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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이 나라를 살림-244화 (244/261)

244. 그늘의 변경백 (1)

우리가 여왕 폐하를 탈환하는 동안, 선배도 놀고 있진 않았다.

“격전을 치르신 모양이군요.”

나는 절반가량 줄어든 병력, 곳곳에 뻗어 있는 병사들과 매캐한 화약과 피 냄새, 그것들을 보고도 탓하지 않는 지휘관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응. 죽는 줄 알았어.”

막사에서 우릴 맞이한 선배도 잔뜩 지쳐 있었다. 땀에 흠뻑 젖은 빨랫감을 비바람에 열흘 정도 맞힌 다음에 진흙탕에 던져 놓으면 지금 선배와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그, 선봉군 새끼들 나머지 절반 있지…. 그걸 싸그리 다 회 쳐 버렸거든. 몇 가지 작전을 조합해서 야습한 건데도 두동천 대첩 때처럼 잘 되진 않더라고.”

“그래도 2배의 병력을 상대로 승리하신 것 아닙니까. 역사에 남을 만한 엄청난 위업입니다.”

“그치? 그치. 에휴, 왜 나까지 답지 않은 짓을 하고 지랄이람.”

선배가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1만 4천 병력을 상대로 7천 병력을 부딪친다는 건 아무리 승산이 있다고 한들 선배가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실용주의자는 곧 안전주의자이기도 한 것이다.

“필요한 투자를 하신 겁니다.”

이런 위업 하나하나가 개국군주를 목표하는 자에게는 다시없을 재산이 된다. 선배 역시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알아. 그래도 지치니까 그냥 저기 양온에 가서 뜨끈한 온천에 몸이나 지지고 싶고 막 이래.”

“투자에 성공하셨지 않습니까. 그 성공에 몸을 푹 담그십시오.”

“그게 낫겠지… 그래…. 맞는 말이야. …출장 보냈던 똘똘이 너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둬주었고 말이야.”

선배의 시선이 내 곁에 선 여왕 폐하를 향했다.

선배는 키가 큰 편이었고, 여왕 폐하는 춘추에 걸맞게 그 체구가 작았다. 그러기에 자연히 선배는 여왕 폐하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오래는 아니었다. 선배는 특작조장을 흘끗했고, 특작조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서 예를 표했다.

“부족하나마 신월의 조각을 머리에 인 이가 당대의 달무리를 짊어지신 분을 뵙습니다.”

여왕 폐하는 담담히 손을 뻗어 그 이마를 짚어주었다.

“이 시대의 은월이 그대, 신월의 주인을 비춘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공이야말로 무사하여 다행이다. 신월공, 그대가 겪어야 했던 비극을 감안하면, 그 충정과 진심은 햇볕과 같이 만세(萬歲)에 걸쳐 만세(萬世)에 전해지리라.”

선배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잠시 여왕 폐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가 고개를 수그렸다.

“과분한 말씀입니다. 마땅한 도리를 다했을 뿐입니다.”

“신월공은 겸양하지 말라. 그대가 세운 공은 실록을 뒤져 보아도 찾아보기 힘들 만큼 대단한 것이다.”

“폐하의 치하에 실로 심장이 두근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습니다. 무릇 대륙의 성인이 말하기를, 신하는 은총과 이익을 성공이라 여기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찌 궁에 발을 디딘 자로서 그와 같은 글귀를 허투루 여기겠습니까. 거두어주소서.”

“거두지 않겠다. 신월공은 짐이 주는 치하의 말에 송구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타까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당장이라도 그대의 위업에 걸맞은 상찬과 그에 따른 포상을 준비하고 싶건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구나.”

그 뒤로도 몇 차례 치하의 말과 겸양의 말이 오갔다.

그것이 적절히 무르익었을 무렵 내가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그리고 각하. 이 사관이 보기에 두 분의 모습이 실로 아름답습니다만, 적도들은 바로 코앞까지 닥쳐온 상태입니다. 공작이 그들의 예봉을 꺾고 그 가신이 폐하를 구해 간신히 희망의 불씨를 되찾았다고 하나, 그 성스러운 불꽃으로 만백성의 몸을 덥히기 위해서는 장작을 팰 준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음.”

폐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3사관의 말이 옳다. 신월공. 작금의 상황과 그 대처 방안에 대해 논하도록 하지.”

선배는 곧바로 깊이 읍했다.

“예, 폐하. 따르겠나이다.”

◈          ◈          ◈

작전 회의가 준비되는 동안 선배가 푸념했다.

“젠장. 떡장수 둘이 서로 떡 사먹으면서 자네 떡 맛있군 하는 것도 아니고. 시간도 부족한데 뭐하는 짓인지 원.”

“필요하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듣기 좋은 말과 서로를 추켜세우는 표현은 정치의 핵심입니다.”

“그래. 사람들은 자길 뭔가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싶어하니까 말야. 살살 긁어주는 게 필요한 거지.”

“그뿐 아니라, 정치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모두에게 존재한다고 구라를 치는 작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라를 믿어 주어야 나라가 잘 돌아갈 수 있는 만큼 되도록 예쁘게 꾸며야지요.”

“에이. 신 제국 세운 양반은 거지 떼를 이끌던 왈패였다더만.”

“그런 사람도 제국을 세우고 나니 예법부터 만들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거라니까. 예법이란 건 도입할 때 어떻게 버릇을 들이냐 하는 문제라고. 두고 봐라, 두고 보자고. 나중에 내가 대업을 이루면 이런 상황에서 ‘대충 치하하는 말’, ‘대충 겸양을 표하는 말’을 쓰도록 단순화시킬 거니까. 붓값 먹물값 종이값도 아끼는 건 물론 업무 시간도 극적으로 줄어들어 행정 효율성이 빡 올라가겠지?”

“사관이란 그 많은 정치적 장광설을 받아써야 하는 직업이지요. 제 보직이 사관이란 것을 생각하면 반대할 이유를 찾기 어렵군요. 그치만 돌이켜 보면 제가 그 후에도 사관질 하고 있을 것 같진 않으니까 반대하겠습니다. 저는 개고생했는데 후임들은 꿀 빠는 것을 감히 용납할 수는 없으니까요.”

“똘똘아, 너야말로 이 나라의 참된 귀족이다.”

“감사합니다.”

그러던 때였다.

“그러는 그대도 만만치 않게 참된 귀족이구나.”

여왕 폐하였다. 선배는 주변을 살펴 사람의 눈이 없는 것을 한 차례 더 확인하고서 낭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오간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음. 오는 길에 대충 나와 그대가 놓인 상황에 대해 듣기도 했다. 편히 말하도록.”

선배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감사합니다. …폐하께 무례를 범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폐하가 웃었다. 그 웃음은 호수에 비친 달처럼 잔잔했다.

“주종은 한몸이라. 특작조장과 똑같은 소릴 하는구나.”

“…….”

“그대가 장광설과 공치사를 싫어하는 것은 알겠다. 그럼에도 그것이 필요하여 사용할 수밖에 없는 작금의 상황에 무력감과 짜증을 느낀다는 것도.”

폐하도 호송과 탈출로 인해 지쳐 있었다. 입 안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다른 이들의 눈이 없는 이 자리에서 폐하는 의자에 걸터앉아 몸을 쉬게 했다.

“하지만 그런 긴 말이 필요로 하는 자들이 있다. 아픔에 젖어, 피로에 젖어, 슬픔에 젖어, 아침이 오면 해가 뜬다는 사실조차 믿기 어렵게 된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이 많을 것이다. 당장 그대조차 3사관과 긴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마음을 안정시켰지 않은가.”

폐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서 입가에 띤 미소만큼이나 잔잔한 눈빛으로 선배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내키지 않는다 하여도 하라. 그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가 이끄는 병졸들을 위해, 그대의 앞날을 위해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대가 돌보는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선배는 긴 시간 침묵했다.

그 정적이 흐르고 나서, 선배는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황송합니다.”

“그럴 필요 없다. 어차피 이 모든 말들은 그대가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다시 배워야겠습니다. 음….”

선배는 무언가 좋은 말을 떠올리려는 것 같았다. 이 자리를 잘 마무리할 수 있는 그런 말 말이다. 그렇지만 선배는 좋든 나쁘든 선배였고, 내키지 않는 덕담을 해주는 데에는 익숙해도 그런 덕담에 화답하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다.

복잡한 얼굴로 여왕 폐하를 바라보던 선배는, 결국 한 가지를 물었다.

“폐하께서는 행복하셨습니까?”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질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나 또한 묻고 싶었던, 그러나 감히 묻지 못했던 질문이기도 했다.

폐하는 웃었다. 그리고 무얼 그리 주저했냐는 듯 담담하게 되물었다.

“그렇게 묻는 그대는 지금 행복하지 않은가?”

선배는 깊이 생각하고서 대답했다.

“불만은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을 정했고, 그 일을 추구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으니까요.”

요컨대 자신은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반면 폐하께는 그런 자유가 없지 않았냐는 것이었다.

산골에서 자유로이 살아가던 소녀. 하지만 실록의 글귀 몇 줄과 드문 눈동자 색깔로 인해 돌연 왕이 되어야 했다. 이렇다 할 권한도 없이 다만 책임과 무게만이 그 어깨 위에 얹혔다. 은근한 조롱과 음습한 무시는 일종의 덤이었다.

석화된 삶.

선배는 나와 함께 폐하를 처음 맞이하러 갔던 이들 중 하나였다. 부채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폐하는 이번 역시 담담하게 답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었으며, 좋은 잠자리에서 잘 수 있었다. 짐의 몸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선배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가볍지 않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보다 많은 이들을 위해, 단지 먹고 살기 위한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짐의 정신은 그것으로 만족한다.”

“…….”

“거기까지야 그저 짐의 혀가 까다롭지 않고 입이 짧을 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짐을 구해준 이들마저 있지 않은가.”

“그것은….”

선배가 머뭇거렸다.

폐하는 손을 저어 그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짐의 쓸모를 고려한 결정이란 것을 안다. 많은 이들이 그런 이유로 결정을 내렸겠지. 짐은 그것을 유감으로 여기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폐하는 가만히 웃고서 나를 돌아보았다.

“짐의 쓸모가 아니라, 순전히 짐 한 사람을 위해 와 준 이까지 있었음에야, 짐이 어찌 감히 유감을 표현하겠는가.”

나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니 그런 표정들 짓지 말도록.”

이 나라에서 가장 지고한 자는 소박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말했다.

“짐은 복에 겨운 삶을 살았다. 살고 있다. 짐은 짐의 삶에 흔들림 없이 만족한다. 가엾게 여길 필요는 없다.”

선배 역시 고개를 조아렸다.

“안타깝게 느낄 필요 또한 없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폐하.’

선배가 하지 못한 덕담을 폐하께서 하셨다. 이 이야기는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가슴 벅차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 폐하마저도, [차라리 죽었으면 싶었다]고 말씀하시게 됩니다.’

나는 그 사실을 알았다.

그것이 확정되었던 세계에서 왔으므로.

‘지면 안 돼.’

그러기에 나는 여운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각오를 다졌다. 긴장과 불안, 공포를 누르면서 열의를 불태웠다.

“각하. 폐하. 작전 회의가 준비되었습니다.”

특작조장이 막사로 들어와 보고했다. 나는 각오를 다진 채 발걸음을 옮겼다.

폐하의 이야기가 아름답게 남기 위해서는 이겨야만 했다.

◈          ◈          ◈

지휘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선배가 작계 보고를 시작했다.

“폐하, 현재 우리들의 전투 가능 병력은 4천 2백입니다. 이는 달의 여신께서 가호하시고 용사들이 분전한 결과이온데, 여기 태산군을 이끄는 북경후로 말할 것 같으면 두동천 대첩에서 선봉을….”

선배는 우선 자신들의 상황을 보고했다. 지난 전투에서 어떤 손실이 있었으며, 어떤 노획물들을 획득했으며, 어떤 영주가 데려온 어느 병사들을 어떻게 재배치했으며 등등.

사실 정리만으로도 길어질 수밖에 없는 내용인데, 영주들의 체면을 세워주고 사기를 증진시키기 위한 장광설이 추가로 동원됐다.

정신력이 팍팍 깎여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폐하께 다독임을 받은 덕분인지 선배는 특유의 웅변술을 동원하여 그것을 해냈다.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므로 핵심만 쏙쏙 골라 먹을 수 있었다.

- 대충 아군 전력은 여전히 다 기병이라는 뜻.

- 대충 화약과 장비의 소모가 심했지만 노획품으로 보충하여 종합적인 무장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뜻.

- 대충 다들 지쳐 있지만 연전 연승을 거듭한 만큼 사기는 충만하다는 뜻.

그리하여 선배는 드디어 장광설을 모조리 뺀 담백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바로 몇 시간 전 왕도 측에서도 연락이 왔습니다. 왕도에 남아 있던 적들을 궤멸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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