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227화 (227/261)

227. 왕도 시가전 (1)

“그래서 똘똘아. 너는 여기서 뭘 하고 있었니?”

선배의 눈가는 서글서글했다. 눈웃음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웃음은 새벽녘의 이슬보다 졸여낸 독미나리를 닮아 있었다.

“설마하니 너 자신을 방금 말한 ‘관료로서 역할을 다한 인물’ 중 하나라고 지껄이진 않을 거지? 에이. 아무리 똘똘이라고 해도 설마 그런 소릴 할까. 사람 새끼면 그 정도로 뻔뻔하진 않을 거야.”

‘아뇨, 진짜 관료로서 역할을 다했는데요. 제가 말이죠, 여왕님 대신 화살도 맞고! 다 했어요 아주.’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벌어진 사실 그대로라고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많은 경우 믿고 싶은 것이란 믿기 쉬운 것이다.

자존감이 낮다는 평가를 받을 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여왕님 곁을 마지막으로 지켰다는 건 믿기 어려웠다.

‘방금 전 무책임한 관료, 귀족들을 대신하여 사죄한 것 정도로는 그 신뢰의 난이도를 낮출 수가 없겠지….’

나는 분주하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재산을 챙기기 위해 남았다고 말하면 다시 병사들이 들끓을 테고.’

좀 더 믿기 쉬운 것, 그러면서도 적개심을 자극하지 않는 것을,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나는 입에 담아야 했다.

“실록을 챙기기 위해 남았습니다.”

나는 고개를 조아린 채 말했다.

“사직이 누란의 위기에 처한다 해도 그 맥(脈)이 끊기지 않도록 방비하는 것이 사관의 역할이고, 개국 시절부터 뿌리를 둔 하현의 역할이 아닙니까… 하고 번드르르한 소리를 늘어놓지는 않겠습니다, 선배님.”

“그러면?”

“아시다시피 저는 제3사관 아닙니까? 1사관과 2사관 왈, 준비는 자신들이 수배해 놓을 테니 저더러 실제 작업을 총괄해 달라 말하더군요. 등신 같이 그 말을 믿고 기다리다 보니 그만 탈출할 때를 놓쳤습니다…. 상관들의 명을 아랫사람인 제가 어떻게 거부할 수 있었겠습니까요.”

‘실제로는 가문 빨로 상관들을 굴려 먹고 있었지만.’

그 정도야 선배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배가 병사들을 향해 말했던 것처럼, 나 또한 병사들을 상대로 말하는 중이었다.

‘요컨대 나 또한 윗사람의 갑질에 희생당한 피해자라 이거지.’

흔히 벌어지는 일이고 알기 쉬운 일이다. 조금 전 바닥에 이마 찍기까지 했던 터라 병사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역설적인 일이지만, ‘병사들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선배의 눈치를 살폈다.

‘여기서 선배가 어떻게 나오느냐가 중요해.’

선배가 나를 받아들인다면, 이쯤이 딱 내 어깨를 털어주고 일으켜 세워줄 시간이었다.

반대로 선배가 ‘개소리하네.’ 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일축한다면, 날 그냥 구태 세력의 본보기로 삼아 죽이고 끝내겠다는 소리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 권리는 지금 선배에게 있었다.

‘그치만 그럴 거면 애초에 발언 기회를 이렇게 많이 주지 않았을 거야.’

거기에 더해서, 선배는 연출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연출하는 이유는 그 연출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이 웃음기 많은 선배는 철저한 실용주의자다.

‘선배. 저는 그보다는 [쓸모]가 있습니다.’

나는 선배에게 열심히 눈길을 보냈다.

‘함께 태학관을 다녔으니 알고 계시지요? 저는 머리가 좋습니다. 그뿐 아니라 일을 할 줄 알지요. 즉 살려 둘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선배는 여전히 진득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독심술 스킬을 쓸 수 없다고 해도 그 생각을 읽기는 어렵지 않았다.

‘쓸모 있는 녀석은 그 가치만큼 위험한 법이지. 똘똘이는 머리가 좋으니까 그쯤은 알지?’

그렇다.

자신의 가치를 강조하여 살아남고자 한다면, 그 과정에서 반드시 상대에게 쥐여 주어야 할 것이 세 가지 존재한다.

“선배님… 새로이 초승달의 주인이 되신 신월 공작 각하.”

나는 선배를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선배는 싱긋 웃더니 턱을 괴었다.

“전자로 부르려무나.”

좋아, 사적인 호칭을 허용한다는 것은 좋은 징조다.

나는 고개를 조아린 채 말을 이어갔다.

“예, 선배님…. 그렇게 시기를 놓쳐 궁에 남게 된 한심하기 그지없는 저입니다만, 조금 전 말씀하신 바는 정말이지 가슴에 사무쳤습니다.”

“호오, 그래서?”

“제가 좋은 집안을 타고나 곧장 관직에 오른 터라, 모아 놓은 재물들이 다소 있습니다. 제 죄를 눈꼽만큼도 씻을 수는 없겠습니다만, 선배님과 선배님께서 데리고 오신 용사들에게 소정의 재물이라도 바칠까 하고….”

첫 번째.

자신의 가치 중 일부를 ‘선불’로 제공할 것. 그리고 그 선불은 상대가 필요로 여기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시대이건 군대를 움직이는 데에는 돈이 들게 마련이지.’

그러므로 군대의 주인은 아무리 청렴한 자라도 돈을 돌처럼 볼 수 없게 마련이다.

실용주의자답게, 선배는 현찰을 제공하겠다는 내 말에 흥미를 비쳤다. 다만 덥썩 물지도 않았다.

“흐음, 재물이라. 나쁘지 않네. 그치만 똘똘아. 그냥 널 쥐어짜면 좀 더 간단히, 그리고 좀 더 많이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언뜻 위협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나는 오해하지 않았다.

“농담이 과하십니다, 선배님…. 선배님은 도적단의 우두머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선배님이 이끄는 용사들도 도적이 아니고요.”

“아하핫.”

선배가 웃었다. 잘 연마된 종을 울린 것처럼 예리하고 청명한 웃음이었다.

“그렇지. 맞아. 우리는 카한과 그 군세로부터 왕국을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거지, 빈 수도를 약탈하러 온 것이 아니니까.”

방금 선배의 이 말 또한 내가 아닌 병사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번드르르한 말에 납득하지 못하는 자들이 또한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자들 대부분은 곤란하게도 일반 병졸들보다 높은 지위를 꿰어 차고 있다.

그런 자들을 달래는 대신, 선배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그 시선을 받아 말했다.

“물론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의무를 저버린 자들’의 가산은 적몰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이는 본디 여왕 폐하의 재가가 필요한 일이기는 하나, 그 여왕 폐하께서는 지금 위기에 처하신 상황입니다.”

나는 고개를 조아린 채 말을 이어갔다.

“이 국난을 타개하기 위해 현장 지휘관이신 선배님께서 여러 가지 책(策)을 강구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저는 거기에 적극적인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족합니다만 사관을 맡고 있던 몸이니까요.”

두 번째.

자신을 앞으로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사용설명서를 건네어줄 것.

세 번째.

눈에 보이는 상하관계를 명확히 하고 자신의 목줄을 상대에게 쥐여 줄 것.

“아핫.”

선배는 다시 웃었다. 은수저로 사기그릇을 두드린 것처럼 명랑한 웃음.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선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벅저벅 걸어온 그녀는 허리춤에 매인 검을 빼어 가볍게 휘둘렀다.

툭 소리와 함께, 날 묶고 있던 밧줄이 풀려나갔다.

“좋아, 똘똘이. 나 신월공은, 그리고 우리 모두는 너를 환영한다.”

선배는 내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우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바로 이쯤이 공치사를 하기에는 딱 적절한 시간이다.

“읏….”

나는 몸을 움츠린 채 숨을 삼켰다.

척하면 척이라고, 선배는 그런 내 옷고름을 풀어냈다….

“꺄악.”

“…아, 똘똘아. 뭐하냐. 나도 모르게 벨 뻔했거든…?”

“죄송합니다, 제 정절이 침범되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그만…. 읏, 아, 아무튼 이어서.”

“그래… 음. 아니, 똘똘아! 이 상처는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중간에 잠깐 헛소리가 들어갔지만, 나와 선배 사이의 역할극은 충실하게 이루어졌다. 선배가 내 몸에 난 화살 자국을 보면서 언성을 높인 것이다.

나는 더없이 괴로워하는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다.

“카한의 군세… 놈들이 쏜 화살에 맞았습니다…!”

“세상에! 그런 상처를 입고도 지금까지 조용히 있었단 말이더냐!?”

“저의 상처는 사사로운 것이니까요…. 선배님과 선배님을 따르는 용사들이… 마음에 입은 상처에 비하면…!”

“아아, 그래서 참고 있었던가! 의원! 어서들 의원을 불러와라!”

“괜찮습니다, 선배님…! 저 따위보다는, 선배님을 따르는 용사들을 더 챙겨주심이…!”

“무슨 소리냐! 너 역시도 훌륭한 용사로다!”

그리고 선배는 나를 와락 끌어 안았다. “꺄아앗.” 다시금 내가 나도 모르게 거부하고 말았지만 선배는 그런 내 등을 주먹으로 쳐서 조용히 만든 다음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보여주는 건 이쯤이면 되겠지. 똘똘아. 이제 둘이서 이야기 좀 할까?”

“물론입죠.”

어른들끼리 이야기할 시간이다.

◈          ◈          ◈

조용한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선배는 양 팔을 펼치면서 심호흡을 했다.

“후아~ 역시 똘똘이는 똘똘해. 대가리 삐꾸들 데리고 일하다가 너랑 얘기하니깐 살 것 같다 아주.”

나는 내게 붙어 상처를 돌봐 주던 의원을 내려다보았지만, 선배가 어련히 알아서 준비했을까. 인두에 지져진다 해도 입 꾹 다물고 있을 선배의 심복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선배와 둘만 있다는 것처럼 부담 없이 물었다.

“상황이 그렇게 안 좋습니까?”

“말도 마. 여왕님이 잡혀가 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젠장. 나 완전 심장 쫄려 뒈질 뻔했다니까.”

선배가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었다.

“왕도 상황은 어땠어?”

음.

“뭐가 어땠겠습니까. 북벽에서 그 새끼가 배신하고, 수도 상비군이 전멸하고… 개판이었죠.”

“누가 여왕님 들고튀려는 시도는 안 했고?”

“많이들 했죠. 하지만 공작가 사병들 정도로는….”

“은월 수호단을 뚫을 수가 없었다는 거지….”

“네. 단장 그 녀석은 진짜 충신이었으니까요. 여왕님은 마지막까지 궁에 남아 있겠다 하셨고, 제 동기는 그런 여왕님의 뜻을 존중했습니다.”

선배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의 상황과 방금 이 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권력의 속성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여왕님 본인에게는 별다른 권력이 없다. 날 비롯한 관료와 귀족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왕님은 여왕님이라는 이유만으로 권위의 상징이 되기에는 충분하다.

성지를 발견하지 못하여 종교 지도자로서의 은월과 정치 지도자로서의 은월이 나뉘지 못한 이 세계에서, 은월의 피는 여전히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위를 모조리 상징하는 왕관 중의 왕관이다.

이 외세 침략 상황에서 지방 영주들의 군사동맹이 위기에 빠진 여왕님을 손에 넣는데 성공한다면, 왕도를 구원한다는 명분에 두 가지 권위가 더해지게 된다.

야심가로서는 차기 권력자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을 기대할 만하고, 군사동맹의 주인으로서는 군사동맹이 강하게 결속된다는 데에서 안도감을 느낄 만하다.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왕국이 멀쩡해야 하는 것 아니냐, 혹은 카한의 군세를 물리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은 사람의 욕망과 기대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다들 계획을 세울 때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게 마련이다.

하지만 여왕 폐하의 소실은 그런 계획을 뿌리부터 박살내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동맹의 지도자는 속되게 말하면 닭 쫓던 개 같은 상황이 되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도적떼로 탈바꿈하기 직전에 놓인 군벌들의 일시적인 우두머리 같은 신세가 된다.

결국, 시종일관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과 달리 선배 또한 느긋한 처지는 아니었다는 거다.

‘하긴 느긋한 군사 지도자 같은 게 세상 어디에 있을까….’

내가 군사 계통의 일에 종사하지 않았던 이유다. 돈을 쌓아 놓으면 도둑맞을 걱정과 강도질 당할 걱정만 하면 되지만, 개를 모아 놓으면 물려 죽을 걱정도 같이 해야 하니까.

“어쨌든 똘똘이 네 덕에 한숨 넘겼다. 고마워.”

선배가 말했다. 내가 적절히 대응해준 덕분에 병사들은 스스로를 도적떼가 아닌 왕국을 구원하기 위해 나선 병사들이라 자각할 수 있었고, 명분만으로는 배부르지 못할 자들도 차후 있을 ‘합법적 왕도 약탈’을 약속 받고 인내심을 발휘할 거라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상, 이 군대는 좀 더 선배의 지휘를 따라 주리라.

“무슨 말씀을요, 선배님. 저야말로 고맙지요.”

다시 말해, 선배를 설득하는데에만 성공한다면---.

“선배님.”

이 군사력은 내가 원하는 대로 투사할 수가 있다.

“함께 여왕님을 구하러 가시겠습니까?”

나는 선배를 올려다보면서 그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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