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226화 (226/261)

226. 간신이 가진 것들 (3)

야밤의 복도.

손에 든 것이라곤 창 하나밖에 없는 상황.

내 체력은 보잘 것 없고, 내 솜씨는 하찮기 그지없다.

그런 상황에서 네 명의 적수를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응, 뒈졌네.’

그렇게 한 마디로 정리한 다음 신속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뭔가 방법은 없나?’

내가 가진 모든 선택지를 떠올렸다.

‘숨는다… 안 돼. 이제 와서 기척 없이 숨을 시간은 없어. 도망… 안 돼. 내 속도로는 금세 따라 잡힐 거야. 전투… 어떻게 한 놈은 끌고 갈 수 있으려나? 아, 뒤에 저 녀석이 든 거 소형 철포잖아. 이것도 안 되고. 차라리 항복? 그 다음 기회를 엿본다거나… 이게 그나마 현실적이군.’

방금 내가 죽인 야만 전사를 흘끗했다.

‘문제는 이 상황에 저 놈들이 항복을 받아줄까인데.’

거기에 대해서는 곧장 해답이 떠올랐다.

‘받아준다.’

내가 왕국의 귀족이라서? 아니다. 말단이 죽이기엔 너무나도 중요한 인물이라서? 아니다.

‘내 혓바닥 뽑고 싶잖아, 카한 이 개자식아.’

심호흡을 했다.

창을 쥔 손이 떨렸다. 임무에 들어서기 직전 마지막 여왕님이 해준 말이 아니더라도 북방 야만족들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대륙과 왕국이 손을 잡고 북방을 고독(蠱毒)의 항아리로 만들었다. 가장 잔혹하고, 가장 악랄한 자만이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 자들의 우두머리가 내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 거다. 항복하여 끌려가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참한 미래일 것이다.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살아남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거기에 매달려야만 한다.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나는 하현 공작가의 차남이다!)”

저 녀석들의 말을 모르는 만큼 대륙어를 썼다. 네 명이나 있으면 대륙어를 아는 녀석은 하나쯤 있을 테니까.

“(포로로서의 대우를 요구한다! 그대들의 수장, 카한이 나를 원할 것이다! 나는 하현 공작가의 차남으로 당대의 제3사관(史官)을 맡고 있는….)”

그렇게 창을 꾹 움켜쥔 채 눈 의 네 명을 노려보며 소리쳤을 때였다.

“하현의 둘째 공자? 당대 제 3사관이라고?”

왕국어였다.

그것도 아는 목소리였다.

내가 엉거주춤 서있자니, 선두에 선 자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스며든 달빛이 그 인물의 모습을 비추었다.

“똘똘이 아냐? 니가 왜 여기에 있냐?”

남전도 계, 다시 말해 나투아인의 핏줄을 강하게 타고난 여인이었다.

키는 휘영청했지만 몸에는 각이 잡혀 있었다. 외곽을 이루는 선들은 턱선과 콧날을 포함하여 돌을 깎아낸 것처럼 뾰족했다. 피부는 워낙에 희어, 짙은 남빛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대조적으로 검게 느껴졌다.

내가 그녀를 불렀다.

“선배.”

신월 공작가의 후계자가 소형 철포를 어깨에 얹은 채 웃어 보였다.

◈          ◈          ◈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태학관 생활. 그동안 알고 지낸 이들은 많고 많지만, 정말 깊은 인연을 맺은 이들은 손에 꼽을 만하다.

까놓고 말하면 나투아와의 전쟁이 끝나갈 무렵 떠올렸던 세 명이 전부다.

태양처럼 뜨거운 피를 담고 있던 동기.

세상의 그늘을 혼자서 끌고 다니던 후배.

그리고 늘 웃으며 살아가던 선배.

‘음.’

이렇게 말하니 내 인맥이 굉장히 좁게 느껴지는데, 착각하지 마시라. 그저 깊게 사귀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왜 한정되어 있는가 하면, 내가 똑똑하고 잘생겼기 때문이다. 그런 인물은 으레 최상급의 난이도를 지니고 있게 마련. 날 공략하기 위해서는 사소한 대화로부터 내 생일을 알아낸다거나, 내가 좋아하는 선물을 해주는 등 꾸준하게 노력할 필요가 있다.

다만 안타깝게도 태학관에 그만한 노력가들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똘똘이 또 뭔가 개 같은 생각 하는구나?”

그 노력가 중 한 명이 히죽거렸다.

나는 헛기침을 했다.

“선배님… 여기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나? 왕국을 구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던 중이었지. 그러는 넌 여기서 뭐하고 있었니?”

“어휴. 저도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요.”

선배가 활짝 웃었다.

“그렇구나! 우리 똘똘이 내가 아주 믿고 있었다니까.”

나도 활짝 웃었다.

“네. 그러니까 이거 좀 풀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나는 묶인 손목을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

선배는 다시금 활짝 웃었다. 그리고 입이 아닌 발로 화답했다.

퍽…!

무릎 꿇고 손목이 묶인 상태에서 안 아프게 걷어차이는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런 방법을 모르겠다. “헉,”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수그리자니 억센 손아귀가 내 뒷머리를 가죽째 물어뜯었다.

선배는 웃는 그대로 내 귓가에 대고 으르렁거렸다.

“똘똘아.”

“네, 선배….”

“똘똘아, 똘똘아. 아, 존만한 똘똘아…. 지금부터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해. 개소리 또 지껄이면 개밥 된다, 우리 똘똘이. 알아들었니?”

내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개들이 먼저 짖었다. 컹, 컹! 송아지만한 덩치를 가진 남전도 투견들이 먼저, 신월 공작가의 제복을 입은 병사들이 그 다음이었다.

“쓰레기 같은 놈!”

“왕국을 좀먹는 벌레 같으니!”

“너 같은 놈이 이 나라를 망친 것이다!”

“더러운 간신 새끼!!”

그렇다.

나는 지금 신월 공작가의 임시 사령부에 끌려온 상태였다. 얼마 전까지 해도 귀족과 고관들이 웃으며 노닐던 왕궁 연회장은 살기등등한 병사와 투견들로 가득했다.

솔직히 개판이었다.

그 속에서 한 때 벗이었던 신월 공작가의 후계자는 내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알아들었냐고, 우리 똘똘이. 개 같은 생각 하지 말고 좀. 응?”

이런 굴욕적인 상황에서 내가 과연 어떻게 반응할 것 같은가?

“어떤 게 궁금하십니까, 선배님? 헤헤. 묻기만 하십시오.”

선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똘똘이 넌 참, 평소엔 짜증과 가증이 합체해서 만들어진 것 같은 주제에, 이따금 이 새끼 그냥 확 죽여 버릴까 싶을 땐 기가 막히게 눈치가 빠르더라. 어떻게 그러는 거니?”

“그야 선배님께서는 평소엔 저를 귀여워하시면서 이따금 살해충동에 시달리시니까….”

“죽겠니?”

“살겠습니다.”

냉큼 대답했다.

선배는 ‘이 새끼 진짜 뭘까….’ 하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혀를 끌끌 찼다.

“그래, 똘똘아. 살고 싶으면 잘 대답하렴.”

선배는 의자를 하나 끌어와 그 위에 앉았다. 그리고 등받이에 양 팔을 포개어 올린 채 턱을 괴고는 입을 열었다.

“아랫것들을 지키는 것은 위에 서는 자의 의무다. 평소에 좋은 먹거리, 예쁜 옷가지, 아름답고 현명한 짝을 우선적으로 맞이하여 번식할 권리를 갖고 있는 건, 언젠가 위기가 닥쳐왔을 때 그 수호의 의무를 다할 것이라는 믿음에 뿌리를 두지. 모든 지배자들은 신용을 가불해서 먹고 사는 것이다. 똘똘아, 우리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했을 때 서로 여기까지는 동의했었지?”

나는 머릿속을 되짚었다.

“어. 이 부분에 대한 토론은 선배가 태학관 졸업하기 전에 대충 8년 3개월 만에 이어 하는 거지만, 예. 선배의 전통적인 봉건주의적 가치관을 제가 존중해드렸죠.”

“뒈지겠니?”

“연명하겠습니다.”

“그래보려무나. 해서 나는 북벽이 뚫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망설이지 않았단다. 즉각 손닿는 병사들을 데리고 왕도로 올라왔지. 그런데 올라와 보니 이게 무슨 오뉴월에 흘레붙은 개꼬라지가 따로 없네? 왕도는 불타고 있고, 수도귀족입네 고관대작입네 하고 거들먹거리던 것들은 모조리 도망치고 없더라.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선배는 서글서글하니 웃으면서 말했다.

신월 공작가의 후계자가 지어 보인 미소는 절벽 위에 둥지를 튼 독수리처럼 매서웠지만, 나는 침착하게 그녀의 안색을 살피면서 말했다.

“음. 물론 신월의 후계자이신 선배님께서는….”

“아. 그거 말인데.”

선배가 손가락을 퉁겼다.

“일단 한 가지 정정해두도록 할까.”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딱 하는 소리, 그리고 내 시야의 사각 쪽에서 무언가가 툭 내던져졌다.

데굴데굴 굴러와 멈춘 그것이 사람 머리라는 것을 나는 알아보았다.

‘음.’

그거야 놀랄 일도 아니었다. 잘린 머리 하나하나에 간이 떨어질 시기는 예전에 지났으니까.

하지만, 그 머리의 주인에 대해서는 놀랄 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월 공작 각하…?”

“-였던 사람이지.”

자기 아비의 머리가 땅바닥을 구르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참으로 여상스럽기 그지없는 말투로 선배는 말을 이었다.

“그 또한 의무를 다하지 않고 도망쳤다. 재산과 첩만 한 수레 챙기고 헐레벌떡 도망치다가 지원군을 이끌고 올라오던 나와 마주쳤지. 명예 없는 자가 생명의 보호를 부탁하더군.”

선배는 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괴었다.

“그래서, 벴다.”

그 목소리 또한 여상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신월의 후계자가 아니다. 대충 12시간 전에 작위를 계승하여 새로운 신월 공작이 됐거든.”

“….”

“하여, 새로운 신월 공작이 다시 한 번 묻겠다.”

선배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날 내려다보았다.

“똘똘아. 우리 똘똘아. 대귀족의 혈족이자 권신의 말단아.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니?”

정적이 흘렀다.

◈          ◈          ◈

‘말을 잘 골라야 해.’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상황을 냉정하게 보면서 머릿속을 회전시켰다.

‘지금 선배가 바라는 것… 즉 [목적]은 뭐지?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해서… 무책임하고 비겁한 수도 귀족들과 관료들을 비판하고 싶은 것뿐인가? 배신감을 느껴서?’

그럴 리는 없었다.

아무리 소박해 보인다고 해도 선배는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이 아니다.

태학관에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함께 보낸 나는 선배의 일거수일투족에 항상 연출적인 바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방금 이것도 그래.’

자신의 아비를 벤다. 그 목을 아무렇게나 내던진다. 그가 책무를 다하지 못한 자라고 잘라 말한다.

이 모든 것은 다분히 연출적이었다.

‘보여주기 위해서다.’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인지는 자명했다.

‘자신이 끌고 온 병사들한테.’

컹, 컹! 시끄럽게 짖어 댈 때마다 개들의 입가에서 침이 튀었다. 병사들은 그런 개들의 목줄을 굳이 잡지 않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모두가 분노한 가운데 선배는 홀로 여유로이 날 내려다보았다.

‘무책임한 수도귀족들과 책임을 다하는 자기 자신을 대조해서 보여준다…. 그 과정에 계승을 끝마친다. 가문의 오명도 적극적으로 지워 없앤다. 선배다운 일이야.’

그리고 그렇다면, 내가 보여주어야 할 반응 또한 명백한 것이다.

“예, 선배님…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지요.”

나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말을 이어 나갔다.

“귀족이 왜 귀족입니까? 선배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위험할 때 맞서 싸우기 때문에 그들은 귀족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정작 위험이 닥쳐왔을 때 이들은 의무를 다하지 않았습니다! 누릴 것을 모두 누린 주제에 누구보다 재빨리 도망친 것입니다!”

마치 공개 재판에 끌려 나온 죄인이 자신의 죄를 자백하듯이, 나는 묶인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감쌌다.

“아! 얼마나 무서운가! 이 죄악! 이 무책임이라니!”

“….”

“선배님께서 구국을 위해 용사들을 데리고 올라오셨을 적에 얼마나 기대하셨겠습니까? 그 기대가 깨어졌을 적에는 또 얼마나 분노하셨겠습니까? 그 마음을 저로서는 차마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왕도에서 가장 많은 관료를 배출한 하현의 일원으로서 저는 사죄해야 마땅합니다….”

나는 쿵 소리가 나게 이마를 바닥에 찍었다.

“죄송합니다!”

한 번 더 내리찍었다.

“죄송합니다아!”

선배는 그런 날 막지 않았다.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개들이 짖는 소리는 한층 요란해졌고, 그에 비해 병사들의 살기는 다소 누그러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에 스미게끔 턱을 젖힌 채 말했다.

“하지만 선배님…! 믿어주십시오. 이해해주십시오. 모든 귀족들이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모든 관료가 책임을 팽개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역할을 다 한 자들도 있습니다. 예. 당장 신월 공작가의 후계자이신 선배님이나… 제 동기 녀석처럼요.”

여왕님을 지키기 위해서 근위병들 - 은월 수호단 - 을 이끌고 산화했던 그 녀석을 언급하는 내 말에는, 과연 선배도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반응을 보였다.

“그런 식으로 죽기에는 아까운 녀석이었는데.”

음.

“확인하셨습니까?”

“응. 그 녀석 시체라도 염해주려고 알현실로 향하던 길이었지. 겸사겸사 궁에 남아있는 야만족 놈들도 제거하고. …이렇게 너란 녀석과 마주치는 건 예상 외였지만.”

선배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말했다.

나는, 이마의 아픔에 대해서도 눈에 들어간 핏물에 대해서도, 그리고 동기 녀석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바가 있었지만, 끊어 없앴다.

감상이 아닌 사실에 집중했다.

‘그 말은 왕궁을 둘러싼 싸움에선 선배가 이끄는 병사들이 승리했다 이거군.’

그나마 희망적인 사항이었다.

‘오래 갈 것 같진 않지만….’

병력의 양과 질을 생각해보면 어디까지나 선봉에 일시적인 승리를 거둔 것에 불과할 거다. 적들이 태세를 정비하고 내려오면 속절없이 밀리게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선배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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