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232화 (232/261)

232. 북쪽으로 (2)

그것을 시작으로 하여, 비슷한 일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앙중 부근 전투.

낙오한 야인 44인 대 추적군 9천 3백.

승리.

수훈자 안무 자작.

주양 남작령 외곽 전투.

주둔한 야인 211인 대 추적군 9천 3백.

승리.

수훈자 운중 남작.

정덕 고개 전투.

낙오한 야인 37인 대 추적군 9천 2백 5십.

승리.

수훈자 영월 남작.

“마치 어린애가 흘리고 다니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비둘기가 된 것 같군요.”

“4만이나 되는 병력이 우회한 산성들을 경계하면서 철퇴 중이니, 코딱지도 데굴데굴 굴러 나오게 마련이지.”

“선배.”

“왱.”

“적어도 빵 부스러기로 정정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야기 흐름대로라면 꼭 우리들이 코딱지를 주워 먹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치만 비둘기는 코딱지든 뭐든 우물우물 씹어 먹는다고?”

“엄밀히 말하자면 비둘기는 이빨이 없어서 아무것도 씹어 먹을 수 없습니다.”

“제기랄, 그걸 몰랐네. 그치만 어쨌든 ‘우리’가 아니라 다른 애들이 희희낙락하며 주워 먹는 거니까 상관없잖아.”

그건 그렇다.

선배는 이 부스러기 주워먹기를 특유의 목소리와 선동을 통해 뭔가 그럴 듯한 치적으로 만들어 분배했다. 덕분에 추적군은 연전연승을 거둔 듯한 열광에 휩싸였으며, 지휘관들은 자신들이 그 주역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나나 선배가 활개를 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런 이들의 절대수는 많지 않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병력 전체가 주눅이 드는 것보다는 들떠 있는 편이 나았다. 그 들뜬 병력을 원하는 방향으로 투사할 수 있을 만한 지도자가 있는 상황이면 말할 것도 없었다.

중대한 도전을 맞이하여 패배하기 전까지, 선배의 지휘권이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대한 도전’은 금세 찾아왔다.

“꿀 빠는 것도 여기까지 같네.”

정덕 고개의 고갯마루에서는 두동천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나와 선배를 필두로 하여 지휘관들은 우리가 도착해서 쉬려던 곳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쉴 만한 장소로 여기는 장소를 적들이라고 다르게 평가할 리 없었다. 북에서 흘러와 서로 방향을 틀면서 너른 여울을 형성하는 곳에 야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숫자가 많았다.

걸쳐 입은 얼룩덜룩한 털가죽이 갈대밭처럼 흔들리고, 손에 들린 녹이 덜 닦인 창칼이 대나무숲을 이루었다. 전사와 병장기가 만들어 낸 도검삼림 곳곳에는 섬뜩한 문양이 그려진 부족기(部族旗)가 휘날렸으며, 그럴 때마다 하얀 갈기와 커다란 덩치를 가진 북방마(北方馬)들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1만 5천? 2만? …대충 우리 두 배쯤 되는 물량이구나.”

선배가 중얼거린 대로였다.

철퇴하던 병력의 절반. 9천 2백 5십의 우리 병력 앞에는, 그 두 배에 달하는 적들이 놓여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상대해야만 했다.

◈          ◈          ◈

성곡 자작이 엄숙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적들은 우리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나와 선배, 그리고 지휘관들은 서로를 마주 보는 일 없이 두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첫째, 성곡 자작에게도 대가리가 있으며 그 대가리에는 눈알이 붙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갯마루에 있었고, 그 위에서 내려다보면 적들이 우리 쪽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선배의 용모와 목소리와 언변술은 타고난 것이다. 성곡 자작이 아무리 엄숙한 어조로 말한들 방금 그 말은 첫 번째 의미밖에 뜻하지 못했다.

북경후가 헛기침을 했다.

“험. 본인의 태산군이 정의부 평야 대첩을 치를 적에 화총을 썼던 것은 전략적 실패였던 모양이오. 그 소리로 인해 눈치를 챈 것이 아니겠소이까?”

선배는 물론, 낙오병들 좀 두드려 잡은 게 어떻게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대첩 씩이나 되었냐느니, 그러게 아까 왜 화약 낭비하고 지랄했냐느니 따지지는 않았다. 그저 성곡 자작과는 차원이 다른 엄숙함으로 중무장한 채 북경후를 다독였을 뿐이다.

“그렇지 않아. 한 명도 놓쳐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대는 올바른 판단을 한 거야.”

“하지만….”

“더불어, 우리는 지금 1만의 기병이다. 4만의 말발굽이 내리 찍는데 약동하지 않는 대지는 없고, 거기서 이변을 눈치 채지 못할 적들이라면 왕도가 위기에 빠지는 일도 없었겠지. 심지어 저 야인들은 황야에서 말과 함께 자라난 자들 아닌가. 무시할 수 없는 병력들이 자신의 뒤를 쫓아오고 있다는 것쯤은 오래지 않아 깨달았을 거야.”

북경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북경후도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 알고서 그런 말을 꺼냈을 터였다.

이런 대화가 북경후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것 자체가, 조금 전 선배의 부스러기 나눠주기가 잘 먹혔다는 증거였다. 추적군의 사기와 단합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우리 군이 아직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는 부분이 문제가 되는군요.”

동안 자작이 말한 대로 우선은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우리 군은 아직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적들은 수원을 차지한 채 휴식을 취한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적들이 남긴 흔적들로 추측해볼 때 불과 한 시진에서 한 시진 반에 불과한 휴식이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군보다는 체력적 우위를 획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적들은 진을 치고 있습니다.”

저들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선배의 말처럼 우리가 달려오는 것을 땅의 진동으로 느끼고 대비한 것이리라.

“우리는 고갯마루에 있지요. 고지를 잡은 셈입니다만, 현재 상황에서는 이것이 꼭 유리하지만은 않습니다.”

고지를 잡은 자들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은 상대에게 고지를 점령해야 할 이유가 있을 때뿐이다.

그러나 적들의 목적은 철퇴하여 본대와 합류하는 것이다. 우리 쪽으로 올라와야 할 필요는 없었다.

더불어, 이 정덕 고개는 오가는 길목이 좁았다. 이는 방어에는 유리해도 공격에는 불리하다는 뜻이었다. 한 자루 창처럼 일렬로 쭉 돌파해 들어가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겠지만, 왕국의 무기인 화총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서는 역시 몇 겹의 파도가 되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왕도에서 나서기 전에 정찰병들이 보고했던 적들의 총 숫자는 약 4만이었습니다. 시간과 지형, 흔적을 고려하면, 저들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저들과 같은 숫자의 야인들이 진을 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적들은 언제 동일한 숫자의 원군들이 밀려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이 정도면 전황은 절망적이라고 표현해도 부족할 지경이다.

“음.”

선배는 팔짱을 낀 채 야인들을 내려다보았다. 야인들 역시 늑대 떼를 마주한 승냥이 떼처럼 그런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불온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으르렁거리는 소리만이 융단처럼 깔렸다.

“일단, 나야말로 사과해두어야겠어. 적들 중 적지 않은 자들이 여기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리란 걸 예측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네.”

선배가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북경후가 그런 선배를 위로했다.

“그렇다고 용사의 시신들 곁에서 쉴 수야 없었지 않소이까. 여기서 휴식이란 곧 가면(假免)을 동반하는 것이니, 태반이 잠자리를 설쳤을 것이외다.”

“응… 그치만 이런 상황이 될 줄 알았다면 좀 더 우회를 했을 텐데. 뭐 지나간 일을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여기까지만 할게.”

선배는 뒤를 흘끗하면서 지시했다.

“일단, 병사들에게 식사를 취하라고 전달해.”

선배는 다시 야인들을 내려다보았다.

“저들이 여기로 올라올 필요가 없다는 것, 이 고개의 오가는 길이 좁다는 것. 그 두 가지 부분은 뒤집어 생각하면 이 쪽의 이점이기도 해. 수면을 취하는 건 무리지만, 식사는 가능할 거야.”

턱을 매만지고서, 선배는 이어서 지시했다.

“배변은 교대로 다녀오고. 물은 전부 다 마셔도 좋다고 말해줘.”

“괜찮겠습니까?”

“응. 어차피 우리는 속도전을 해야 하는 상황. 거기다가 병력도 적지. 한 번이라도 패하면 거기까지. 여왕님을 탈환하기 위해 달라붙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어.”

지휘관들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살짝 웃더니 마른 손가락을 펼쳐서 팔랑거렸다.

“너희도 뭣 좀 먹으면서 쉬고 있어. 필요하다 싶으면 바로 부를 테니까. 그러면서 뭔가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싶으면 와서 말해주고.”

지금 당장 그런 발상을 가진 이들은 없었다. 지휘관들은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각자의 부대로 돌아갔다.

나는 선배의 곁에 남았다. 어차피 가진 부대가 없기도 했다.

선배의 곁에 서서, 두동천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내 시선을 기다린 것처럼 완전히 떠오른 태양이 아침의 하늘을 갈랐다. 쪼개진 하늘에서 흘러내린 햇볕이 두동천 일대를 비추었다. 아직 새벽녘이 채 빠지지 않아 자갈들이 드리우는 그늘은 짙었다. 스스로의 그림자에 발치가 파묻힌 탓도 있어, 야인들은 마치 넓은 그늘에서 빽빽하게 돋아난 것만 하나의 말미잘만 같았다.

“표정이 어둡네.”

가볍게, 정수리에 충격이 느껴졌다.

돌아보았다. 꿀밤을 거둔 선배가 건량을 다람쥐마냥 볼 가득히 우겨 넣은 채 우물거리고 있었다.

“너도 뭐 좀 처먹어. 머리도 먹어야 돌아가지.”

“…….”

“처먹으라고요. 똘똘아.”

나는 그렇게 했다. 안장 곁에 매달아 두었던 건량은 말 옆구리에서 배어 나온 땀에 엉망진창으로 뭉쳐 있었다.

아무리 봐도 진흙과 별 차이가 없는 그것을 입에 가져다 대니, 마치 묵은 곡식 가루를 말의 땀에 버무린 것 같은 맛이 났는데, 사실 내가 입에 댄 것이 정확히 그런 것이었다.

내가 중얼거렸다.

“쓰레기 같은 맛이네요.”

“전쟁은 진수성찬의 맛을 하지 않았다. 신월공 말씀. 그러니 도저히 입에 안 맞더라도 힘내어서 냠냠….”

“아뇨.”

나는 우걱우걱 입 안에 든 것을 씹어 삼켰다.

“처음 먹어본 건 아니에요.”

임무 도중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는 역시 악식(惡食)에 강해졌다는 것이겠지. 가죽 수통 안에 든 냄새나는 물로 입가심을 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그런 나를 선배는 다시금 놀랐다는 눈으로 보았다.

“우리 똘똘이 진짜 컸구나….”

음.

“아니 선배님. 아무리 그래도 ‘우와! 편식 안 하네! 훌륭해라!’하고 칭찬받기에는 영 부끄러운 나이인뎁쇼….”

“그치? 근데 그런 새끼가 너였잖니. 참으려무나.”

“저에 대한 평가가 몹시 부당한 게 아닐지….”

“후후.”

선배가 웃었다. 똑같이 수통 안에 든 물로 입 안에 든 것을 넘기고서, 선배는 내가 보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왜? 이럴 줄 몰랐어?”

“…….”

“한 번 진 전쟁을 다시 무승부로 되돌리는 건 끔찍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야. 한 번 잃어버린 신용이 되찾기 어려운 것과 똑같은 이치라고 해둘까.”

“하지만 선배님. 일반인보다는 행실이 불량하던 자가 착한 짓을 하는 게 더 고득점을 받지 않습니까?”

“응? 음… 그렇네. 그럼 아까 그 비유 취소.”

“네.”

“…….”

선배가 다시 내 꿀밤을 때리고, 내가 정수리를 감싸 쥐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이한 태학관 생도들 마냥 시시껄렁한 장난질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우리 둘의 시선은 야인들에게 못 박혀 있었다.

한 마리의 원시 생물처럼 드글거리는 저들의 약점은 어디인지, 이 와중에 저들이 일부 병력을 움직여 우리를 견제하려 들지는 않을지, 만약 그럴 경우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계산하기를 거듭했다.

“말 대가리에 창날을 달고, 말 꼬리에 불을 붙여 우르르 내려 보내어 혼란을 초래한 다음 산발적으로 내려가며 조총 돌진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기책 화마지계(火馬之計)입니다.”

“전쟁을 대륙 소설로 배웠니?”

“일단은 아무 말이나 해보는 겁니다. 의외로 거기서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이제는 없는 조언자들과의 채팅방을 떠올리면서 나는 말을 이었다.

“이런 이치를 두고, 천사님께서는 뇌폭풍(腦暴風)이라 이름했었습니다.”

“천사님은 또 누구?”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진 모르겠는데 이름 겁나 못 짓는구나.”

나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자모신의 용어들은 도무지 근본이란 게 없다.

선배는 머리카락을 긁으면서 팔짱을 끼었다.

“후움… 이름이야 어쨌건. 이치는 알겠어.”

“그래서 화마지계. 어떻습니까?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까?”

“아니 뭐 전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야 모르는 법이니까는…. 그치만 그렇게 해서 이겼다 해도 그 다음에 어쩌려고? 우리 목적은 저 놈들을 몰살시키는 게 아니잖아.”

“네, 여왕님을 되찾기 위해서는 이 전투 이후에도 전투력과 기동력을 유지해야하지요…. 으으음. 그러면, 그러며언….”

불.

말.

두동천.

여울.

터를 잡고 휴식중인 적들.

대치 상태.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불현듯 입을 열었다.

“선배님.”

“응.”

“그, 여기 오기 전에. 시체들 곁에서 지도를 봤지 않습니까.”

선배는 한 쪽 눈을 찡그린 채 기억을 떠올리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기억이 올바르다면, 이 두동천 상류에 둑이 하나 있을 겁니다.”

◈          ◈          ◈

정덕 고개-두동천 일대.

주둔한 야인 17825인 대 추적군 9250인.

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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