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249화 (249/261)

249. 그늘의 변경백 (6)

나시파 변경백이 왕도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나를 가로채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들을 앞지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 병력은 전원이 기병이다. 대륙 소설에 등장하는 비룡 같은 걸 갖고 오지 않는 이상에야 절대적인 기동력 우위를 확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상대적인 기동력 우위를 확보할 수는 있다.

“대동하는 병력의 숫자를 줄이면 돼.”

병력이 줄어든다고 없던 속도가 생기지는 않지만, 늘어날수록 있던 속도가 줄어들기는 한다. 상대보다 병력을 줄이면 이 손실도 따라 줄일 수가 있다….

“까놓고 말해서 똘똘이, 니가 여왕 폐하를 탈환하기 위해 했던 짓이지.”

선배는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건 곧 나시파, 그 녀석이 대동할 수 있는 병력이 한정되어 있음을 의미해.”

선배의 분석이 이어졌다.

“아마 200명… 아니, 그 녀석이니까 400명 전후려나? 우리 병력의 10분의 1 가량이면속도로 우리들을 앞지르기에는 충분하고, 단독으로 작전을 벌이기에도 충분한 숫자. 그렇지만 절대로 정면으로 부딪혀올 수는 없는 숫자.”

우리는 4천의 병력이 하나의 단위를 이루어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선배도, 선배가 이끄는 가신들도, 다른 영주들도 그걸 강정마냥 똑각똑각 잘라먹게 해줄 바보는 아니다.

“알고 있겠지만, 바로 그 부분이 문제가 돼.”

선배는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그 녀석 성격에 불리한 싸움을 걸어올 리는 없어. 뭔가 수작을 부릴 테고 그 수작은 아주 치명적일 테지. 그치만 그 수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화포를 가져오려나? 하지만 1초라도 빨리 움직여야 할 상황인데 화포 같은 걸 들고 올 수는….”

“거기에 대해서는 짐작하는 바가 있습니다.”

나는 탈출 도중 벌어졌던 일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 녀석은 저와 폐하를 쫓을 적에 화포를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그 화포는 추적을 개시한 시점에 들고 온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전에 이미 그 자리에 배치해둔 물건이었습니다.”

“…….”

“그 녀석은 왕국 바깥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내부의 배신자지요. 이는 녀석이 왕국을 배신하기 전에 준비할 시간이 충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굳이 스스로 준비하지 않았더라도, 왕국에 이미 존재하던 것들을 자신의 장기짝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군.”

선배가 말을 받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돌이켜 보면 우릴 추적하는데 동원된 병사들의 숫자도 그랬습니다. 양평에서 나왔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병사들이 적재적소에 모여들었어요. 사정상 하나의 덩어리로 뭉쳐 움직일 수밖에 없는 우리와 달리 전장을 ‘넓게’ 쓸 수 있는 겁니다.”

전장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전장 위에서 전체를 내려다본다. 그렇게 상황의 큰 줄기를 파악한 채 걸맞은 지시를 내려 죄어들어간다.

큰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저승 입주자 시야 신세를 져왔던 나는 그것이 얼마만큼 커다란 이점을 부여해주는지 알고 있었다.

“똑같은 일을 이번에도 하려고 들 겁니다.”

나는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녀석이 나시파 변경백령에서 직접 대동할 병력은 선배가 예상한 것처럼 400을 넘기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그렇군.”

선배는 내가 하려는 말을 이해했는지 침음성을 내뱉었다.

“미리 침투시켜 둔 병력들이 있으리란 거구나.”

“예. 언젠가 쓸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서 곳곳에 씨앗을 뿌려놨겠지요.”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것들을 올가미 삼아, 우리를 낚아채려 할 겁니다.”

선배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총 지휘관의 그러한 수긍은 곧 구체적인 주의 사항이 되어 군 내에 퍼져 나갔다.

그래서 [그 일들]이 벌어졌을 적에, 우리가 이끌던 군세는 곤혹했을지언정 당혹하진 않았다.

“각하! 전방에 유랑민 같은 몰골을 한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헐벗고 깡마른 이들이었다. 옷은 헤져 있고 얼굴에는 생기가 없다. 대략 백에서 백오십 가량 되는 그 무리는 우리가 넘으려던 고개 한복판에 쭈그려 앉아 달 없는 밤의 우물처럼 시꺼먼 눈동자로 우리를 노려보았다.

“공작 각하! 우측 측면에 산적 같은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말처럼 대충 꿰맨 멧돼지 가죽을 걸친 일단의 무리도 드러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스르륵 ‘돋아난’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기름을 머금은 텁수룩한 수염은 정물화 속에 고정된 무기물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전혀 숨을 쉬지 않는 것만 같았다.

“각하, 좌측 측면에 야인들 같은 무리가….”

“각하! 전방 너머에….”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터전을 잃고 헤매는 유민들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들. 긴 시간 산적질로 끼니를 해결해왔을 것처럼 보이는 이들. 한 손에 북을, 다른 손에 장구를 든 채 팔도를 헤매며 춤을 추었을 것만 같은 사당패의 무리. 논자의 경전을 든 채 대륙 성현의 말씀과 고대 시인들의 시구를 읊으면 그 이상 어울릴 수 없을 법한 선풍도골을 가진 학자들의 무리까지.

더 있었다. 골목 귀퉁이에 거적을 깔고 엎어져 있으면 아무도 특이하게 여기지 않을 것 같은 걸인 떼거리에, 봇짐을 들쳐 메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소매로 닦아 내는 장돌뱅이의 무리, 심지어 달의 여신의 말씀을 전하면서 하루 일용할 양식을 벌었을 것만 같은 탁발신관들의 행렬, 아예 대놓고 왕국 병사처럼 차려 입은 이들과 번듯한 농민처럼 차려 입은 이들까지.

“…….”

“…….”

마치 모든 왕국민들 중에서 무작위로 제비를 뽑아 추려낸 것만 같은 이들. 더 정확히는 그런 왕국민들이 늘어뜨린 그림자 같은 자들이 수십, 수백, 수천을 이루어 우리들을 포위한 것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

이미 동이 트고 좀 지난 시각이었음에도, 기이할 만큼 볕이 들지 않은 지상은 짙디짙은 쪽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곳에서 불뚝 불뚝 솟아난 그들은 하나같이 시체처럼 창백한 낯빛과 빛 한 점 없는 눈동자로 말없이 우리를 응시했다.

침묵에 색깔이 있다면, 그들의 침묵은 시커먼 묵빛이었다.

“…….”

말들의 달음박질이 차츰 줄어들다가, 이윽고 멈추었다.

처음에 모습을 드러냈던 유랑민들의 발치에 널린 날카로운 쇠침들, 그 너머에 놓인 거마창(拒馬槍)들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는 했다.

“뭐하는 놈들이냐!”

지휘관 중 하나가 외쳤다.

우렁찬 고함이었지만, 그 속을 이루는 심지는 주변에 들어찬 불길함에 잠식당해 떨리고 있었다.

“…….”

그리고 우릴 포위한 자들은 그 외침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반응했다.

“…….”

“…….”

스릉, 스르릉. 철컥, 철커덕…. 쇠와 가죽이 스치면서 나는 소리, 금속과 금속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초목을 울렸다. “히힝!” “히히히힝!” 불온한 응시 속에 서로를 두리번거리던 말들이 그 서슬에 놀라 투레질을 했다. “까아악!” “까악, 까아아악!” 검은 털을 가진 새들이 일제히 가지를 박차 날아오르고, “찌이… 찌이이….” 이름 없는 벌레들이 광소를 터뜨렸다.

적들이 무기를 꺼내든 것이다.

복장과 몰골은 각양각색임에도 그 무기의 체계는 소름끼칠 만큼 통일되어 있었다.

어설픈 농기구가 아니라 제대로 정련된 철로 만들어진 칼과 창, 들짐승의 뿔과 산짐승의 힘줄, 가물치의 부레를 써서 만들어진 활.

물론 조총들도 있었다. 수백 정 정도였지만 우리가 포위되어 있다는 점, 조총을 든 이들이 한 군데 뭉쳐 있는 게 아니라 무리마다 수 명씩 흩어져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도저히 상황을 낙관하기 어려웠다.

“이, 이놈들이….”

처음에 소리를 높였던 지휘관이 노호하며 활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몸을 크게 트는 그 동작은 무기를 거머쥐는 전사가 아니라 그물에 얽힌 짐승을 더 닮아 있었다. 그 또한 그것을 깨달았는지 활시위에 화살을 걸지 못한 채 어깨를 늘어뜨렸다.

“언제부터일까.”

선배가 툭 던지듯이 말했다.

“왕도를 탈환했을 때? 왕도가 함락당했을 때? 왕도 방위군이 전멸 당했을 때? 북벽의 문을 열고 선봉군을 맞이했을 때?”

“아예 그 이전, 변경백 작위를 계승한 순간부터였을지도 모르지요.”

대답하면서도, 나는 어쩌면 태학관에 다닐 무렵부터가 아닐까 생각했다.

비은공주가 흑구들을 사략함대로 부리는 모습이 극히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그 녀석이 왕국 곳곳에 간자들을 심어 놓고 자그마한 조직들을 사유화하여 거느리는 모습 또한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어느 쪽이든, 이게 전부일 겁니다.”

미리 잠입시켜둔 보병들을 긁어모아, 우리를 붙드는 그물로 사용한다. 이는 전술보다는 묘기에 가까운 것이며, 여러 차례 시도할 만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 순전히 숫자만 고려해도 이 이상을 상정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 …솔직히 지금 이것도 너 아니었으면 전혀 예측할 수 없었겠지만.”

“저에 대한 칭찬은 다음으로 미루지요.”

“알았어. 이것만 뚫으면 왕도까지 일직선. 뚫을 수 없다면… 뭐 적어도 너에 대한 칭찬은 영원히 미룰 수 있겠네.”

“역시 그냥 지금 칭찬하실래요?”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 없겠다. 보렴.”

선배가 중얼거리듯 말한 그 순간, 구름이 태양을 삼켰다.

그렇지 않아도 두터워서 볕이 드는 걸 방해하던 구름이었다. 그것에 잡아먹힌 태양은 투명한 물고기의 위장 속 내용물처럼 홀로 지저분한 천연색을 띠었다.

태양은 초목을 키우고 동물들을 기르는 만물의 어버이가 아니라 달의 여신 교단 중에서도 원리주의자들만이 고집하는 해석, 죄인들이 영원히 불타면서 식도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비명을 질러대는 지옥처럼 비추었다.

나무의 색감이 짙어지고, 땅의 빛깔이 질어졌다.

“응….”

말발굽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말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병에게 뒤를 잡힌 게 아니라 그 그림자에 짓밟혀 멈추어선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유령 군마처럼 소리 없이 그 자리에 선 기병대의 선두에는, 역광을 짊어져 윤곽만 희고 나머지는 온통 새카맣게 보이는 여인이 옆으로 앉아 있었다.

그 여인이---어쩌면 그 여인의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장의(掌議)님… 응, 오랜만이네요….”

장의.

태학관 생도들의 대표.

줄곧 선배가 맡았다가, 선배의 졸업 이후에는 내게 잠시 넘어왔던 그 직함을 나는 잠시간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우리 모두 태학관은 졸업했잖아.”

나는 말했다.

“그러니 그냥 이름이나 직위로 부르는 게 맞겠지. …나시파 변경백.”

대답 대신 웃음이 흘러 내렸다.

“응… 후후….”

그 웃음 역시, 말 위에 탄 소녀의 입이 아니라 그것이 늘어뜨린 그림자에서 넘쳐흐르는 것만 같았다.

“우후후후후….”

잔소가 방울져 내린 자리마다 어금니의 움푹한 홈에 스민 설탕물처럼 질척한 내음이 남았다.

“정말이지 장의님은… 언어 사용에 엄격하시네요….”

바람이 불었다. 두텁던 구름의 살갗이 아주 약간 흩어지고, 그 틈으로 햇볕 한 줄기가 벼락처럼 일순간 내리 찍혔다.

역광이 벗겨지고, 그림자가 녹았다.

“그런 장의님을, 저는….”

그리고 보통의 말보다도 한 배 반은 커다란 흑마 위에, 새까만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자그마한 소녀가 미소를 띤 채 앉아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만나고 싶었답니다….”

당대의 나시파 변경백.

한 때의 내 후배, 북벽의 수문장.

카한에게 붙은 왕국의 배신자가 언덕 위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그래.”

나는 답했다.

“나는 되도록 만나고 싶지 않았어.”

나시파는 웃었다. 그 웃음에 이끌린 것처럼 다시 구름이 두터워지고, 볕이 줄어들어, 그림자가 불어나, 그녀의 얼굴은 다시금 역광에 감싸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만 한 가지.

습한 그늘 같은 시선이 나를 뒤덮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          ◈          ◈

양고 자작령-왕도 사이.

북하산 고개 인근.

아군.

전투 가능 인원 4137인.

전원 기병.

총 지휘관 신월공. 통수권자 여왕 폐하.

적군.

전투 가능 인원 약 3400인 추산.

경보병 약 3000인, 기병 약 400인 추산.

총 지휘관 나시파 변경백.

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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