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지름길 (1)
진흙이 가라앉아 투명해진 수면 위로 자그마한 원반 모양의 자갈이 스쳐 갔다.
탓, 탓, 탓. 수면 위를 깨금발로 달려간 자갈이 마침내 내천 너머로 넘어갔다.
“아자! 역시 상승무패를 자랑하는 우리들 태산군!”
“성곡 자작군! 니들이 장비 손질이다!”
일단의 병사들 사이에서 환성이 울려 퍼졌다.
투구와 군화를 벗은 병사들이 물수제비를 하는 것이다. 반대편에 선 병사들이 어깨를 수그린 채 산더미처럼 쌓인 장비들을 향해 걸어갔다.
“짜식들. 한가하구만.”
특작조장이 바위 위에 앉아 곰방대를 입에 물면서 평가했다.
나는 그 옆에 드러누운 채 말했다.
“훌륭하게… 이겼지 않은가…. 영웅들은 쉴 자격이… 있는 법이지…. 그리고… 쉬는 것도… 일이라네….”
특작조장이 나를 흘끗했다.
한숨을 푹 쉬더니, 모포를 들어 내 쪽으로 던져준다.
“고맙네… 고마워….”
“아니 좀, 사관님. 거 무슨 칠순 노인네도 아니고…. 싸움 하나 끝나서 긴장이 풀리는 바람에 피로가 팍 몰아친 거야 알겠습니다만은.”
“아이구, 아이구 죽겠다…. 조장, 나 허리 좀 주물러주지 않겠나…? 내가 꼭… 꼭 보은할 터이니….”
“아 나 미친…. 야! 거기 너! 와서 사관님 안마 좀 해드려라.”
그렇게 불운하게도 상급자의 눈에 띤 병사가 다가와 내 허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휴식시간에는 되도록 윗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짱 박혀 있어야 한다는 비극적인 교훈을 전해주는 한 장면이었지만, 주물러지는 입장으로서는 그저 편안할 뿐이었다….
“후우, 그치만 확실히 걱정스럽긴 하군. 여기서 또 분발해서 쫓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군대의 일이라는 게 그렇지요 뭐.”
“보급은 충분한가?”
“솔직히 답하자면 사관님이 걱정하지 않아도 지휘관들이 알아서 할 문제입니다만은, 충분합니다. 이번 전투를 이기면서 노획한 것들이 제법 있으니까요. 젖은 화약들도 지금 펼쳐서 말리고 있고…. 몇 차례 전투는 더 치를 수 있을 겁니다.”
“식량은?”
“역시 젖은 것들을 뺀다고 해도, 휴대 식량만으로도 앞으로 며칠은 버틸 만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건 몇 차례 전투를 치르면서 며칠이 지나면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날 작전이다.
다만 나는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야인들의 식량은 아무래도 병사들 입에 맞지 않을 것 같네만….”
“중요한 문제이긴 하죠.”
특작조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쫄따구 주제에 뭘 가리냐, 주는 대로 처먹어라 싶습니다만 몸이 안 받아들이면 배앓이로 이어져서 전투력을 잃어버리니까요.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이 그런 이유로 줄어들면 공작 각하께서 대노하실 겁니다.”
“흠….”
나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윽,” 자칫 균형이 풀려 넘어질 뻔했지만, 내 허리를 주무르던 병사가 시의적절하게 부축해주었다.
“노획한 휴대 식량들을 가져와주게.”
“네?”
“가져와주게. 곧 식사 준비할 시간 아닌가.”
나는 병사가 건네 준 칼을 지팡이 대신 짚고 서서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내 재미있는 걸 보여주도록 하지.”
병사와 특작조장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잠시 후, 특작조장이 말했다.
“사관님.”
“응?”
“칼집 씌우고 짚어주십시오. 날 나갑니다.”
“음.”
그렇게 했습니다.
◈ ◈ ◈
두동천 강변 곳곳에 솥이 내걸렸다.
나 칼질 좀 한다 하는 병사들이 솥마다 모여들었다. 손에는 야인들이 쓰는 커다란 도를 든 상태였다.
“안녕하신가, 3사관이라네.”
그런 이들을 둘러보면서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들 준비됐나? 그럼 시작하겠네.”
먼저 야인들이 휴대하고 다니는 고기들을 각자 모으도록 시켰다. 북방의 기후에 걸맞게 벽돌처럼 비쩍 마른 육포들이었다.
“보다시피 곤봉이 청혼하고 싶어질 만큼 단단한 고기들일세. 이걸로 사람을 후려치면 고기가 아니라 대가리가 아작나지.”
그렇게 모은 고기들을 마구 찍어 쳐서 부순다. 도끼, 망치, 바위까지 써서 최대한 잘게 으깬다.
“다음은 물을 붓고 팔팔 끓이게나. 고기조각들이랑 방금 따온 쑥만 넣어서 끓이는 걸세.”
그러기 위해서는 무수한 장작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야인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쓰려 했던 장작들 덕분에 수고를 줄일 수 있었다.
덜 마른 장작들이 매캐한 연기를 피워 올렸지만 그것도 나름 이 강변의 풍경에 운치를 더해주었다.
“끓는 동안 곡식 가루와 말젖으로 만든 건락(乾酪)도 준비해 두게. 표면은 긁어내고 속심만 쓰는 걸세. 좀 아깝지만 지금 이 식사는 사치스럽게 하세나. 자네들한테는 그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말이네.”
나는 뒷짐을 진 채 거대한 집단 취사장으로 변한 강변을 돌아다녔다.
“아니, 가재랑 개구리는 또 언제 잡은 건가?”
“오, 제법이구만. 고기를 완전 개박살내버렸군.”
“여기는 아예 메기를 잡았네. 재주도 좋군 그래.”
내가 지시한 주 요리가 모든 솥에서 준비되는 가운데, 병사들마다 쉬는 시간 동안 장만한 재료들로 따로 별식을 준비했다. 사람이란 자기 입에 들어가는 것들은 지시 받지 않아도 준비하는 생물인 것이다.
금세 고소한 냄새들이 퍼져 나가며 혀 안쪽에 마른 침이 고이도록 만들었다.
“자, 고기가 적당히 물을 빨아들였다 싶으면 이제 곡식 가루를 넣어 끓이도록. 건락은 맨 나중에 가운데 퐁당 빠뜨려 넣고. 너무 많이 넣지는 말게나. 기름 져서 배앓이를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대략 반 시진쯤 들여 느긋하게 취사가 진행될 무렵이었다.
“오. 밥 하냐?”
선배가 막사에서 나오면서 말했다. 얼굴과 손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예, 선배님. 그 야율천인가 하는 녀석 심문은 잘 됐습니까?”
“뭐 대충. 같은 진술이 세 번 되풀이 됐으니까 신빙성은 제법 높지 않으려나.”
선배는 걸으면서 장화를 벗어 던지더니 그대로 강변에 뛰어들어 몸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그러고는 그야말로 칠순 노인네마냥 으어 좋다, 소리를 내고는 머리까지 감았다.
“나도 한 그릇 갖다 주라.”
“옙.”
대령했다.
가장 좋은 고깃죽과 통통한 메기 살점을 바쳐야 했던 솥 주변의 병사들은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것이 군대였다.
“맛있네…. 너 야인들 요리 할 줄 알았어? 니 후배한테 가르침 받았냐?”
“아뇨, 다른 쪽에서 배운 겁니다.”
개천식 이전까지만 해도 월족의 야전 요리 역시 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사는 곳이 비슷하면 기후도 비슷하고, 자라는 것들도 먹을 수 있는 것들도 비슷할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치였다.
“어디서 배웠는진 모르겠다만, 잘 했어. 애들도 요리 하면서 기분 전환 좀 됐겠지. 뜨끈한 걸로 속 좀 축일 시간이기도 하고.”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의도였다.
서류가 도통 손에 안 잡힐 때 산보를 하거나, 가볍게 탁자 위를 정돈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사소해 보이는 지시와 접촉이 의외로 중요한 것이다.
“에휴. 생각해보면 내가 지시해야 했던 건데…. 에휴. 일들이 하다 많다 보니 처리능력이 안 따라간다, 참.”
선배는 고깃죽과 살점을 게 눈 감추듯 집어먹고는 물로 입가심을 했다. 그러는 내내 그녀의 시선은 먹을 것이 담긴 그릇도, 이야기를 나누는 나도 아니라 강 건너를 향해 있었다.
나도 같은 방향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 물수제비가 건너간 그 곳에는, 눈여겨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요란한 이동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야율천이가 뭐랍니까?”
“세마인지 뭐시기인지 하는 놈이 진작에 여왕 폐하 들고 튀었단다. 그러자마자 30분도 지나지 않아 우리가 나타났고.”
30분.
“…우리가 30분만 일찍 왔어도 탈환했겠군요.”
“그런 말은 남들 앞에선 하지 말고.”
선배는 옆머리를 행주처럼 비틀어 물기를 쪽 짜냈다.
“결과론인데다가 아무런 생산성도 없잖아. 그나마 누군가한테 책임을 물을 일이 생겼을 때에나 생산성을 갖게 될 텐데, 이 작전을 주도적으로 시행한 건 나란 말이야. 나한테 책임 물을 건 아니잖아.”
“죄송합니다. 선배한테 책임을 물으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알아. 그냥 답답해서 꺼낸 말이겠지.”
선배가 손가락을 퉁겼다. 특작조장이 마른 수건을 가져와 선배에게 건넸다.
“그치만 답답함에 절어서 아무리 발을 굴러봤자 바뀌지 않는 게 세상이니까 말야. 답답함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절차를 밟도록 하자고.”
선배는 수건으로 몸을 닦으면서 가볍게 눈을 찡긋했다.
“네가 애들한테 요리시킨 것처럼. 괜찮지?”
음.
“예, 선배님.”
“좋아.”
선배는 기지개를 켜고는 젖은 수건을 손가락에 걸고서 빙빙 돌렸다.
“그 세마인지 하는 놈이 이끄는 부족의 전사들 숫자는 대략 1만 4천. 우리가 여기서 쓰러뜨린 적들에 비하면 적은 편이지만, 우리들 숫자도 줄어든 걸 감안하면 큰 차이는 없는 셈이야.”
“여전히 약 2배 차로 우리가 열세군요.”
“응. 더구나 다음 번 전투 때는 터뜨릴 저수지가 없을 가능성이 높아. 적들도 싸먹기 좋게 강변에서 쉬고 있지 않을 테고 말이야.”
그럴 것이다.
“다만, 편성 상으로는 우리가 유리해.”
짝! 소리와 함께 물이 튀어 올랐다.
선배가 젖은 수건으로 수면을 후려친 것이다.
“우리가 전원 기마병인 데에 비해서, 적들의 기마병 숫자는 약 2천. 한 차례 휴식을 취하고 나서 쫓기 시작해도, 놈들이 본대와 합류하기 전까지는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
“그렇게 따라잡은 다음에는 다시 지형이 문제가 되는데…. 우리 중 절반 이상은 마상 조총 사격이 가능한 애들이지. 넓은 곳에서 붙는다면 기동력 우위로 어떻게 병력 차이를 극복할 가능성이 있어.”
“첩첩산중이군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넓은 곳에서 붙어야 겨우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그렇다고 쳐도….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다는 것 아닙니까.”
“앙. 기껏 적들을 따라잡았다고 해도, 거기에 여왕 폐하가 있을지 없을지는 미지수야.”
선배는 산뜻하게 인정했다.
“거기에 여왕 폐하가 있으려거든, 우선 적들이 따로 기병으로만 호송대를 꾸려서 먼저 보내지 않았어야 해. 그치만 그 발상의 난이도는 썩 높은 편이 아니란 말이야.”
“대가리만 붙어 있어도 할 수 있는 발상이지요.”
“응. 그리고 호송대를 꾸리는데 병력이 많이 드는 것도 아냐. 우리도 오는 길에 여기 몇 백 저기 몇 백 이렇게 뿌려 놨지만, 그런 임무 맡기는 데에는 그걸로 충분하단 말이지.”
선배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두피의 체온으로 인해 땀과 큰 차이가 없이 데워진 물방울이 내 이마에 튀었다.
“2천 중에 2백만 추려서 여왕 폐하 호송을 맡겼다고 해도 그걸로 끝. 우리의 추적도 전투도 말짱 다 황이 되어버려.”
“…….”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면서 날 선 통증을 가져다주었다.
‘역시 딱 30분만 일찍 왔어도….’
선배의 말마따나 무의미한 생각이란 것을 알아도, 나는 심장이 저며 드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손에서 놓친 패는 언제까지고 도박꾼의 마음속에 벌건 낙인을 남기는 것이다.
그런 나를 선배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래지 않아 그 입가에 한숨이 걸렸다.
“아니, 표정 좀 펴고. 내가 뭐 포기하자고 했냐? 짜식이….”
음.
나는 그렇게 했다.
“그래, 임마. 표정 푸니까 보기 좋잖아 아주. 기껏 뺀질한 쌍판 타고난 주제에 말야.”
“제가 좀 잘 생기긴 했지요.”
“때리고 싶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덧 주변에는 나와 선배만 남았다. 가장 가까이서 밥을 먹던 병사들도 멀찍이 물러난 상태였다.
“아무튼 똘똘아. 해서 말인데.”
그래서 선배가 소리를 낮추어 말했을 때, 그 목소리는 오직 나한테만 들렸다.
“니가 좀 특별 임무를 맡아주어야 쓰겠다.”
◈ ◈ ◈
두동천 일대.
휴식 중이던 아군 7,250명, 식사 후 두동천을 건너 긴 휴식에 돌입.
그 중 차출된 정예병 250명.
지휘관, 특작조장 및 제 3사관.
노을이 질 무렵, 지름길을 향해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