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224화 (224/261)

224. 간신이 가진 것들 (1)

카한과 그의 군세는 왕궁으로부터 빛마저 약탈해간 것이 틀림없었다.

빛이 사라진 곳에서 어둠은 실체를 지닌 채 군림했다. 그것은 모포처럼 피부를 짓누르고 모래처럼 옷 속으로 스미었다.

어둠이 풍기는 체취는 비리고 매캐한 체취 속에서 나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우선은 정지.’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야 제대로 움직일 수 있어.’

그렇게 완전히 기척을 죽이고 나서, 나는 확인해야 할 것을 확인했다.

‘임무 창.’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야리소연. 비류아. …아리야.’

역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좋아.’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여왕님이 경고해준 것처럼, 이 현실 세계에는 자모신 시스템을 비롯한 [반칙]이 없었다.

‘바로 그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지.’

각오를 새롭게 다지기 위해서도, 앞으로를 위해서도.

‘그리고 그런 반칙이 없다고 해도 말이지….’

이제는 사용할 수 없게 된 자모신 시스템이지만, 그 시스템을 통해 저승 임무를 수행하면서 나는 몇 가지 교훈을 배운 바가 있다.

‘현재 상황을 퀘스트처럼 정리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

나는 내가 수행했던 첫 번째 임무를 떠올렸다.

임무명, 난이도, 보상이나 입주민, 실패 시의 대가 따윈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제한시간과 클리어 조건.

그중에서도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이번 임무의 클리어 조건은 뭐지?’

저승에서 임무 돌입 전에 확인했을 때에는 쓰여 있지 않았으나, 추론하여 가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왕님을 구해내는 것.’

그것이 이번 임무의 클리어 조건.

다시 말해 내가 달성해야만 하는 [목표]다.

‘이 목표만 달성할 수 있다면 어떤 방법을 쓰던 상관없어.’

정말로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상관없다.

그것을 나는 태고의 숲에 불을 지름으로써, 박해자들의 도시로부터 도망쳐 나옴으로써, 계명을 날조함으로써, 모든 악덕을 짊어지고 새 시대의 기틀이 됨으로써 내내 증명해왔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모신 시스템이 내게 남긴 교훈 중의 하나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상관없다]는 게, [그 방법들을 실제로 쓸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지.’

가령 내가 갑자기 대검 한 자루 들고 카한의 군세를 뒤쫓아 하나하나 족칠 수는 없다. 단기 대결을 통해 카한의 대가리를 쪼개고서 여왕님을 탈환할 수도 없다.

나는 무왕 이세가 아니다. 애초에 대검도 없다. 그러니까 그냥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다음으로 확인해야 할 것은….’

슬슬 어둠에도 눈이 익기 시작했다.

고개를 수그리자 가슴께에 툭 튀어 나와 있는 화살 꽁지가 보였다. 몸을 조금 뒤척이자 지옥 같은 통증이 가슴과 등 양쪽으로부터 전신을 뒤덮었다.

안 그래도 허약한 주제에 화살까지 맞아 부상을 입은 성인 남자.

그것이 현재 내가 놓인 [상태]였다.

‘임무에 들어섰을 때에도 항상 빙의체 상태부터 확인했었지.’

만감에 잠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냉정하게 상태 파악을 이어갔다.

‘피는… 멎은 지 좀 됐구나. 화살은 몸을 완전히 뚫고 나갔고. 내장은 다치지 않은 것 같아. 미치도록 아프지만, 손끝부터 발끝까지 어떻게 다 힘이 들어가는 걸 보면 근육이 다친 것 같지도 않고.’

그야말로 [나 자신의 몸]이 아니라 [임무 수행을 위해 빌려 쓰는 빙의체]에 대고 그렇게 했듯, 스스로를 완전하게 객관화시켜서 관찰을 이어 나갔다.

‘화살이 아예 몸을 관통했다는 건 차라리 다행이구만. 야만족 놈들이 쓰는 화살촉은 질이 안 좋은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촉이 몸에 박힌 채 기절했다면 지금쯤 쇳독이 올라서 뒈졌겠지. 출혈이 이쯤에서 멎은 것도 이 화살이 거꾸로 마개 역할을 해준 덕분일 거야.’

손끝에 힘을 주었다가 풀기를 거듭하면서, 나는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이대로 놔둘 수도 없지.’

더 이상 채팅방은 없다.

어째서 놔두면 안 되나요, 하고 묻는 아리야도, 거기에 풍부한 야전 경험을 바탕으로 대답해주는 비류아도 없다.

‘이대로는 고통 때문에 움직이는데 제한이 생겨. 어떻게 참고 움직인다고 해도 몸 안에서 이리저리 쓸린 화살대 탓에 다시 피가 날 테고. 그리고 화살촉만큼은 아니라도 이 화살대도 깨끗하진 않아. 언제 만들어져 얼마나 야만족 놈들의 전통 안에 묵었는지 알 수 없는 물건…. 지금까지 독이 안 오른 게 요행이야.’

그렇지만 임무창이 없더라도 혼자서 목표를 정립하는 것이 가능하듯, 채팅방이 없더라도 자문자답을 통해 상황을 명료하게 만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뽑아야 해.’

그 가능한 일을 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지?’

그렇게 나는 내가 가진 [도구]들을 점검했다.

‘가진 것은, 일단 옷… 관복. 습격당한 바람에 찢어지고 헤진…. 빌어먹을 자식들. 나름 비단으로 만든 거였는데. 하긴 벗겨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 잠깐만.’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벗겨가지 않았지?’

심지어 신발과 혁대까지 멀쩡했다.

찢어진 비단옷이야 그 가치가 헐해 보여 넘겼다고 쳐도, 신발과 혁대는 언제 어디서나 제 값을 받을 수 있는 물건이다. 그런 것을 가만 놔두다니, 야만족으로서 그 본분을 다하지 못한 셈이었다.

‘내가 돌 속에 파묻혀 버리는 바람에?’

그렇지만 척 느끼기에도 날 뒤덮은 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카한의 굴강한 병사들은 이 따위 돌쯤 간단히 치우고 날 끄집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도 이상해.’

확인 사살을 당하지도, 끌려가지도 않았다는 뜻 아닌가.

‘그러지 못할 사정이 있었다? 카한의 병사들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기에?’

아니.

‘애초에 알현실은 왜 이렇게 무너져 있지?’

꼬리를 무는 의문들.

오래지 않아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아니… 나중에 생각하자. 정보가 부족해서 답이 안 나와.’

그렇게 의문들을 끊어내고, 재차 도구 점검에 들어갔다.

‘옷 있고. 신발 있고. 혁대 있고. 그밖에 [지금] 보유한 물건들은 없다….’

말 그대로 몸뚱이 하나만 갖고 있는 상황.

하지만 그것이 내가 빈 손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스킬.’

현실 세계에 물론 그런 것은 없다.

하지만 스킬이란 결국 그 사람이 몸에 익힌 기술을 뜻하는 말이다. 시스템의 보조를 받아야만 사용할 수 있는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다.

‘내가 익힌 기술.’

타고난 언변.

태학관에서 쌓아온 지식.

그리고, 임무들을 수행하면서 축적된 경험.

‘나의 원천.’

그것들을 바탕으로 나 자신의 육신을 다시금 도마 위에 올렸다.

‘태학관에서 배운… 그리고 임무들을 수행하는 과정에 익힌 의학 지식을 총동원해서 내 몸을 치유한다.’

화살을 어떻게 제거하면 좋지?

‘부러뜨려 뽑을 수는 없어… 단순히 그걸 시행할 만한 근력도, 그걸 버틸 만한 정신력도 지금 나한테는 없으니까. 그러니 가운데를 절단하고… 쑥 밀어 넣듯 하면서 뒤로 잡고 빼내야 해.’

그거면 되나?

더 필요한 것은 없나?

‘뽑으면 다시 피가 터지겠지. 그걸 막을 것… 지혈을 도울 게 필요해. 고약(膏藥) 같은 게 있다면 좋겠지만 없으면… 아.’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왕궁의 알현실.

무너져 내 주변을 덮고 있는 돌쩌귀들은 평범한 벽돌이 아니었다. 왕국 위인들의 얼굴을 모사하여 음각한 돌쩌귀가 깨어져 그 허연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과연.’

겉보기엔 그저 음산하게 느껴지는 그 광경이 내게 깨달음을 건네주었다.

‘천장 장식… 석회암… 아아. 지금 내 피가 멎은 것도 그래서… 나는 돌 속에. 석회가루의 지혈 작용.’

부서진 왕국 위인들의 조각상, 그 가루가 내 몸을 희게 뒤덮고 있었다. 빠르게 피가 멎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아아.’

왕궁의 알현실에 장식이 있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 장식 중에 돌로 만든 조각들이 포함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예술에 쓰이는 돌들 중 세 가지 으뜸을 꼽으라면 대리석과 석고와 석회가 포함되는 것 역시 지당한 노릇이다.

그러니 석회 장식이 놓인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 장식이 왕국 위인들을 본떴다는 것 역시 신기할 것은 없다.

하물며 석회에 지혈 작용이 있다는 것은 우연에 불과하다.

언제나처럼 자그마한 조각들로 분해하면 결국 그 정도.

내가 살아남은 것에 숙명이니, 위인들의 보살핌이니 하는 것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잠시간.

아주 잠시간, 나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수그렸다.

‘갚겠습니다.’

아주 잠시였다.

현실에서 시간은 유한한 자원이었다. 가난한 자는 감사하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법이다.

‘지혈은 석회가루를 뭉쳐서… 찢어진 옷자락에 얹어서 하자. 더 나은 약을 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이야. 그럼 남은 건 화살을 절단할 무기… 칼… 아니지.’

나는 쓰게 웃었다.

스킬이 시스템의 보조를 받아야만 사용할 수 있는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듯, 화살대를 절단하는 것 역시 번듯한 금속으로 만든 명검이 있어야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다.

‘돌.’

나는 내 주변에 널린 돌들 가운데 대리석 조각을 집어 들었다. 적당히 묵직하면서 끄트머리가 뾰족하게 부서진 돌쩌귀였다.

야리소연의 시대에 쓰이던 물건.

‘석기.’

아직 금속을 다루지 못하던 시대, 사람들이 가혹한 자연에 맞서 처음으로 손에 쥐었던 [무기]를 나는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좋아.’

도구를 마련했으니 구체적인 방법을 떠올릴 차례다.

‘모루로 삼을 만한 것… 적당히 받침이 될 만한 돌쩌귀 위에 화살대를 올린 다음, 대리석 조각으로 내리쳐서 부순다.’

제기랄, 생각만 해도 아플 것 같다.

‘그렇게 아플 테니까 잘못하다가 이가 부러지지 않게끔….’

나는 한 손으로 혁대를 풀어 입 안에 물었다. 돌가루 뒤덮인 가죽 맛에 입 안이 온통 텁텁해졌지만, 참았다.

석회 가루도 한 웅큼 들어 옆에 놓은 다음, 비단 관복도 찢어진 결을 따라 당겨 찢어내어 놓았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다음에는 천천히 상체를 움직여 화살 꽁지를 돌 위에 비스듬히 올렸다.

“흡…!”

그것만으로도 바르르 화살이 떨면서 끔찍한 통증을 안겨주었지만, 역시 참았다.

혁대를 문 치아에 힘을 준 채로, 나는 대리석을 들어올렸다.

심호흡을 했다.

후려쳤다.

캉……!

“윽…!!”

빌어먹을, 아슬하게 빗나가 버렸다!

돌과 돌이 맞부딪혀 생겨난 충격이 어깨뼈를 울렸다. 어설프게 자극 당한 화살대가 한 차례 부르르 떨면서 요동치는 바람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혈류를 타고 퍼졌다.

‘젠장….’

어쩔 수 없다.

나는 가리비수가 아니다. 모서아도, 제사장도, 유미조차 아니다.

지금 난 몸 쓰는 일에는 젬병인 약골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그간 임무를 수행하면서 스킬 빨로 도끼 무쌍을 찍었던 감각이 남아 아슬하게 빗맞힌 것이다.

‘다시 하자.’

거칠어진 숨을 가라앉히면서, 대리석을 높이 들고는 화살대에 조준을 맞추었다.

‘하나, 둘….’

후려쳤다.

캉……!

“큽,”

다시 들어올려, 찍었다.

캉…! 캉…!

“으, 흐읍,”

그리고.

쾅……!

이윽고, 뚝 소리와 함께 화살이 두 쪽으로 부러졌다.

“읍……!”

요동치는 화살을 타고 혈관 안에 불이 번졌다. 온몸을 일주한 불길이 심장을 시꺼멓게 그슬렸다. 어깨로 숨을 쉴 적마다 피어 오른 연기가 식도와 혀뿌리를 익혔다.

‘빌어먹을….’

이렇게 아픈데, 아직 끝나지가 않았다.

‘빌어먹을!’

덜덜 떨리는 한 쪽 팔을 돌려 화살을 꾹 잡았다.

거칠게 부서진 통에 살짝 뻗친 화살대 끄트머리를 바라보면서 후우, 후우, 숨을 몰아쉬었다.

이를 악물고서, 손에 힘을 주었다.

당겼다.

“으그으으윽……!!”

눈앞이 번쩍했다. 그리고 잠시 기억이 날아갔다.

그 잠시가 지나고 나서, 나는 뽑혀 나온 화살을 집어던졌다.

“후우,”

준비해 두었던 석회 가루와 옷자락을 양손에 들었다. 꾹 짓눌러서 벌어진 상처를 막았다.

“후우… 하아, 후우….”

다행히 피가 크게 터지진 않았던 모양이다. 끈적하고 눅눅한 느낌은 오래지 않아 잦아들었다.

고통도, 함께 잦아들었다.

“후우우….”

입을 벌렸다. 잇자국 난 혁대가 바닥에 떨어졌다.

“….”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흉터처럼 남은 고통이 온몸에 잔물결을 일으켰지만, 억눌렀다. 저벅, 저벅, 그대로 걸어가, 벽처럼 쌓인 돌쩌귀를 치워 길을 만들었다.

나는 알현실에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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