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246화 (246/261)

246. 그늘의 변경백 (3)

“…….”

때는 새벽이었다.

말이 푸르르, 숨을 토하면서 초야를 달릴 적에 선배의 푸른 입김도 내 목덜미를 타고 전해졌다. 꾸욱. 기분 탓인지 몰라도 내 등 뒤로 말을 모는 선배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선배의 말 앞자리에 탔으며 그래서 선배가 짓는 표정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배의 숨소리, 체온, 근육이 긴장한 정도, 무엇보다 침묵의 길이를 통해서 그녀가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그려낼 수 있었다.

나는 선배를 잘 알았으니까.

“똘똘아.”

선배는.

“말해 두겠는데, ‘혹시 나 천잰가?’ 같은 생각은 안 했단다.”

지금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셔야죠. 대가리만 붙어 있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생각이니까요.”

“말뽄새 보게.”

“그러니까 제가 쫌.”

조금 전과 비슷하게 언뜻 여상스럽게 느껴지는 한담이 오갔다.

이 자리가 태학관에 부속한 별채였더라면, 늦여름의 햇살이 길게 늘어져 후덥지근한 잔향을 남기는 시간대였더라면, 장차 나라를 짊어질 것이라 기대되는 인재들이 시답잖은 소리를 하면서 청춘을 즐기는 한 풍경일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는 태학관의 별채가 아니었다. 나와 선배 역시 태학관의 생도가 아니었다. 우리들의 청춘은 오래전에 저물어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각자의 지위를 딛고 선 어른들이었다.

그 한 명이 말했다.

“그래, 똘똘아. 그 ‘대가리만 붙어 있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생각’을 떠올렸다면, 이야기가 빠르지. 어때? 평화를 위한 특사 노릇, 해볼 생각 없어?”

“솔직히 나쁘진 않지요.”

나는 인정했다.

“선배가 막사에서 하신 말씀에는 진실이 깃들어 있습니다. 전장에서 가장 먼저 죽는 것은 지휘관이 아닌 병사들입니다. 그 병사들의 반려와 아이, 부모가 다음으로 죽지요. 전장에서는 가장 책임 없는 자들부터 죽어가는 겁니다.”

나는 여왕 폐하가 손수 그 목숨을 거두어야 했던 병사들을 생각했다.

그 다섯 명의 목숨. 다섯에 이어진 수십 명의 인생. 거기서 비롯되는 수천 명의 삶에 대해.

“당장 여기까지 오는 동안 1만의 병력들 가운데 5천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가장 기적적인 전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 생각의 규모를 1천 배로 늘렸다.

“왕도로 돌아가 군세를 규합하고 또 한 차례 신화적인 대승을 거두었다고 해도 그 2배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은 각오해야겠지요.”

다시금 그 규모를 2배로 늘렸다.

“문서 위에는 [5천의 손실로 약 3만의 적도들을 혁파하고, 다시 1만의 손실로 수십만의 적을 물리쳤다]고 기록될 그 일이, 상상해보면 정말이지 아득한 노릇 아닙니까.”

선배는 말이 없었다.

하므로 내가 계속 말했다.

“그러니 제가 특사 역할을 맡는다면, 그로 인해 화평을 맺을 수 있다면, 충분히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감히 제가 어떻게 그런 역할을 거부하겠습니까?”

“…….”

“어차피 저는 [여왕 폐하를 구한다]는 [목적]을 달성한 상태입니다. 이 다음의 생애는 그저 여분이지요. 그 여분을 써서 수만 명의 죽음을 막을 수 있다면 이득 보는 장사 아니겠습니까. 마치 성 제국의 시황제에게 자신의 목을 내밀어 백성들이 학살당하는 걸 막으려던 윤왕의 고사처럼 말입니다.”

“그렇지?”

그제야 선배가 말했다. 그 목소리 속엔 과장된 밝음이 섞여들어 있었다.

“휴, 역시 우리 똘똘이! 이야기가 빨라, 아주. 좋아. 그러면 왕도에 돌아가는 대로 특사 역할을….”

“문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지요.”

나는 자르듯 말했다.

다시금 선배가 입을 다물었고, 나는 그런 선배를 향해 말했다.

“바로 조금 전 막사에서도 그랬습니다만 우리는 지금 야인들을 [하나의 무리]라고 인식합니다.”

“…….”

“절대군주 카한이 이끄는 일사불란한 무리. 완전한 통솔력 하에 단합된 하나의 늑대 떼. 그런 인식은 우리가 그들을 논하길 편하게 만들어주지요. 하지만 모든 편한 논리가 그러하듯 그런 인식은 사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나는 내 안에 고인 새벽 공기를 내뱉었다.

“두동천에서 그 야율천인가 하는 놈 심문할 때 알아내셨다면서요. 부족장들 사이에 경쟁의식이 있었고 그것이 서로에 대한 통수로 이어졌다고.”

지금껏 왕국은 긴 시간 들여 그들을 부족 단위로 잘근잘근 분질러 놓았다. 그 수작질은 카한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먹혀들어 갔다.

“저 야인들은 서로 다른 부족들의 연합체입니다. 적 앞에서 협력하지만 공을 놓고는 경쟁하지요.”

그러니 당연하게도.

“실패를 앞에 놓고는 싸울 겁니다.”

마치 우리들처럼.

◈          ◈          ◈

“빌어먹을!”

“대체 선봉을 맡았던 그놈들은 무엇을 한 것이야!”

“20만! 무려 20만이었다! 저 흙 파먹고 살던 허수아비가 아니라 굴강한 전사들이 자그마치 20만이었어!”

“그걸 말아먹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명색이 여섯 은빛 부족 중에 떡하니 이름 올린 놈들이!”

“야율천? 뭐? 천하장사라고? 하! 허명이 톡톡히 드러났구만 아주!”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백부님. 나는요. 그 자식이 처형용 대검을 휘두르고 다닐 적부터 마음에 들지가 않았어요. 그 대검이 뭐에 쓰던 물건입니까? 신 제국의 사형집행인 새끼들이 우리 동포들 참수할 때 쓰던 물건이에요. 그런 흉한 걸 무기라고 들고 다녀요? 완전히 개념이 없는 거죠, 개념이.”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그런 놈이 선봉을 맡았으니 원!”

“게다가 세마, 그 자식은 도대체 뭐야? 월왕을 빼앗겼다고?”

“대체 뭘 한 거야, 그놈들!”

“망신이야, 망신… 다시없을 망신을 당했어! 그 신 제국 놈들에게조차 당하지 않았던 창피를 이 조그만 나라의 쓰레기들에게 당했다고!”

◈          ◈          ◈

“으흠. 그거 아주 고무적인 상상이네.”

선배는 역시나 과장된 쾌활함을 두른 채 말했다.

“요컨대 이거잖니, 똘똘아. 적들이 이대로 알아서 분열할 수도 있다! 그러게 말야.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어? 그거야말로 싸우지도 않고 이기는 길이니---.”

“그리고 찾아내겠지요.”

이 또한 당연하게도.

“누가 그 실패의 책임을 져야 하는지 말이에요.”

마치 우리들처럼.

◈          ◈          ◈

“모두 잠시만 진정들 하시오.”

“흠?”

“뭐야. 수염 긴 양반. 뭔가 할 말이 있소?”

“그렇소. 나, 은빛 부족 중 하나를 이끌고 있으며 이름보다는 수염 긴 자라 불리는 몸이 할 말이 있으니 들어주시오, 들판의 형제들이여. 내가 아주 차근차근 생각을 해보았다 이 말이오. …그리고 그 결과 느낀 것인데 말이오, 무언가 이상하지 않소이까?”

“무엇이 이상하다는 거요?”

“일들이 벌어진 장소를 보자 이 말이오.”

“장소?”

“그렇소. 야율천의 부족이 몰살당했다는 곳도, 세마가 월왕을 빼앗긴 곳도 바로 이 근방이 아니오?”

“이 근방이라면….”

“어딜 말하는 거겠소. 바로 여기. 월국의 북토. 나시파 변경백령 말이오.”

“…….”

“우리에게 붙겠다 선언하기 전까지만 해도 월왕이 다스리던 땅의 지척에서, 믿기 어려운 일들이 두 차례나 벌어졌다… 어떻소. 참으로 공교로운 일 아니오?”

◈          ◈          ◈

“오! 그것도 아주 멋진 상상인데!”

선배는 이번 역시 과장된 명랑함 속에서 말했다.

“그럼 뭐야. 나시파 변경백령이랑 야만인들의 본군이랑, 아예 한 판 뜰 수도 있다 이 소리네? 히야. 꼭 이루어지면 좋겠다. 정말이지 손 안 대고 코 푸는….”

“예, 그러면 좋겠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을 테지만요.”

◈          ◈          ◈

“듣고 보니 그렇군.”

“확실히 그래. 아니, 사실 나도 전부터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제가 진짜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요, 백부님. 저는 그 년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월국에서 우리 동포들을 가장 많이 죽인 게 그년의 혈족들 아니겠습니까? 북벽에서 맨날 서로 칼질하면서 살았잖아요.”

“그러게나 말이야!”

“애초에 땅 파먹는 연놈들을 믿는다는 게….”

“하모하모! 들판의 형제자매가 아닌 것을 어떻게 신뢰할 수가 있겠느냐 이거야.”

“솔직히 여기서 그 생각 안 한 부족장이 어디 있겠소?”

“내 말이. 카한께서 신뢰를 주시니 다들 그러려니 했던 거지….”

“만약 수염 긴 자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뭐 십중팔구 사실이겠지만, 그 월국의 배신자년이 사실은 월국을 배신한 게 아니라 우리를 배신한 거다 이 말이겠군.”

“뭐 모르지. 배신하고 또 배신한 걸지도.”

“하여간 땅 파먹는 연놈들이란 믿을 수가 없다니까!”

“어… 그렇지만 여러분. 그 나시파 변경백은 카한의 신뢰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년의 배신을 받아준 것이 카한이시니, 여기에 대한 이의제기는 곧 카한에 대한….”

“음….”

“크흠….”

“아니 뭐 카한께서 잠시 눈이 흐려지실 수도 있지….”

“방금 누가 한 말이오?”

“아무도요. 음… 아무튼 그 나시파 변경백에 대한 이야기로 초점을 돌리도록 합시다.”

“그러게 말이오. 말이 헛돌았군.”

“거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가지고….”

“아무튼! 우리는 카한이 아니라 나시파 변경백을 믿을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옳소!”

“내 말이 그 말이오. 바로 그 말이라고.”

“그럼 우리들의 총의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군. 자, 그럼 카한께 말씀을 올리러 갑시다. 나시파 변경백에게 염치가 있다면 우리 전사들이 아니라 나시파 변경백 스스로가 자신의 신의를 앞장서서 보여야 할 것이라고 말이오…. 그런데 다들 얼굴이 왜 그러시오?”

◈          ◈          ◈

“선배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녀석을 아시잖아요.”

나시파 변경백.

북벽의 열쇠지기.

달을 모욕한 귀족.

배신자.

왕국의 적.

나의 후배이자, 선배의 후배인 그 아이.

“그렇게 허무하게 쓸려나갈 녀석이 아니라는 것도, 아시잖아요.”

마치 우리들---나와 선배처럼.

◈          ◈          ◈

“음…?”

“무슨 소리요? 얼굴이 왜 그러냐니?”

“그러게 말이오. 그런 말을 꺼내는 당신이야말로 왜 그리 낯빛이 납처럼 시허연… 쿨럭.”

“콜록, 어, 음, 어, 왜 이리 세상이 흔들리는….”

“백부님. 사실 조금 전부터 드리고 싶었던 말씀인데요. 아까부터 제가 대체 왜 이렇게 머리가 어지러운지 모르겠네요. 쿨럭, 어, 아니 진짜, 왜 이러지, 자꾸 막 뭔가… 머리가, 어질어질한 게…….”

“쿨럭… 켁, 음, 어… 아니… 왜 이러는, 입에서 피가.”

“어…….”

“…….”

“…….”

“…….”

“…….”

◈          ◈          ◈

“그 아이가 정확히 어떤 수단을 쓸지는 모르겠어요. 설득을 할지, 협박을 할지, 아니면 아예 그런 여론을 역이용할지, 전혀 다른 방법을 쓸지…. 저는 늘 그 녀석이 뭘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예측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나는 말의 목에 바싹 몸을 붙이면서 말했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쓰던 간에, 잠자코 숙청당하진 않을 겁니다. 그뿐일까요, 그 상황을 뒤집어엎고 당분간의 주도권까지도 장악할 겁니다.”

“…….”

“그리고 그런 방식의 주도권 장악에는 세금이 붙게 마련이지요.”

나는 선배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선배의 긴장을 느낄 수가 있었다.

“특사로 온 저를 사로잡는 정도로는 치를 수 없을 만큼 비싼 세금이 붙을 겁니다.”

“해서?”

선배는 말했다.

“눈에 보이는 공적이 필요할 거다 이거지? 감히 아무도 부정할 수가 없는, 아니, 그걸 넘어서, 선봉군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을 만한 공훈을 되도록 빨리 세워야 할 거다 이 말이지?”

“예.”

“그럼 뭐 이야기는 끝났네. 왕도로 돌아가서 전투 준비를 해야지 어쩌겠어. 그러니까,”

“가령, [차후 특사로 온 저를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왕도로 돌아가던 도중에 저를 사로잡는] 식으로 말이에요.”

나는 끝까지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선배가 [아슬아슬하게 선배가 감수할 수 있는] 손실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똘똘아, 나는….”

“동시에, [선배가 기꺼이 감수하고 싶은 손실]이기도 할 겁니다.”

선배가 혀를 찼다.

그 혀를 차는 소리가, 마치 스릉, 칼집에서 칼을 빼는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선배.”

나는 선배를 돌아보았다.

“제가 두려우시죠?”

정적이 흘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