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228화 (228/261)

228. 왕도 시가전 (2)

선배는 볼을 긁적였다.

실용주의자와 1 대 1로 이야기할 때 좋은 점은 쓸데없는 탐색전을 대폭 생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선배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익을 말해봐.”

“선배님과 선배님의 군대는 훌륭한 깃발 아래 모였습니다. 그리고 방금 그 깃대가 보강되었죠. 여기에 여왕 폐하를 구해내기까지 한다면, 선배님께서는 대하의 물에 원하는 가격을 매길 수 있게 될 겁니다.”

“위험은?”

“실질적인 위험은 여왕 폐하를 구해내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실패할 경우 선배님은 비참해지겠지요. 성공하실 경우에도 그렇게 강대한 권력자가 되실 테니까 바람 잘 날이 없을 테고요.”

“성공할 경우의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과로사의 위험에 시달리실 겁니다. 선배는 전통적인 봉건주의자니까요. 평소부터 ‘받은 만큼 해주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실제로는 의도적으로 인과관계를 뒤집으신 것이지만, 그래봤자 ‘누리기 위해서는 잘 해야 한다.’는 거니까 결론은 바뀌지 않지요. 선배는 자신이 가진 권력만큼 스스로에게 의무와 일거리를 부여할 테고, 음, 행운을 빕니다.”

“염병. 그리고?”

“암살의 위험에 시달리실 겁니다. 선배를 대척점으로 삼는 반대 세력들이 만들어질 테니까요. 선배가 무언가를 할 때마다 비판하고 무언가를 하려 할 때마다 딴지를 걸어대겠죠. 거기에 대처하려면 도덕적으로 완벽해지거나 권력적으로 압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숨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문제는 흠 없는 권력자와 대적할 수 없는 권력자 둘 다 암살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선배가 빵을 한 입 깨물었는데 심장이 아파올 적에, 이 독은 내가 성자여서 들어간걸까 압제자여서 들어간걸까 고민하시는 건 별 도움이 안 되시겠죠.”

“제기랄.”

선배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 동안 의원은 내 붕대를 모두 감고는 얌전히 뒷걸음질 쳐서 선배에게 다가갔다. 선배는 그런 의원의 머리를 개 등가죽 만지듯 쓰다듬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선배가 물었다.

“거꾸로, 여왕님을 구하지 않을 경우의 이익은 뭘까?”

탐색전을 생략한 상황에서, 상대가 나만큼 똑똑할 때의 나쁜 점은 거짓말을 할 수도, 얼버무릴 수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옷고름을 여미면서 답했다.

“안전을 얻으실 수 있지요.”

말을 이어갔다.

“선배님께는 지금 간발의 차로 늦었다는 핑계가 있습니다. 또한 은월 수호단과 수도 상비군, 관료 귀족들이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변명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왕국을 구하지 못한다고 해도 손가락질 당하지 않을 수 있는 면죄부가 있다.

“대의명분 하에 모인 군사력을 선배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 군사력으로 합법적 왕도 약탈을 감행하고, 차후 적이 될 것 같은 녀석들은 적당히 꼬라박아 녹여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해서 터를 잡은 뒤 카한 측과 화의를 하면 무난하게 지역의 맹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카한이 왜 화의를 해줄까?”

“카한 측은 이미 여왕님을 사로잡았습니다. 전쟁의 명분을 달성한 셈이죠. 왕국 전체에서 몇 차례 조직적인 약탈을 벌이고 나면 실리적인 부분에서도 만족할 겁니다. 그러고도 카한 측이 계속 강경세로 나온다면 그건 자존심 문제인데…. 이미 선배님은 카한 측에 줄 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요.”

그 말에 선배의 눈동자가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나는 시선을 흘기면서 계속 말했다.

“정 화의가 안 될 경우에도 제함도를 제압할 수 있을 만한 측근과 군사력만 갖고서 제함도로 튀면 도주 노릇은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느 쪽이건, 선배가 여생을 편히 그리고 안전하게 보내길 바라신다면….”

“여왕님을 구하는 척만 하고, 실제로는 구하지 않는 게 낫다 이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는 팔짱을 낀 채 침음성을 흘리면서 천장을 향했다.

밤이었다. 피를 안 뺀 사냥감의 내장처럼 후텁지근한 공기가 맴돌았다. 선배의 침묵은 그것과 같은 온기와 냄새를 지닌 것이었다.

이윽고 그 침묵을 깬 선배의 말 역시 그와 꼭 같은 성질을 갖고 있었다.

“여왕님이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창문에서 달빛이 비쳤다. 선배의 얼굴은 역광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선배는 그 상태 그대로, 꺼낼 필요가 없는 말들을 굳이 꺼냈다.

“나도 여왕님도 여자지. 나는 왕후도 국서(國壻)도 될 수 없어. 내가 여왕님을 구해내는데 성공해서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우뚝 서고, 그에 따른 위험요소들을 모조리 극복한다고 해도, 한 세대가 지나 여왕님의 피를 이은 왕자 왕녀들이 생겨나면 반드시 문제가 벌어지겠지.”

“….”

“편안한 말년이 보장되지 않는 계획에는 끌리지 않는걸.”

“아니요.”

나는, 선배의 생각이 더 썩기 전에 입을 열었다.

“잘못 말씀하셨습니다, 선배님. 정확한 단어를 올바른 곳에 배열해야 제대로 된 문장이 되지요.”

선배는 팔짱 낀 그대로 나를 흘끗했다. 그 입가에, 현재 선배의 직위처럼 초승달을 닮은 미소가 그려졌다.

“흐응. 그 말 오랜만에 듣네. 태학관 시절 생각나는걸.”

“졸업하셨으면 좀 더 성장하셔야죠.”

“아하, 열 받아라. 기껏 배려해서 설명해줬더니 개 같은 딴지나 걸어대는 거 봐. 그래서 똘똘아. 내가 지금 어디를 어떻게 잘못 말했는데?”

“선배는 저와 함께 여왕님을 맞이하러 갔던 일원 중 하나였지요.”

나는 그 날의 풍경을 떠올리면서 말을 이어갔다.

“선배님과 저는 그날, 이 나라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후미진 산골에 발을 딛었습니다. 그곳에서 활과 화살을 든 여왕님을 마주했지요.”

“그랬지. 그래서?”

“선배님께서는 여왕님이 갖고 계신 정통성이라는 것이, 한낱 실록의 글귀 몇 줄과 여왕님이 갖고 계신 눈동자의 색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선배가 멈칫했다.

나는 선배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상황에서, 왕도는 침탈당했습니다. 고관대작과 고위귀족들이 일소되었습니다. 여왕님마저 사로잡혔습니다. 지금, ‘나라’와 ‘나’ 사이에 놓인 거리감이 그 어느 때보다도 미궁에 빠진 겁니다.”

감정이 뜨거운 자, 머리가 아닌 가슴에 충실한 자에게는 어느 때보다도 가까운 거리감을 느낄 것이다. ‘내가 이 나라를 되찾는다.’, ‘내가 해낸다.’는 열망이 가득할 테니까.

하지만 실용주의자, 항상 머리 한켠으로 주판을 튕기는 자에게는 그것이 거꾸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방금 말씀하신 논지를 따라가면 더더욱, 선배는 [편안한 말년이 보장되지 않아서] 끌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먼저 내 호흡을 바로잡고서, 뒤이어 선배의 말을 바로잡았다.

“[자기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그만한 위험을 무릅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겁니다.”

왕가의 일원이 될 수 없다, 대귀족이자 권신으로 자리잡아봤자 말년과 후대가 위태로워질 뿐이다….

그 모든 말들이 선배의 내심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합니다.”

나는 선배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선배님의 사업]으로 만드십시오.”

힘주어 말했다.

“그러기 위한 포석으로서, [전임 사장]을 구출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정적이 있었다.

◈          ◈          ◈

선배는 긴 시간 침묵했다. 그 침묵은 유구하여,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 세상에 영원할 사직이 어디 있겠는가.

- 그러니 오늘 우리가 망하고 저들이 융성하는 것은, 우리가 모자라고 저들이 풍족해서다.

- 천명이 바뀐 것이다….

그때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여왕님의 이야기를, 지금 나는 고개를 조아린 채 떠올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선배가, 툭 던지듯 입을 열었다.

“너를 아꼈는데.”

어둠 속에 그 말이 주사위처럼 구르고, 다음 순간 은광이 번뜩였다.

팍…!

빠르고 깔끔한 검격이 방 안의 밤을 갈랐다. 가로로 쪼개진 공기 속에서, 검격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의원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의원은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 입술 너머로 흘러나온 것은 피거품뿐이었다. 의원은 고개를 돌려 선배를 바라보려 했지만, 그 전에 몸을 푹 떨구었다. 의원은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끌려들어가듯 죽었다.

“정말 아꼈거늘.”

한 차례 더, 선배는 툭 던지듯이 말했다. 스스로 살인멸구한 시체를 내려다보던 그녀의 시선은 잠시 후 나를 향했다.

“네가 죽인 거야, 똘똘아.”

“아니요.”

나는 곧바로 받아 쳤다.

“선배님께서 죽이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대놓고 역천(逆天)을 말했잖아. 듣고 있던 녀석이 화를 입지 않을 거라 여겼다면 무지한 것이고, 상관없다고 여겼다면 사악한 것이지.”

“애초에 둘만 이야기하는 자리에 저 의원을 머무르게 하신 건 선배님이었습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튈지 몰랐다면 방심하신 것이고, 아무래도 좋다고 여기셨다면 악독한 것이죠.”

“아, 개새끼…. 말 한 마디를 안 지네. 그냥 니가 죽인 걸로 합의하면 안 될까, 똘똘아?”

“조건이 있습니다.”

나는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몸과 함께 낮아진 시야 속에 의원의 얼굴이 들어왔다.

“저 의원의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의원의 얼굴을 기억하면서, 나는 질문했다.

선배의 그림자가 달처럼 기울었다. 올려다보지 않아도 그 얼굴이 의아함에 차있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다녀온 저승에 대해서도, 그리하여 여왕님을 데려가리라고 결심한 곳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잠자코 기다릴 뿐.

결국 선배가 대답했다.

“그래. 그 녀석의 이름은--.”

나는 그 이름을 기억했다.

이번 임무를 완수해야 할 이유가 한 명의 목숨만큼 더 늘어났다.

‘아니, 한 명이 아니지.’

여왕님을 구하기 위한 싸움에서도 희생자는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희생자는 나나 선배보다는 이름 없는 병졸들이 될 터였다.

나는 그것을 자각했고, 마음 속 깊이 기억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오게 될 자리를 마련해두었다.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는 선배가 나를 기다려주었다.

내가 말했다.

“저는 선배님의 새 사업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이미 임무를 통해 한 차례 해보았던 일이다.

나는 종교를 만들어보았다. 법률을 만들어보았다. 국왕을 만들어보았다.

나라를, 만들어보았다.

“여왕님을 구해주시면,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수그렸다.

“도와주십시오.”

“…….”

선배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를 듣고 싶네.”

나를 향한 선배의 눈동자는 제함도에서 내려다본 밤 바다를 닮아 있었다.

“내가 얻을 이익은 알겠어. 구출한 여왕님으로부터 선위(禪位)를 받는다. 나 혼자 창건하는 것보다는 훨씬 모양새가 좋아지지. 가지고 갈 것과 버릴 것을 나 좋을 대로 선택할 수 있을 거야. 망국의 책임과 시대의 모순, 민초들의 불만 같은 건 모조리 여왕님한테 떠넘길 수 있을 테고.”

그럴 것이다.

“여왕님도, 카한의 포로로 남는 것보다는 선양의 왕으로 남는 게 모양새가 낫겠지. 그 뒤에 평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을지, 아니면 어느 날 대하에 퐁당하실지는 변수가 너무 많으니 속단할 수 없겠지만, 어느 쪽이든 명예는 지킬 수 있으실 거야.”

그럴 것이다.

“하지만 니가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여왕님을 구하고 싶어하는지는 통 모르겠단 말이야.”

선배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한숨을 내쉬었다.

“꼭 무슨 심장에 열병 걸린 니 동기마냥… 똘똘아. 넌 그런 새끼 아니잖아. 왜 그래?”

“선배님이 세울 나라에서 한 자리 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요. 개국공신으로서요.”

“그건 나나 니 후배한테 들어맞을 소리지. 넌 그런 새끼도 아니잖아. 권력보다는 재물 지향. 야망보다는 안전 지향. 가늘고 길게가 니 신조 아니었어?”

나는 쓰게 웃었다.

선배는 그런 나를 보면서 피를 닦아낸 칼을 검집에 수납했다.

“설마하니 여왕님께 반한 건 아니겠지? 그런 거면 조금 질투해버리는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흐응. 해서, 왜?”

나는 의원의 시체를 한 차례 더 바라보았다. 그리고 붕대에 감긴 상처를, 화살이 뚫고 지나갔던 자리를 손으로 짚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죽었다 깨어났거든요.”

내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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