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신이 나라를 살림-222화 (222/261)

222. 가지 않은 길 (2)

마지막 여왕님의 첫 모습은, 궁벽한 산골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살아가던 것이었다.

내가 태학관의 선배와 함께 처음으로 그녀를 찾아냈을 적에, 그녀의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뻗쳐 있었다.

짐승가죽과 나무껍질을 겹쳐 만든 실용적인 옷, 걸을 수 없는 곳을 잡아 건너기 위한 장갑.

허리춤에 투창, 등에 단궁을 맨 그녀를 왕족의 피를 이은 자라고 알아보긴 어려웠다.

하지만 그 눈동자. 한 손으로 나뭇가지를 잡고 날 내려다보던 그 단두대의 날처럼 서늘한 은월의 눈동자가 그녀의 신분을 알려주었다.

마지막 여왕님의 마지막 모습은, 타오르는 왕궁에서 찾아온 운명을 당당히 마주하고 섰던 것이었다.

문자를 몰라 자기 이름도 제대로 적지 못하던 산골의 사냥꾼 소녀가 왕궁의 생태계에 적응하기란 지난한 일이었다. 사실 은월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외에 그녀가 열성조의 핏줄을 이었음을 증명해줄 만한 것이 없기도 했다. 전대 국왕의 사생아라는 직함조차 그런 그녀를 조금 더 단절된 왕실의 핏줄과 가까이하기 위해 만들어진 명분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딛고 서서, 그녀는 길게 기른 머리를 묶은 채 곤륜포를 입고 옥좌에 앉아 왕으로서 그 역할을 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일이 있어, 여왕님과 나는 나라의 멸망을 맞아, 이 저승에서 마주 서 있었다.

마지막 여왕님의 현재 모습은 어느 때와도 달랐다.

그녀는 키가 컸다. 기껏 길렀던 머리카락은 짧아져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성장과 메워지지 못한 생장이 사이에 놓인 어마어마한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왕님.”

내가 말했다.

“목이….”

마지막 여왕님은 살짝 웃었다. 천사님으로서 행동하던 시절, 이따금 목을 만지고는 했던 바로 그 손놀림으로 자신의 목에 새겨진 흉터를 쓸었다.

천사님 때처럼 녹슨 목소리가 그 입술에서 새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여왕님은 천천히 말했다.

나는 고개를 수그렸다.

천천히 말했다.

“천사님… 여왕님.”

“후자가 낫겠습니다.”

호칭 이야기였다.

나는 얌전히 여왕의 명령에 복종했다.

“여왕님.”

“예.”

“그날… 왕궁이 함락당하던 날,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지난번에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간신이여.”

여왕님은 작게 웃었다.

“당신도 이미 짐작하는 바가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 임무를 가리키면서 했던 말을 한 차례 더 반복하는 여왕님을 보면서, 나는 또한 방금 전 아리야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내가 바꾼 세계가 내가 살던 세계와는 별개의 역사라면.

그 명제를 끝까지 확장시킬 경우 반드시 다다르게 되는 결론.

- 내가 살던 세계는 어떻게 되었는가.

임무 수행 실패에 왕국과 나의 부활이 걸려 있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를.

- 나는.

내가 말했다.

“저는 죽지 않았군요.”

여왕님은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고쳐서 말했다.

“저는 지금 현실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군요.”

정적이 흘렀다.

내던진 실타래처럼 제각각의 방향으로 흐르는 바람이 소매와 자락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끌었다.

여왕님이 답했다.

“예.”

이어서 말했다.

“당신은 그날, 그 순간, 화살에 맞아 돌 속에서 죽어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정적이 차올랐다.

◈          ◈          ◈

“간신이여.”

마지막 여왕님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세계의 역사가 당신이 살아가던 연도에 다다른 지금, 당신은 처음에 약속받았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보상의 내용을 읊었다.

“왕국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였지요.”

첫 번째 임무를 마친 직후에 오갔던 문답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오갔던 이야기가 있었다.

“왕국이 다 부흥하면 이 ‘나라 살리기’를 그만둘 수 있다고, 제가 되살아날 수 있다고 몇 차례 이야기하셨었고요.”

나는 그 보상과 이야기들, 그리고 지금 내가 놓인 상황과 조합하여 답을 이끌어냈다.

“저는 제가 살아가던 세계 속에서, 죽어가던 상태 그대로 눈을 뜨게 되겠군요.”

여왕님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 내린 달의 표면처럼 고요한 눈동자가 나를 쓸었다.

“예.”

그리고 말했다.

“하지만, 꼭 그 보상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왕님의 말이 이어졌다.

“짐작하고 있겠습니다만, 그대의 눈앞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습니다.”

여왕님은 손가락을 두 개 펼쳤다.

“첫 번째 선택지는 이대로 쭉 저승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조금 전 아리야가 했던 제안이었고.

“당신은 의미 그대로 왕국을 세웠습니다. 이 저승의 왕도에 발을 딛는 누구도 당신의 위업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당신에게 호의를 품지 않는 이들이 간혹 있다고 해도, 당신은 그들을 신경 쓸 위인이 아니지요.”

그것은 또한 내가 했던 이야기였다.

“당신이 만들어낸 왕국에서 계속해서 시간이 흘러, 당신에 대한 것을 이제 전설로밖에 알지 못하는 이들이 발을 딛더라도. 당신은 능히 그들 중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

“그러니 더 이상 당신이 어떤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는 셈입니다. 당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한히 꿀을 빨 수 있는 환경을 갖추게 된 셈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말했다.

“두 번째 선택지는 보상을 받는 것… 즉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는 겁니까?”

여왕님은 잠시간 침묵을 사이에 두었다.

[ 충신 ]

- 멸망 이후. 난이도: SSS

마지막 임무.

2 업데이트 패치를 맞이한 이래, 고정되어있던 임무가 그때 그때마다 살아있는 생물처럼 바뀌었던 것과 달리 계속해서 그 자리에 남아있던 핏빛의 문자를, 여왕님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하였다.

“예.”

여왕님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자신의 목에 난 흉터를 어루만졌다.

“그 경우, 당신은 당신이 추리한 그대로의 상황에 놓이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아리야가 나를 막아서려 들었던 이유일 것이다.

“생각해보십시오, 간신이여. 그대의 가슴에는 화살이 꽂혀 있습니다. 이미 피를 많이 흘려 정신은 몽롱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어찌어찌 돌을 치우고 나선다고 해도 왕도는 이미 칸과 그 군세에게 점령당한 이후인 것입니다. 당신은 그런 현실에 집어 던져지는 것입니다.”

여왕님은 뒷짐을 졌다.

“하물며, 그 세계의 주민인 당신에겐 당연한 이야기겠습다만--- 현실에는 ‘스킬’이니 ‘채팅’이니 하는 ‘반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당신은 순전히 당신의 몸뚱이와 언변 하나만 갖고서 그 상황을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솔직하게 말해 너무나도 위험하며, 따라서 도전할 가치 따윈 전무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마를 짚고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여왕님의 표정은 태평해 보였다.

“그렇지만 일단 규정이긴 하니까 묻겠습니다, 간신이여.”

가느다란 손가락 끝이 시스템 창을 가리켰다.

“어느 쪽을 선택하실 겁니까?”

그리고 나는 그 손끝을 따라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

<역사변이점>

[ 충신 ]

일시: 멸망 이후, 현실세계

난이도: SSS

제한시간: 없음.

보상: 없음.

입주민: 없음.

실패 시: 사망 및 멸망

+

나는 심호흡을 했다.

[ 실패 시 당신은 사망하고 왕국은 멸망합니다. ]

[ 그래도 진행하겠습니까? ]

임무에 들어설 때면 항상 보아오던 글귀들.

시선을 마저 내렸다.

[ 예. ]

[ 아니오. ]

갈림길이 나뉘는 지점을 바라보면서 내가 입을 열었다.

“여기 오기 전에… 아리야를 지나쳐 오기 전에, 흑치사라와 이야기를 하고 왔습니다.”

나보다 똑똑한 사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거든요.”

“어떤 것을?”

“죽어서 이런 낙원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럼에도 더 살아갈 이유가 있었겠느냐고 묻고자 했습니다.”

여왕님이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그런 이유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생전에 사후세계의 비밀을 털어놓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요. 제가 던진 것과 똑같은 질문을 던져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답할 말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산 자들이 노력한 만큼 저승도 발전한다느니, 언제 죽어도 오게 될 테니 더 살다가 죽는 것이 더 이득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 어떤 대답에도 딱 들어맞는 필연성이 없었다. 그런 이상 나로서는 대답하기가 곤란했던 것이다.

“그런 곤란한 질문에 흑치사라 본인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은월의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당신이 부탁했던 다른 이들을 위해서, 같은 순정미 넘치는 대답이었습니까?”

“그런 말을 하는 흑치사라의 모습은 조금 무섭군요….”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하여, 그 무서운 여인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하지만, 정확히 그런 대답을 들려주었습니다.”

여왕님이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나는 말했다.

“흑치사라는 똑똑한 인물이지요. 그리고 똑똑하다는 말은, ‘어려운 것을 쉬이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가정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보다 정확히, 또한 멀리까지 ‘상상’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는 호흡을 고르고서 말을 이어갔다.

“요컨대 흑치사라는 상상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을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남겨진 자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마치 실제로 벌어진 일들을 눈으로 확인한 것처럼 그 모든 것을 정확히 상상하고서, 그 상상이 가져다주는 고통과 죽음 이후의 안락함을 천칭에 건 결과, 산다는 것을 선택했을 거라는 거지요.”

“흑치사라다운 이야기군요.”

“예. 그리고 이것이 흑치사라와 비은공주의 결정적인 차이점일 겁니다.”

비은공주가 흑치사라 급의 지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 모든 것을 정확히 상상할 수 있었다고 한들, 비은공주는 역시 스스로 말한 것처럼 ‘빠른 투신’을 골랐을 터였다.

비은공주는 여유가 된다면 그 여유만큼 상냥해질 수 있는 인물이지만, 결국 자기 자신보다 소중한 것을 만들지 못하는 종류의 인물이다.

“비은공주가 왕이 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겠지요.”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선언했다.

“그리고 저는 흑치사라의 남편입니다.”

여왕님은 그 말을 비꼬지 않았다.

적어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여왕님도 나를 비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말이 아닌 몸으로 증명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날아들던 화살을 막았던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비은공주와 비슷하지만 다른 인물이며,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왕님.”

내가 말했다.

“제가 아니라 ‘여왕님’은 그 후에 어떻게 되셨습니까?”

침묵.

여왕님은 최대한 여상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실록을 보았으니 아실 테지요. 수백 년 전 판이 쳐들어왔을 때, 그대가 바꾼 세계와 달리 그들을 막지 못하고 왕국 전역이 유린당했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산골에서 처음 봤을 때의 난폭한 말투도 아니고, 왕궁에서 예법 교육을 받아 익힌 위엄있는 말투도 아닌, 기묘하리만치 정중하던 천사님의 말투대로.

“고향도 명맥도 달랐던 주제에, 카한과 그의 군세는 그 잔혹함만은 제대로 이어받았더군요.”

여왕님의 손끝이 가느다란 목에 난 흉터를 어루만졌다.

“하긴 굳이 판이니, 카한과 그의 군세니 하는 것을 가져올 필요는 없겠습니다. 왕국 역시 패자들에게 충분히 가혹하지 않았습니까? 그 업보가 마지막 옥좌에 앉아있던 제게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해야겠지요.”

나는.

“제때 죽지 못한 군주란 비참해지게 마련이니까요…. 어쨌든, 간신이여. 그대의 상상력으로 충분히 재구성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이므로 딱히 제가 입에 담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기도 하고---.”

나는 주먹을 꾹 쥔 채 그 말을 끊었다.

“원망하셨습니까?”

“예?”

“차라리 제가 그때 화살을 막지 않았더라면 하고… 원망하실 정도였습니까?”

정적.

여왕님의 입가에서 흘러내린 웃음소리가 그것을 깼다.

“아하하하….”

쇳조각이 잔뜩 섞인 밀가루 같은 웃음소리.

“수도 없이 했습니다.”

그 웃음소리는 피부를 저미고 박히는 것만 같았다.

“정말로 수도 없이… 예.

“여왕님.”

“그 호칭으로 불리게 된 것을 후회한 적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옥좌에 앉아있는 동안에는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만… 그렇네요. 나라가 망한 뒤에는 쉼 없이 그런 후회를 했습니다.”

여왕님은 웃으면서 나를 흘겨보았다.

“아, 그날. 그러니까 당신을 비롯한 이들이 내게 법통을 이어 달라 주청드리러 왔던 그 날에, 내 손에 들린 화살로 당신들을 쏘아버리고 살던 대로 산의 민초로 남았어야 했다, 하고.”

나는 그녀가 내게 사과할 필요 없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말에 따르기 힘들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후회도 원망도 결국은 마모되어 스러지게 마련이니까요.”

그 감정의 부패가 다시금 사이에 놓인 어마어마한 세월을 이야기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