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235화 (235/261)

235. 두동천 전투 (3)

야율천은 자신이 엿됐음을 직감했다.

“족장님! 방금 뭔 소리가 들렸는데요!”

“대체 뭔 소리랍니까 저게? 화포 소리 같았는데….”

자신의 조카들이 야단법석을 부리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럴 때면 도무지 일이 잘 돌아간 적이 없었다. 야율천은 오랜 경험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야율천은 애써 태연한 척 해보았다.

“글쎄다. 저 놈들이 가져오다가 힘들어서 떨어뜨린 것 아니겠냐?”

‘아이구 족장님, 그것 참 말젖을 듬뿍 바른 것만 같은 농담이올시다.’ 하고 껄껄 웃어 재끼는 조카들은 없었다. 예상한 일임에도 야율천은 다소 상처를 받았다. 젊은 녀석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만 같은 느낌, 머리에 숱이 없어진 이후 늘 느껴왔던 소외감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렇지만 그런 종류의 자기연민에 빠져 있기에 적절한 장소가 아니었다.

“족장님! 소리가 한 번 더 났습니다!”

“이번에도 멀리서 났습니다!”

조카들의 보고처럼, 쾅…! 한 차례 더 폭음이 터졌다. 역시 여기서는 먼 거리, 하지만 좀 전에 들려온 소리의 근원지와는 대단히 가까운 위치였다.

그와 동시에 고개를 점거한 채 자신들을 내려다보던 월국군의 선두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남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 뒤로 물러나고, 어릴 무렵부터 한눈파는 일 없이 싸움질에 매진해 왔을 것만 같은 거한들이 커다란 북방마를 탄 채 도열한 것이다.

“족장님! 돌격 진형입니다!”

“저 놈들이 달려들려나 봅니다!”

왼쪽에 서 있던 조카들이 정덕 고개를 올려다보면서 소란을 피웠다.

“족장님! 뒤에서 뭔 소리가 납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서 있던 조카들이 폭음이 들려왔던 방향을 돌아보면서 난리를 쳤다.

‘염병, 오줌보랑 똥집이 동시에 터진 것 같구만. 앞뒤로 난리야, 아주.’

야율천은 욕지거리를 씹어 삼켰다. 그리고 다시금 태평한 어조를 가장하여 말했다.

“허허, 고개 길목이 술병 모가지마냥 좁은데. 아무리 달려와 봤자 실뱀의 대가리밖에 더 되나? 거창 가진 놈들 앞에서 진 쳐라. 불총 가진 놈들은 그 뒤에서 진 치고. 말 없는 졸자 새끼들은 칼 들고 사이에서 버텨.”

야율천의 전사들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아무리 야율천이 태평한 어조를 가장했다고 해도 그들은 무리짐승과 같은 본능으로 그 안에 깃든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은 전투를 업으로 살아온 전사들이었으며, 야율천은 그들의 전쟁군주였다.

야율천이 지시했다면 그들은 거기에 복종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했다. 아오란 방진. 카한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아오란 부족을 무적으로 만들었으며, 신 제국의 고명한 태수들을 몇 명이나 물리쳤던 강철의 진형이 두동천 일대에서 전개되었을 때였다.

“저기, 족장님…?”

큰 조카의 목소리였다. 거기에는 불안감을 넘어 두려움이 가득했다.

휘하 전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방진을 짜는 것을 보며 가까스로 불안감을 삭이던 야율천은 왈칵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가 그 짜증을 칼이나 목소리로 분출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큰 조카가 이어 말했기 때문이다.

“저기 뒤에, 뭐가 밀려 오는데요…?”

야율천은 고개를 들어 뒤를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직감이 결국 어긋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멀찍이서.

비스듬한 각도로, 산의 껍데기가 주르륵 밀려 내려오고 있었다.

◈          ◈          ◈

난전이 될 것이다.

아무리 지형에서 우세하고, 저수지를 터뜨려 수공의 이점을 더한다고 해도 2배의 병력을 상대한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신월공은 자신의 무용을 과신하지 않았다. 선두에 서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휘관이 선두에 나서 병사들을 고무하는 것의 효과는 익히 아는 바였지만, 지금 그녀의 앞에 놓인 것은 압도적인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손쉬운 적이 아니었으며, 이번 전투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겨야만 하는 건곤일척의 도박도 아니었다.

그러기에 신월공은 안전한 곳까지 물러나 지시했다.

“북경후. 그대가 이끄는 태산군이 창이 되어줘.”

북경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덩치 큰 북방마를 탄 묵직한 중기병이 선두에 서고, 그 뒤로는 알실라의 피가 섞인 예리한 경기병들이 뒤를 이었다.

“나머지는 성곡 자작군만 빼고 말에서 내려. 말들 어디 안 가게 잘 묶어두고. 넓게 퍼져서 전선을 구성한 다음에 내려간다.”

일종의 1면 포위였다. 모든 포위가 그러하듯 소수가 다수를 상대로 할 짓이 아니었지만, 수공이 효과를 보이는 동안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려면 불가피한 일이었다.

‘문제는 수공이 제대로 이루어질까 하는 부분이지만….’

우려는 오래지 않아 불식되었다. 고지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신월공을 포함한 왕국의 군세는 그것을 더 빨리, 그리고 멀리서부터 볼 수 있었다.

◈          ◈          ◈

바다에 사는 이라면 두동천이 만조를 맞이한 것 같다고 말할 것이다. 산에 사는 이라면 단번에 장마철의 산사태를 떠올릴 것이다.

나른한 평야에 살아가던 아오란 부족의 족장, 야율천도 즉각 자신만의 비유를 찾아냈다.

“똥물이다!!”

저수지의 물은 사이에 있는 흙을 게걸스레 삼키면서 두동천과 합류했다. 필연적으로 그 빛깔은 짙은 황토빛이었으며, 군데군데 떠오른 나무 쪼가리며 잎사귀들은 군데군데 떠오른 찌꺼기들 같았다.

“똥물이 밀려온다!!”

바로 눈앞에 있는 내천이 급격히 넓어지고, 심지어 높아지는 것은 원근감을 기괴하게 비틀어놓았다. 마치 두 배로 커진 것도 같고, 어쩌면 열 배로 불어난 것만 같은 내천은 꿀렁, 크게 일렁이면서 아오란 부족을 뒤에서 덮쳤다.

“흐업!”

“악!!”

실제로는 그렇게 극적이지 않았다. 두동천의 수위와 면적은 기껏 해서 2할에서 3할 정도 증가했을 것이다. 유속의 증가도 그 정도에 그쳤으리라.

하지만 소낙비로 잠깐 불어난 계곡물조차 장사의 발목을 잡아채 지옥까지 끌고 가는 법이다.

범람한 두동천은 독사처럼 아가리를 치켜들어 가까운 자들의 엉덩이를, 그보다 멀리 있는 자들의 무릎을, 다시 더 멀리 있는 자들의 발목을 후려쳤다. “윽!” “컥!” 수많은 이들이 균형을 잃었고, 그보다 불운한 자들은 자갈과 나무조각 같은 표류물에 맨살을 얻어맞았다.

피와 비명이 일대를 수놓았다.

“다들, 다들 일어서라!”

“말이…!”

말에 탔다고 사정이 더 나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참혹했다. 다리 넷 달린 짐승들은 히히힝 울부짖으면서 그대로 휩쓸렸다. 퍽…! 무수한 말들이 옆으로 엎어졌으며, 또는 다리가 부러졌다.

“끄아악!”

“아악…!”

말 위에서 내동댕이쳐진 기수들은 차라리 행운을 타고난 것이었다. 그보다 불행한 기수들은 말의 옆구리에 다리가 깔리고 말았다. “욱!” 누군가 놓친 칼에 입 안이 꿰인 채 절명한 기수는 아마도 가장 불행한 기수였을 것이다.

약 2만에 달하는 전사들 대부분이 그렇게 균형을 잃거나, 그보다 나쁜 상태에 빠졌다.

“서라! 서!”

“다들 똑바로 서!”

어려운 일이었다. 잠시 후에는 두 번째 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두 번째 파도가 그들을 후려쳤다. 첫 번째 파도보다 아주 약간 높고, 아주 약간 넓으며, 아주 약간 빠른 정도였는데, 바꾸어 말하자면 첫 번째 파도보다 열 배 가까이 무시무시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것이 이미 자세가 무너진 이들을 덮친 것이다. “흐업,” 야인들이 걸쳐 입은 가죽옷의 갈기는 금세 물을 빨아 무거워졌다. 그들은 몸에 닻을 매단 것마냥 일어서지 못한 채 첨벙거렸다. 짙은 흙탕물이 그들의 콧털을 적시고 입안을 헤집어 켈룩대게 만들었다.

“좋아.”

그 모든 광경을, 정덕 고개 위에서 왕국의 영주들이 내려다보았다.

“지금 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영주 중 한 명이 살짝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더 기다려.”

신월공이 냉정하게 지시했다. 그 눈동자는 산란철을 맞이한 물고기들 주변을 맴도는 맹금류의 것이었다.

“조금 더.”

친아비를 죽인 여인의 시선은 물에 휩쓸려 펄떡거리는 야인들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것은 결과였다.

권력자의 시선은 그 풍경을 만든 원인을, 밀려오는 두동천의 수면을 좇았다.

“조금 더.”

밀어닥친 물의 거죽은 정덕 고개에 가까워지면서 점차 얇아졌다.

처음에는 책장처럼, 다음에는 책처럼, 이윽고 종이처럼 얇아졌다.

“준비하고,”

그리하여, 물의 진군이 멈춘 바로 그 순간에.

“지금!”

신월공이 지시했다.

공격을 알리는 깃발이 하늘에 나부꼈으며, 동시에 총포 소리가 그것을 꿰뚫었다.

“돌격!”

고갯길을 타고 북경후의 태산군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투그닥, 투그닥! 묵직한 말발굽이 땅에 박힐 때마다 정덕 고개 전체가 울었다. 우, 우! 기병들이 따라 울었다. 철컥, 철컥! 그들이 걸친 갑주와 마갑이 철컹거리면서 후렴구를 넣었다.

동시에 정덕 고개의 발치를 적신 채 잠시 멈추어 섰던 두동천의 수면이, 서서히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한계까지 몰아친 물이 기세를 잃고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하지만 그것이 태산군의 돌진과 함께 이루어지자, 마치 두동천이 태산군의 돌진에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는 것만 같은 착시를 자아냈다.

“달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수면을 잡아끌고, 또한 몰아내는 달께서! 달의 여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태산군의 기수들이 용기백배하여 외쳤다. 그 안에 희열을 담고 울려 퍼진 외침은 태산군뿐 아니라 말에서 내려 비탈면을 타고 내려가는 다른 병사들 또한 고무시켰다.

“으아악!”

“악!”

한편, 기껏 몸을 일으켰던 야인들은 돌연 거꾸로 흐르는 물줄기에 다시금 발목을 잡혔다. 밀어닥칠 때만큼이나 격렬하게 빠져나가는 물줄기는 그들이 쉽게 일어서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뒤집힌 거북이처럼 낑낑거리는 야인들을 향해 왕국의 군세가, 시퍼렇게 끝이 갈린 창날처럼 내리 꽂혔다.

“쏴라!”

탕…! 타앙, 탕…!!

시체가 널려 있던 평야에서 벌어졌던 일이 다시 한 번 벌어졌다. 쏜살같이 고개를 타고 내려간 태산군의 선두는 자신이 탄 말이 젖은 땅을 밟자마자 조총을 쏘았고, 그 다음에는 곧바로 창을 들고서 좌우로 갈라졌다. 그러면 다시 그 뒤를 달리던 기병이 조총을 쏜 다음 갈라졌고, 그렇게 반복되었다.

“악!”

“흐압!”

물이 빠져나간 진창에서, 갯벌에 남겨진 망둥이처럼 버르적거리던 야인들은 엎어진 그대로 마지막 경련을 일으켰다. 살아남은 야인들은 곧 그렇게 죽은 야인들을 부러워하게 되었는데, 창을 들고 달려든 태산군의 말발굽이 그들을 산채로 짓밟았기 때문이다.

“제기랄! 흙이나 파먹는 새끼들이!”

야율천이 이를 갈았다.

“다들 서라! 무기를 들어! 우리는 아오란 부족이다!”

야인들은 이를 악물면서 그 명령에 따랐다. 벌떡, 벌떡! 마치 비가 온 다음날 돋아나는 죽순처럼 야인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타고난 호전성과 지금까지 이겨왔다는 자신감, 그리고 2배라는 병력차가 가능케 만든 일이었다.

“다들 총을… 이런 제기랄!”

“창! 칼! 뭐든 좋으니까 쓸 수 있는 무기 들어!”

그러나 그들이 손에 쥔 무기는 빈약했다.

야인들에게도 조총은 있었다. 활이 있었고 화살이 있었으며, 왕국에서 약탈한 금속 병장기들도 무수히 많았다. 하지만 그 중에 지금 쓸 만한 것은 손에 꼽을 만했다.

흠뻑 젖은 화약은 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물을 먹은 활시위는 제대로 당겨지지 않았다. 엎어진 서슬에 전통에서 쏟아진 화살들은 깃에 진흙이 붙어 그 무게가 변해 있었다.

“어떻게든 쳐! 쳐라!”

야율천이 악을 썼다. 야인들은 결국 단검이나 창 같은 것을 들고 왕국군과 맞설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옷이 젖어 기동력이 저하된 상태였다.

심지어 바로 그 때, 말에서 내려 비탈면을 타고 넓게 내려온 왕국군들이 나타나 조총을 쏘았다.

탕…! 탕, 타당, 탕……!

“으아악!”

“크악!”

간신히 일어섰던 야인들은 진형도 꾸리지 못한 채 무릎을 꿇어야 했다. 뻘창으로 변한 땅바닥은 마치 원한을 가진 것처럼 그들의 발목을 잡고 놓지 않았다.

“젠장…!”

이런 상황에서는 군신이 지휘를 한다 해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야율천은 군신이 아니었다.

그는 카한조차도 아니었다.

실로 오랜만에, 야율천은 잊고 있었던 그 사실을 다시금 느꼈다.

이후 벌어진 전투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야인들이 오래도록 도망치지 않고 분전한 것은 그들이 용맹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단지 뒤가 내천으로 막혀 물러설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들 젖고 진흙 범벅이 되어 달아날 만한 속도를 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밀어닥치는 왕국군 앞에, 야율천과 그가 이끄는 전사들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          ◈          ◈

정덕 고개 - 두동천 일대.

주둔한 야인 17825인 대 추적군 9250인.

승리.

수훈자 목록.

선봉을 맡은 태산군. 그들을 지휘한 북경후.

총사령관 신월공.

그리고 저수지를 파괴한 3사관 및 특작조장.

적 사상자 약 10,000명, 투항 약 6,000명, 도주자 약 2,000명, 합계 전원 손실.

아군 사상자 약 1,000명, 아군 부상자와 적 포로를 관리할 병력 약 1,000명, 합계 2,000명 손실.

아군 7,250명, 휴식 후 추적 재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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