 불세출의 영웅을 배신자의 손아귀에 넘겨줄 것 같으냐!”

- 뭘 약속 받으셨나요…?

“내가 약속 받은 것은 왕국의 영광뿐이다!”

- 정말…. 그렇게 사람들 눈치만 보시니깐….

“거기냐!”

마상 장전을 완료한 선배가 조총을 들어, 쏘았다. 탕…! “흐억!” 나시파 기병대의 말 한 마리가 기수와 함께 고꾸라졌지만, 나시파는 역시나 그 자리에 없었다.

- 맵고 짠 걸 즐겨 드시는 거예요….

나시파의 목소리는 방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처럼 평온했다.

선배가 조총을 휘둘러 식히면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니가 싱겁게 먹는 거야, 미친 년아.”

- 그건 좀 이상한 말이네요….

“똘똘이는 궁금하지 않다고 했지만 나는 궁금해졌다. 대체 이런 바퀴벌레들은 어디서 모아온 거냐?”

- 바퀴벌레라… 너무한 말씀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이니 어쩔 수가 없네요….

나시파는 웃으며 말을 흘렸다.

- [그림자 군세]… 라고 불러주시면 된답니다….

“너다운 이름이네. 여러 가지 의미로.”

- 당신한테 배운 거지만요….

“그거야말로 좀 이상한 개 헛소리고.”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나와 선배가 속한 기병대는 나시파의 기병대와 충돌했다.

보통 기병과 기병이 맞부딪히면 폭음이 터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시파의 기병대는 마치 손아귀처럼 펼쳐지며 우리들을 맞아 들였다. 북…! 선두를 달리던 이들이 나시파 기병대 일부에게 기창을 꽂았지만, 일부에 그쳤다는 것은 그 얄팍한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춤추는 그늘에 뒤섞여 나시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무튼, ‘바퀴벌레’라는 표현이 맞아요…. 결코 볕이 드는 곳에서는 가슴을 편 채 살아갈 수 없는… 왕국에 외면당한… 왕국을 증오하는 이들이에요….

선배가 코웃음을 쳤다.

“그런 이들을 모아, 졸여, 빚어냈다 이거로군.”

다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아니요, 저는 그저 모았을 뿐…. 졸여내고 빚어낸 것은 왕국이지요.

안개 속에서 숨을 쉴 때 비강을 적시는 물기처럼 듬성듬성 느껴지는 웃음소리였다.

- 아시다시피 왕국은 그리 좋은 나라가 아니었으니까요….

그 웃음소리도, 목소리도 여전히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들려왔다.

그래서 그것들은 나와 선배를 향한다기보다 땅과 하늘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을 향하는 것만 같았다.

- 항상 대륙의 속국을 자처해왔지요…. 그렇게 고개를 수그렸으면 얻는 것이라도 있었어야 할 텐데 그런 것도 없이… 복종을 위한 복종… 예속을 위한 예속… 대륙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신전 기둥을 뽑아가면서 대접하고… 돌아가는 그들에겐 아직 보조개가 없어지지도 않은 아이들을 남녀 가리지 않고 잔뜩 안겨주었어요….

“…….”

- 검은 열도에게는 어떤 취급을 받았던가요…? 대동란 이후로는 심심하면 들쑤셔보는 개미굴 취급을 받아왔지요…. 무력으로는 당연히 이길 수가 없고 문화로도 압도 당한지 오래… 그럼에도 왕국의 귀족들은 검은 열도의 명가들을 검둥이라며 깔보고 있지요… 언제까지고 현실을 외면한 채 자존심만 살아서 말이에요….

“역사 공부를 하고 싶나?”

- 대동란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대동란 당시 성웅(聖雄)이라 불렸던 영웅을 당대의 국왕은 어떻게 대했던가요…? 질시하고, 시기하고, 탄압하고, 결국 사지로 몰아 죽게 만들었어요…. 구국의 영웅을 그렇게 대접하는 나라가 이 세상 어디에 있으려나요….

“역사 공부를,”

소리 없이 다가온 나시파 기병이 쑥 창을 내밀었다. 전조도, 동작도 없는 그 찌르기를, 캉…! 선배는 말 채찍으로 튕겨 보냈다. 뒤이어 장갑 낀 손으로 조총의 총부리를 잡고는 손잡이로 기병의 턱을 후려쳐 낙마시켰다.

“하고 싶냐고!”

- 공부씩이나 할 필요가 있을까요…?

나시파는 웃었다.

- 대동란 때에도, 판 제국이 쳐들어왔을 때도, 왕을 비롯한 고위 귀족들부터 민초들을 버리고 도망칠 궁리부터 하는 나라…. 공부를 해야 한다면, 그렇네요…. 당시 귀족들이 검둥이라고, 야만인이라고 멸시하던 흑열도 명가 연합의 수장이 그 사실을 알고 기함했다는 것 아시나요…? 도대체 최후를 함께하긴 커녕 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성주가 어디에 있느냐고… 그건 확실히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니까요….

“…….”

- 여기는 그런 나라지요….

‘그런 나라’라는 단어는 마치 똥 무더기 주변을 날아다니는 파리처럼 귓가에 윙윙거리는 것만 같았다.

- 사기꾼과 거짓말쟁이만 이득을 보는 나라…. 관념과 아집에 사로잡혀 현실을 보지 못하는 나라…. 그저 어떻게든 상대방의 말꼬리만 잡고 늘어지는 나라…. 실제로 일을 처리하는 것보다도, 그저 그 자리를 어떻게 잘 얼버무리는지가 더 중요하게 평가 받는 나라…. 시궁쥐의 이빨 같은 권력만 얻어도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물어뜯으려고 드는 나라….

둔기 대신으로 사용한 탓인지 조총의 총렬이 다소 휘어졌다. 선배는 그것을 재장전하여 사용하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다. 총을 옆으로 내던지고 활과 화산을 들어 올렸다.

- 건국된 순간부터 잘못 만들어진… 으응, 어쩌면 그 이전부터… 다시 그 훨씬 이전부터… 애초에 잘못된 민족, 아니, 잘못된 부족을 시조로 둔 최악의 나라였던 거예요….

선배가 시위를 당겼다. 핑…! 날아든 화살이 역시 기병 하나의 목을 꿰어 떨어뜨렸다.

- 그런 쓰레기 같은 나라가, 쓸데없이 역사만은 길었어요.

그럼에도 나시파의 목소리는 멎지 않고 이어졌다.

-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기회주의자와 겁쟁이는 오래 사는 법이니까요…. 다만 그렇게 비굴하게 연명한 결과… 술을 입에 달고 산 노인네의 내장처럼 이 나라는 수많은 종기들을 낳았지요…. 울룩불룩 두드러진 역사의 굴곡마다 그만큼의 그림자가 생겼고요…. 그 그림자가 이들이니, 아아, 보세요….

오히려, 커졌다.

- 왕국이여, 그대가 낳은 자손들이 이 자리에 있어요!

산에 사는 벌레들이 동조하듯 울어 젖혔다. 찌르륵, 찌륵! 찌르르륵! 아군 기병들이 주춤하여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기병들의 눈에는 각양각색의 복장을 갖춘, 왕국 어디에 갖다 놓아도 어색하지 않을 복장을 차려 입은 적도들이 자신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는 모습이 비쳤으리라.

나시파는 그런 이들의 양 어깨를 뒤에서 살며시 짚고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 저들이 많아 보이나요…? 아니에요…. 저들은 이 땅에서 신음하던 이들 중에 극히 일부에 불과해요. 알잖아요…. 이 나라의 지배를 화원의 유희처럼 즐기던 이들의 뒤에는, 늘 그것을 고문실 속의 시간처럼 감당하던 이들이 있었다는 것을요….

“…….”

-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북방의 침공은, 그렇네요… 겨우 이 압제를 벗어 던질 수 있는 기회처럼 여겨지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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