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가지 않은 길 (3)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마지막 여왕님은 한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훑었다. 맺혀 있던 짓궂은 웃음이 그 가느다란 손가락의 갈퀴에 떼어져 나갔다.
“희한한 일이지요.”
여왕님은 무엇이 희한하다는 것인지 설명했다.
“당신들이 왕족의 핏줄을 찾아 제 앞에 서기 전까지 저는 산에서 사냥을 하며 살아갔습니다. 제가 알던 세계는 산과 그 인근의 마을에 불과했습니다. 그 세계가 조금씩 커지더니 어느덧 ‘나라’라는 것을 마음에 담게 되었습니다.”
여왕님의 숨결에 침음이 섞였다.
“절 감싸고 죽은 당신이, 물러서지 않았던 근위병들이, 그 밖에 이름을 갖지 못한 많은 이들이 제게 그것을 심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라고 여왕님은 말을 이었다.
“후회와 원망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도리어 저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습니다.”
“….”
“당신의 희생에. 근위병들의 희생에. 그밖에 이름 없는 이들의 희생에. 저를 살리기 위해 그 목숨을 바친 이들로 말미암아 저는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비참하고 가혹하더라도, 저의 삶은 그들의 죽음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왕님은 자신의 가슴을 짚었다.
“그러니까, 살아야만 한다.”
자모신이 인정하는 불행한 삶에 대해, 여왕님은 가문돔 회를 먹으면서 규정한 바가 있었다.
“살아서 기억해야만 한다고, 이 기억을 누군가에게 전해야만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여길 수 있었습니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 단 한 차례도 자신의 의지로 살아보지 못한 삶.
“…그 때문에 저는, 자모신을 만나 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산골에서도, 왕궁에서도, 그리고 그 뒤에도 그런 삶을 감당해야 했던 여인의 목소리는 피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질었다.
◈ ◈ ◈
그 여신은 보랏빛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 그대여, 불행한 삶을 살았던 아해여.
자모신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았다. 그것을 들은 귀는 벅찬 포만감뿐 아니라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 바라지 않았는데 태어나, 원하지 않은 삶을 살다가, 희망하지 못한 죽음을 맞이한 아이여.
설탕으로 이루어진 사막 한복판에 선 것처럼 엉거주춤한 자세로 마지막 여왕은 자모신을 내려다보았다.
- 그대가 옥좌를 맡고 있던 나라의 시조는 저와 약조를 나눈 바 있었어요.
이 세상의 신은 자그마했다.
누구라도 품어 안을 만큼 왜소하고 누구라도 들어 올릴 만큼 가벼웠다. 그러기에 누구라도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이 이 세계의 신이었다.
자그마한 여신은 마지막 여왕을 올려다보면서 조용히 물었다.
- 소원이 있나요?
◈ ◈ ◈
다시금 바람이 불었다.
바람의 흐름은 아기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것처럼 곰살 맞았다. 스스로 아파질 때까지 짧게 손톱을 깎고 또 다듬어 손톱 끝보다 손가락 끝이 먼저 닿도록 만든 어미의 손가락 같았다.
그 바람에 우리는 몸을 맡겼으며,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여왕님은 자신의 어깨를 감싼 채 그 다정한 여진(餘震)을 감당했다.
여왕님이 말했다.
“그리하여 저는 나라를 살려 달라고,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먼저 내 가슴을 짚었다.
목 안쪽에 쌓인 무거운 것을 눌러 삼킨 다음에야 말할 수 있었다.
“어째서 자기 자신을 행복해지게 해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신에게 청구서를 보낼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에 무엇을 적어 넣겠는가.
“어째서 이토록 불행한 삶을 보내게 했느냐고 따지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대체 왜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냐고 캐묻고… 그 동안의 불행을 묻고도 남을 만큼 행복해지게 해달라고, 불행한 삶에 대한 배상과 보상을 해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자신을 챙기지 않았느냐는 말에 여왕님은 시선을 흘겼다.
“당신이 했던 말을 빌자면, 간신이여. 저는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여왕님은 뒷짐을 졌다.
그뿐이었으나, 나는 그 말이 함의를 짚어낼 수 있었다.
“불행한 삶을 사셨기 때문에….”
그것이 첫 번째.
“그리고, 살아생전 나라가 멸망하는 모습을 완전히 보신 다음에야 눈을 감으셨기 때문입니까.”
나는 그 명제를 조금 더 풀어 말했다.
“그 모습이 가슴 속에 남아있는 동안에는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다고 여긴 것이군요.”
여왕님은 다시금 웃었다. 바늘에 찔려 배어 나오는 피처럼 살짝.
“예.”
그 한 마디 수긍에서 나는 또 한 번 어떤 불행한 삶을, 한 사람의 일생을 느꼈다.
많은 일을 겪은 사람은 당연히 말할 것이 많다.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많이 겪은 사람은 그 태반을 어둠 속에 묻게 된다. 말해봤자 변하지 않는 일들을 겪은 사람들은 말할 수 있는 일부조차 시커멓고 진득하니 졸이고 만다.
나는 그녀가 말하지 못한 것들, 말하지 않은 것들을 말했다.
“아리야는 저로 인해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
“만약 제가 마지막 임무를 수행한다면, 거기에 성공한다면… 그래서 여왕님을 구한다면, 여왕님께서도 다른 삶을 보낼 수 있게 됩니까?”
당신은.
그 불행했던 삶이 아니라, 다른 삶을, 가령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있는가.
“….”
여왕님은 목의 흉터를 어루만졌다.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말씀드렸지만 험난하기 그지없는 임무입니다. 성공시켜봤자 커다란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평온하게 눈을 감으면, 이 곳에서 영원한 행복을 맞이할 수가 있는데. 당신은,”
행복이란, 불행한 삶들의 존재로부터 눈을 돌릴 수 있는 힘이라고 구호는 말했었다.
“당신은 행복해지기 위한 재능이 넘치는 사람일 텐데.”
그 말에 나는 앞서 했던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흑치사라의 말도, 여왕님 본인이 입에 담았던 ‘행복의 조건’에 대해서도 입에 담지 않았다.
다른 것을 말했다.
“임무에서 정신을 잃었을 적에, 이따금 꿈을 꾸었을 적에. 그렇게 가끔씩 이 세계와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졌을 무렵에.”
살려주세요, 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어떤 말을 들은 것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목소리를 실제로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저는 그런 말을 들을 기회가 없었거든요.”
저승에서는 물론이요, 저승에 오기 전에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저는 언제나 그 말을 듣고 있었던 것이지요.”
나는 여왕님의 목에 난 흉터를 눈길로 쓸었다.
“여기. 저승에서는 사람의 모습을 인상에 맞추어 인식한다고 여왕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자모신 렌즈에 대해 설명하시면서요.”
“….”
“그리고 저는 지금 이런 모습을 한 여왕님을 보고 있습니다.”
녹이 슨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마지막에 뵈었을 때보다 키가 큽니다. 마르셨습니다. 머리가 짧아지셨습니다.”
가열당한 도자기처럼 정중해진 당신의 말투를 듣고 있다.
“여왕님께서는,”
나는 지금,
아니, 항상,
“그 온몸으로 제게 살려 달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비명을 듣고 있다.
듣고 있었다.
“…그래서.”
여왕님이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그 불행한 아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겠다는 겁니까?”
마지막에 보았을 적에, 마지막 여왕님은 순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내가 자신을 감쌌을 적에는 아주 잠시 놀랐을 뿐, 곧 함께 가겠노라 약속해주었다.
“또 한 번, 그 때처럼?”
여왕님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카한과 그의 군세가 상정 이상으로 잔혹했던 탓일 것이다.
“집어치우십시오. 답지 않습니다. 사실 그때도 답지 않다는 걸 알았을 것 아닙니까.”
죽음은 유예되었다. 그 사이에 긴 고통이 있었다. 여왕님은 더 이상 담담하고 의연한 반응을 보여주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탓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완고함은 내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비류아.’
개천식 임무 당시의 그녀도 지금의 여왕님과 비슷했다.
이렇게 세월에 굳어진 완고함을 나는 이미 극복한 바가 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았던 이가 손주의 엉덩이를 두드리게끔 만든 바가 있다.
내겐 지난 아홉 개의 메인 퀘스트를 수행한 실적이 있고, 쌓아온 경험이 있다.
여왕님의 인생이 품은 무게에, 나는 짓눌리지 않았다.
“간신이여, 저는 마지막 옥좌에 앉아있던 사람입니다. 왕국도 떳떳한 곳만은 아니었습니다. 계속 말하지만 그 업보가 돌아온 것이라고 여기면 되는 것이고,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자모신과 함께 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기도 하고요. 저는….”
“여왕님 한 분만을 위해서 그리 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여, 나는 조용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여왕님. 여왕님은 방금 스스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자신의 행복을 바라지 못한 이유가 살아있는 동안 나라 잃은 백성들의 고초를 보아왔기 때문이라고.”
“…그랬습니다만.”
“그렇다면, 제가 여왕님을 구하는 것은 그들 또한 구하는 셈이 되지 않겠습니까?”
“….”
여왕님은 입을 다물었다.
나를 향한 쏟아지는 시선의 무게를, 나는 정면으로 받아내며 말했다.
“저승의 입주 조건은 사람들의 기억과 개입으로 인한 운명의 변화지요. 야리소연의 시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던 이유는 아마도 그 조건을 ‘모든’ 이에게 닿을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일 겁니다.”
돌이켜보면 지금 저승에 있는 모든 입주자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꾸준히 굽이친 끝에 마침내 크게 그 방향성을 튼 역사의 큰 강 속에서 그들은 모두가 그 수혜를 입은 것이다.
자모신 3 업데이트 패치는 그에 대한 허가증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 이대로는 반쪽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크게 역사가 달라짐으로써, 나도, 마지막 여왕님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존재하지 못하게 된 것이 과연 그렇게 단 둘 뿐일까?
큰 뿌리가 아니라 잔가지에 불과한 서브 퀘스트를 달성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생사가 뒤바뀌곤 한다. 그렇게 살아난 사람이 낳았던 아이만큼이나, 그로 인해 태어나지 못하게 된 생명들 또한 많을 것이다.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 생명들. 자연히 기억될 수도 없는 존재들.
나. 마지막 여왕님.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던 세계의 사람들.
“여왕님.”
일국의 왕을 일컬어 국체(國體)라 말하고는 한다. 그 몸에 나라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여왕님은 사라진 왕국을 기억하시지요.”
보통은 근사한 수식어로 끝나는 그 말이, 그러나 지금은 의미 그대로의 진실을 나타내고 있었다.
“여왕님의 심장 안에는 우리가 살아가던 왕국 전체가 담겨 있습니다.”
나는 쓰게 웃으면서 볼을 긁적였다.
“저도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여왕님 단 한 사람을 외면하는 것은, 그래요. 마음을 냉정하게 먹는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수십만, 수백만의 운명이라면, 과연 저 같은 놈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냉정하게 먹더라도, 아니, ‘마음을 냉정하게 먹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다.
“….”
여왕님은 조용했다.
잠시 후 입술을 열었을 때에도 그 목소리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실패하면 당신은 죽습니다.”
“메인 퀘스트 수행할 때마다 경고창에 쓰여 있던 글귀로군요.”
“스킬은 쓰지 못합니다. 조언도 받을 수 없습니다. 저승 입주자 시야도 얻을 수 없고 과거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런 게 없을 적에도 제법 성공한 삶을 살았었지요.”
“실패하면 이 저승의 왕국도 사라져버릴 겁니다…. 당신이 죽으면 이 모든 이들을 기억해줄 이도 사라지니까요.”
과연.
그건 곤란하다.
그러니까.
“꼭 성공해야겠네요.”
“성공하더라도!”
여왕님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어깨를 움츠린 채, 시선을 떨구고, 주먹을 꾹 쥐고서 카랑카랑하게.
“성공하더라도, 이 저승에, 당신이 만든 낙원에 다시 올 수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당신은 명백하게 ‘살아있는 자’가 되니까요! 그런데도 당신은,”
“만약 임무에 성공하고. 그래서 천수를 누리고 죽는다면 말이에요.”
나는 볼을 긁적였다.
“음. 저도 제법 불행한 삶을 산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여왕님 말마따나 꿀덩이를 포기하고 똥밭에 구르겠다는 건데… 흠. 그렇게 되면 뭐랄까… 여왕님께서 만나 뵈었던 그 자모신인지 뭔지를 저도 뵐 수 있지 않을까요?”
“뵈어서,”
여왕님의 조각난 목소리가 더듬더듬 울렸다.
“뵈어서, 어쩌시겠다고,”
“일단 패치니 렌즈니 시스템이니. 이게 다 왜 이 따위냐고 따져야지요.”
“그런--- 그딴 걸, 위해서,”
“그리고.”
나는 천천히 걸었다.
“제 천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어쩌면 그냥 눈 깜빡할 시간이 지난 다음에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바로 그 때에.”
내가 할 일을 다 마친 다음에.
“그때 다시 여기에 오게 해달라고 하면… 그러니까, 그때야말로 입주자로 받아달라고 하면 말이에요.”
어깨를 수그린 여왕님의 곁을 지나면서 나는 말했다.
“과연 그 정도 부탁은 들어주지 않겠습니까. 그 불행한 사람을 보살피는 여신님께서는.”
“….”
여왕님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짧게 숨을 흘렸다.
“그럼 여왕님… 야리소연. 아리야. 비류아… 이세. 시우… 흑치사라. 하누리… 비은공주. 시아람 경에… 사호와 구호, 아, 하여간 저승에 있는 모두들.”
여왕님이 흘린 숨을 밟고서, 나는 마저 걸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살던 세계를 향해 발을 디뎠다.
◈ ◈ ◈
어둠.
부서진 돌 알갱이와 파헤쳐진 융단 섬유, 그리고 피의 냄새 속에서 나는 눈을 떴다.
“쿨럭…!!”
기침에 섞여 핏방울이 튀었다. 시커먼 시야 속에 피는 그 냄새만 남기고 흩어져버렸다.
파괴당한 왕궁의 알현실.
나는 무너진 돌쩌귀들 속에 쓰러져 있었다.
화살 꽂힌 가슴이 타는 듯 아팠다.
“자….”
쿨럭, 기침을 하고서 나는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켰다.
턱에 말라붙은 핏자국 위로 신선한 피가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 슥, 입술을 훔쳤다.
“시작할까.”
흙의 맛을 느끼면서 나는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