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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이 나라를 살림-231화 (231/261)

231. 북쪽으로 (1)

길고 짧은 건 대보아야 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대보기 전부터 긴 것은 길고 짧은 것은 짧다.

둘을 서로 맞대는 행위는 그 전에 이미 확정되어 있던 결과를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한 것이다.

같은 이치에서 전쟁의 승패는 전쟁 전에 결정되어 있다.

가령 왕국이 카한에게 패한 것은, 왕국이 마음가짐부터 기본 전력까지 카한에게 패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패배를 만회할 수 있을지 없을지 또한 승부에 나선 지금 이미 결정되어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 결정되어 있는 주사위 눈을 알 수가 없었다.

◈          ◈          ◈

올 때도 갈 때도 야인들은 요란하게 움직였다.

마치 커다란 곰이 자기가 먹은 짐승의 뼈를 어질러 놓았듯이, 그들은 자신들이 남긴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이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들이 남긴 흔적 중 하나와 마주했다.

“이건…….”

거인이 부러진 쟁기 하나만 갖고서 무작정 땅을 일군 것처럼 파헤쳐진 벌판이었다.

사람의 팔이, 다리가, 머리가, 머리 없는 몸뚱이가 아무렇게나 뿌린 볍씨처럼 흩어져 있었다. 말라붙은 핏물과 터져 나온 분변은 사방 10리 안에 있는 모든 벌레를 끌어 모은 것 같았다. 붕, 붕, 온갖 날벌레들이 날개짓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지독한 냄새는 그 날개 소리에서 직접 풍기는 것만 같았다.

“왕도 수비군들의 시체입니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병사들이 어두운 얼굴로 보고했다.

때마침 동이 텄다. 하늘은 짙은 남빛이었고 동녘은 물기가 묻어나올 것만 같이 끈덕거리는 주홍빛이었다. 살아서 도열했을 적에는 서로 균일한 그림자를 드리웠을 병정들은, 시신이 되어 제각기 기형적인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으로 자신이 맞이한 죽음을 증언했다.

선배는 심각한 얼굴로 턱을 매만지다가, 주변 사람들을 물린 뒤 중얼거렸다.

“아, 개같네. 이쯤에서 한 차례 쉬고 가려 그랬는데, 주변이 이 꼬라지면 그럴 수가 없잖아.”

“…….”

정말이지 어떤 쓰레기 같은 공주 전하가 떠오른다….

혹시 거기 계신가요, 공주 전하? 만약 거기 계시면 귓불을 움직여서 제게 신호를… 아니 됐고, 나는 간이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휴식이 필요합니까?”

“겁나게 필요해. 당장 너부터가… 몸은 좀 괜찮냐?”

“뒈질 것 같습니다요. 상처 덧난 거 아닌지 걱정도 되고요. 그치만 저야 몸이 워낙에 저질이니까….”

“아 뭐, 병사들 몸이 너보다야 좋겠지. 그치만 걔네는 지방에서부터 왕도까지 계속 강행군을 해왔으니 말이야. 왕도 탈환할 때도 미친 듯이 싸웠고. 왕도 나서기 전에 간단한 휴식은 취했지만, 슬슬 다시 피로가 몰려올 시간이거든.”

왕도를 나서면서 했던 연설 뽕도 슬슬 빠질 시간 아니겠느냐고 선배는 덧붙였다.

저승을 유람하고 왔던 나로서도 반박할 수 없었다. 스킬 같은 게 없는 이상 마음은 몸의 애완견에 불과한 것이다. 이따금 호기심에 캉캉 짖으면서 주인을 선도할 수야 있겠지만, 결국 목줄에 지쳐 헥헥 거리면서 주저앉는 것이 정해진 결말이다.

“그럼 조금 더 이동한 다음에 쉬실 겁니까?”

“일단 묻겠는데… 이 시체 벌판 빠져나가는데 몇 시간쯤 걸릴 것 같아? 왕도에 있었던 건 너고, 그러니까 왕도 수비군의 규모에 대해서도 대충 알 것 아냐.”

이전이면 그렇게 물어봤자 할 말이 없었을 거다. 하지만 시현군 시절을 비롯하여 몇 차례 전쟁을 경험했던 덕분에 현장감 정도는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북녘으로 가는 길은, 수백 년의 시차가 있다고는 해도 한 차례 지났던 적이 있던 길이다. 역시나 시현군 시절에 현성이랑 마차를 타고 갔던 것을 떠올리면서 나는 대답했다.

“말을 타고 30분에서 1시간 정도 주파하면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침 그쯤에 하천도 하나 있으니….”

“아, 그렇지. 좋아. 그럼 벗어나서 쉬는 게 좋겠네.”

“다만 선배님. 그 전에….”

나는 선배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조언을 했다. 선배는 호오호오 소리를 내면서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그렇게 하지.”

◈          ◈          ◈

잠시 후, 선배는 지휘관들을 불러 모았다.

“곧 다시 출발할 거야.”

선배는 지도를 펼쳤다.

“지금 가던 속도로 북진하면 1시간 내에 삼담 자작령에 닿게 된다. 이 상황으로 보면 그곳도 무사하진 못하겠지. 하지만 그 부근에는 두동천이라는 하천이 있다. 그 곳에서 잠시 쉬고 다시 흔적을 따라 이동하도록 하자.”

지휘관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중의 한 사람이 이의를 제기했다.

“저 시신들을 수습해야 하오.”

북경후가 소리를 높여 말했다.

“북벽의 책임자가 배신하고, 왕도로 밀고 내려오는 시랑(豺狼)의 무리를 마지막으로 막아낸 용사들이오. 이렇게 비바람을 맞으며 썩어가게 내버려 두는 것은 그들의 충절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오! 그러니….”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우리는 여왕님을 구하기 위해 나선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북경후가 ‘그렇다고 이들을 방치하는 것이 어찌 위정자의 도리겠소이까!’ 하고 말할 수 있게끔 해주고, 다른 영주들까지 끼어들어 ‘맞는 말이다’느니 ‘진짜 중요한 게 뭔지 모르냐’느니 언성을 높이게 만들었겠지.

그러나 나는 나였고, 선배도 나의 선배였다.

“북경후가 말이 지당하기 그지 없어.”

“그렇다고 이들을 방치… 음, 공작 각하. 방금 무엇이라 말씀하신…?”

“북경후, 그대의 말대로라고.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될 일이지. 그렇지 않아도 방금 왕도 쪽으로 사람을 보냈어. 당장 몇 시간 후 왕도에 도착한 원군들을 필두로, 이들을 염하기 위한 행렬을 보내게끔 촉구하는 서한을 들려서 말이야.”

왕도를 나서는 길에 연설했던 것처럼 엄숙한 얼굴과 목소리로 선배는 말했다.

북경후는 남쪽을 바라보았다. 영주들의 시선도 따라갔다. 그곳에는 멀찍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왕도로 향하는 두 병사의 뒷모습이 있었다.

북경후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커험. 하지만 그래도….”

“그것도 이해해.”

선배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심장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감정을 온몸에 둘렀다. 깎아지른 듯 단아한 콧날과 눈매가 아침 햇살을 받아 운치 있는 그림자를 그 얼굴에 드리웠다.

“왕도에서 추가로 사람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이들을 남길 거야. 200명의 병사들이 남아 그 일을 도맡을 건데, 북경후. 그들을 감독할 만한 이를 그대가 천거해주면 감사하겠어.”

선배는 북경후의 양 어깨를 짚고서 말했다.

북경후는 난처한 듯 입술을 어물거리다가 대답했다.

“음… 중요한 일인 만큼, 내가 믿는 자를 남기겠소이다. 마침 200이면 주성 자작이 데리고 온 병사들과도 일치하니….”

“고마워! 믿겠어. 그럼 결정된 대로 주성 자작은 여기 남아 용사들의 시신을 수습해줘. 잘 하겠지만, 결코 미진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얼떨결에 남게 된 주성 자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방침이 정해지자, 선배는 싱긋 웃으면서 자신의 말을 끌었다.

“좋아. 그럼 출발하자.”

그리하여 15분도 지나기 전에 추적군은 다시금 이동을 시작했다.

◈          ◈          ◈

“에휴, 진짜.”

선배는 말이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기 빨린 얼굴로 축 늘어졌다. 투덜거림이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왕도 나오는 데에만 5백. 시체 더미들 만나서 2백. 와. 뭐냐 이게. 전투 하나 없는데 전력은 야금야금 깎여 가네.”

“정치의 연장이 곧 전투니까요.”

“그래… 흠. 그런데 똘똘아. 네 덕분에 시간 손실도 병력 손실도 최대한 줄일 수 있었지만, 이대로 괜찮을지 모르겠다.”

그 푸념 어린 어조에 나는 선배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차렸다.

“북경후의 체면을 세워줄 필요가 있다는 부분 말입니까?”

“오.”

선배는 나를 돌아보면서 눈을 깜빡거렸다.

“진짜 어쩐 일이래…. 이런 식의 직접 조율은 아직 내가 더 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우리 똘똘이 진짜 어른 됐네.”

나는 쓰게 웃었다. 이 또한 죽었다 살아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한 발 앞서 의제를 설정하고, 일방적으로 우위에 서서 상대를 논파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평소 얄미워하던 정적이 말 한 마디 못한 채 어버버 하면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면 심장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승자의 [쾌감]이란 패자의 [고통]인 것이다. 그리고 즐거움은 쉬이 날아가는데 비해 흉터는 깊이도 스미어 남는다.

압도적으로 이기면 압도적으로 이길수록, 도리어 뿌리가 깊은 화근을 만들게 되는 모순.

만약 쌓아 둔 권력이 충분하고, 그것을 통해 혹시 있을지 모를 후환까지도 대비할 수 있다면 항상 승리하며 지낼 수 있을 테지만, 그렇게 언제까지고 누군가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도무지 수지에 안 맞는 장사다.

‘당장 카한 일동이 돌아가면서 내 혓바닥을 뽑고 싶어 하기도 하고….’

역설적이게도,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적당한 패배]를 제공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선배 또한 신월공의 후계자로서 머리가 아닌 몸으로 그런 일들을 경험해왔던 것이리라. 선배는 턱을 매만졌다.

“후음. 어떻게, 어떤 꽃을 갖도록 배려해주면 좋으려나…. 두동천 닿을 때까지 할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이거나 이야기하면서 가기는 무슨, 전원! 적이다!”

선배가 소리쳤다. 마치 벼락이 잠시 사이를 둔 다음에야 천둥으로써 울려 퍼지듯, 선배를 따르던 군세는 일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번쩍 정신이 든 얼굴로 고개를 쳐들었다.

나 역시 고개를 들었고, 그리하여 지평선 너머에 주춤 멈춰선 야인들을 보게 되었다.

1백? 2백? 대단한 숫자는 아니었다. 아마 1개 부족 규모일 것이다. 그들이 왜 거기에 있는지도 명백했다.

그들은 왕도 수비군의 시체들로부터 각종 장비들을 벗겨내고 있었던 것이다.

‘낙오한 부족인가? 아니면 탈영? 정리되지 않은 전장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이 와중에 해야 하는 일인지 약간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왕국민이라고 별다를 것 같지 않다는 생각 역시 들었다.

소규모 영지들이 서로 병사를 내어 전쟁을 벌인다면 어떤 영지는 일탈하게 마련이다. 모든 영지가 강철 같은 통솔 아래 단합되어 있더라도 용병단 중 하나는 비슷한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적을 깔보는 것을 멈추었다.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괴물처럼 여기지도 않기로 했다.

‘선배 말마따나, 적도 한 덩어리가 아니다, 이 말이지.’

마치 우리 왕국민들처럼.

‘같은 인간이다.’

한 때 내가 부정했던 말이, 그러나 마음 깊이 가슴에 울렸다.

같은 인간이라면, 이기는 것 또한 당연히 가능할 테니까.

그렇게 내가 마음을 다지는 동안, 선배는 그 야인들의 모습을 또 다른 기회로 활용했다.

“북경후!”

다급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선배는 소리쳤다.

“앞질러 가! 돌파 후 반전! 퇴로를 막아! 저들 중 누구도 살아 도망치게 해서는 안 된다! 본대에 보고가 들어가게 된다면 여왕님의 구출 자체가 미궁에 빠질 수도 있다!”

왕도를 나설 때에도, 왕도에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사자를 보냈다고 할 때에도 그랬던 것처럼 듣는 사람을 덩달아 흥분하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북경후 또한 다급하게 외쳤다.

“알겠소이다! 태산군! 펼쳐!”

북경후가 자신에게 속한 병력들을 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말에 탄 기병들이 북경후를 축으로 하여 실시간으로 좌우 간격을 벌리기 시작했다.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거듭 소리쳤다.

“안무 자작! 동안 자작과 협력하여 저 뒤를 받쳐라! 성곡 자작은 후방을, 패하 남작은 우측면의 야산을 경계하도록!”

지휘관들은 즉각 대답했다.

“예, 각하!”

“알겠습니다, 각하!”

그러는 동안, 북경후의 군세는 부채처럼 넓게 펼쳐졌다. 두두두두두! 약 1천의 기병은 그렇게 3겹의 파도로 화해 쏘아졌다. 그중 선두에 선 3백이, 아마도 특히 정예병들이었는지, 달리면서 총에 화약을 장전했다.

쏘았다.

탕……! 타당……! 탕……!

“컥!”

“으억!”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의 야인들이 그물코에 꿰인 고기떼마냥 벌러덩 넘어갔다. 마상 사격임에도 불구하고 3백 발의 동시 사격은 촘촘한 화망(火網)을 형성했던 것이다.

뒤이어 길게 기른 머리카락처럼 흩날린 흑연이 알싸한 냄새를 풍겼다.

북경후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고함쳤다.

“총 놔! 창 들어!”

기병들은 그렇게 했다. 북경후는 아직 선배가 옮긴 흥분이 가득한 목소리로 거듭 외쳤다.

“저 놈들을! 용사들의 최후를 모욕한 저 야적들을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그와 동시에, 전열의 기병들이 야인들을 한 차례 뚫고 지나갔다.

“으아악!”

“크악!”

그 돌격이 쓸고 지나갔을 즈음에는 이미 야인들 중에 서 있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물론 그렇다고 하여 2진, 3진의 돌진이 멈추지도 않았다. 야인들은 자신이 벗겨내려던 시체들의 동료가 되어 그 자리에 누웠다.

아군의 사상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          ◈          ◈

정의부 평야 전투.

낙오한 야인 158인 대 추적군 9천 3백.

승리.

수훈자 북경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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