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한 오백년 (5)
건방진 소년이 무릎 꿇은 채 두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하지만 거진 반 백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옥좌에 앉아 있던 인물이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과연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할마마마. 이 사실이 궁 바깥에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나이까? 여염집에서 기르는 개들조차 강상의 도가 땅에 떨어졌다며 월훨훨훠훠 비웃을 것입니다.
무릇 한 포의 비단옷조차 곱게 입기 위해서는 노력에 노력을 덧대어야 하거늘 군왕의 위엄이 어찌 그보다 못하겠나이까. 부디 소손께 이와 같은 모욕을 강요하여 왕실의 권위를 스스로 실추시키지 마시옵고….”
물론 비류아는 개뿔만큼도 충격을 받지 않았다.
“다 말했느냐?”
“….”
“다 말했으면 엎드리려무나.”
여기서도 자모신 렌즈가 제 역할을 해주었다.
대륙에는 어떤 백전노장이 예순이 다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께 엉덩이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노인이 노인을 학대하는 현장을 미담처럼 해설하는 이 기괴한 설화의 풍경을 실제로 보게 됐더라면 무척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현성이는 소년 모습이었고, 비류아는 비류아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소년이 비류아 정도 나이대의 인물에게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맞는 것 정도는 흔한 이하생략.
내가 현성이 앞에 쪼그려 앉아 말했다.
“현왕 폐하.”
현성이는 훌쩍였다.
“세자라고 불러도 돼.”
“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자 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웅변을 이어갔다.
“군왕의 위엄 등은 말씀하신 비단옷보다 갑주에 가깝습니다.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움츠리고 양보하게 만들어 여러가지 일들을 부드럽게 처리할 수 있게 해주지요.
바꾸어 말하면 여러 가지 일들을 할 필요가 없으면 불필요한 것입니다.”
현성이는 훌쩍임을 그쳤다. 고양이를 닮은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길게 말했지만 그거, 죽은 주제에 왜 지금도 왕 대접 받길 바라냐는 뜻이지?”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지요.”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가 없는데….”
왜 은월들은 이상한 곳에서만 눈치가 빠를까?
“아무튼 쪽팔리는 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쉬세요.”
“그치만 왜 할마마마께서는 저렇게 위세가 넘치고, 그 위엄에 모두가 복종하는 거야?”
“먼저 하나. 시왕님께서는 자기를 ‘이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거든요.”
“나도 이젠 안 불러!”
“둘. 사람들은 시왕님을 존경하고 싶어서 존경하는 겁니다. 강요해서 그런 게 아니라요.”
현성이는 자기 엉덩이를 어루만지면서 불신감을 드러냈다. 엉덩이의 아픔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그럼 더이상 사람들이 할마마마를 존경하지 않게 되면? 또는 더 존경할 만한 누군가를 찾아내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데?”
그 말에 대한 대답은 비류아가 직접 했다
“그때는 그냥 존경받지 못하는 거지. 어렵게 생각할 것이 있나?”
“벌판에 왕국을 일으키신 할마마마께서 존경받지 못하다니, 그런 참람된 사태는 이 소손이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은 기쁘구나. 하지만 나는 왕관을 내려놓았다. 길잡이가 말한 대로 존경이란 그저 통치에 필요한 자산으로서 유효할 뿐. 통치가 끝난 지금 왕국민들이 내게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전적으로 그들의 선택이다.”
비류아는 담백하게 말했다. 그 모습만 보면 마치 루지아 사태를 보자마자 전체 집합을 걸고, 지금 당장도 현성이의 입 안에 군기 한 사발 퍼붓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 사람이란 참 복잡한 존재지.’
내가 그런 깨달음을 얻고 있자니, 현성이가 볼멘소리를 냈다.
“역시 그건 소손으로서는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야리소연이 반응했다.
“웅. 그럼 항상 존경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현성이는 야리소연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나를 보았다.
내 뒤에 숨은 채, 자신의 먼 시조를 힐끔거리면서 현성이가 말했다.
“가령 어떤 노력을… 요?”
왕이었던 자신이 왕인 적 없었던 인물, 하지만 자신의 까마득한 선조라는 것은 확실한 인물에게 반말을 써야 하는지 존댓말을 써야 하는지 고민하던 끝에 가까스로 선택한 것 같은 말투였다.
실시간 개족보 제조 현장도 이만큼 짬밥을 먹으면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야리소연이 예의 같은 걸 국밥 건더기쯤으로 여기기도 했다. 야리소연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길가의 쓰레기를 줍는다거나? 사람들이 기특해할 거야.”
“일국의 왕이었던 제가 길가의 쓰레기를 줍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깜짝이야. 아니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하기 싫으면 말든가. 존경 까짓거 안 받으면 되잖아.”
“왕국의 왕이었던 제가 존경을 받지 않는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럼 뭘 하려고? 쓰레기 줍기가 싫다는 건 알겠지만….”
현성이가 나를 봤다. 나로서는 ‘왜 나를 보시나요’ 같은 눈빛밖에 줄 것이 없었다.
현성이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뭔가 외교라거나… 전쟁이라거나… 하여간 뭔가 팍 멋있는 것이요.”
“웅… 비수야, 어때? 그거 할 수 있어?”
야리소연이 나를 봤다. 나는 이 대화에 끼기 싫다는 티를 팍팍 냈지만, 야리소연은 눈치도 국밥에 딸려 나오는 동치미 같은 것으로 여기는 녀석이다.
지금 나는 너무 짠 동치미를 들이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세자 전하. 둘 다 무리입니다. 다른 나라가 없으니까요.”
“그럼 다른 건? 아무튼 멋있기만 하면 되는데….”
뭐지? 현성인가?
아, 현성이지….
“음… 전하의 아버님, 그러니까 이세… 폐하처럼 무술을 단련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투기장에서 항상 1위를 찍는 사람이 되라는 내 말에 현성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죽은 다음에도 무술 훈련하긴 좀….”
“그러면 외관을 꾸미시는 건 어떨까요. 그러기만 해도 존경을 넘어 숭배하는 사람들까지 나올 겁니다.”
타고난 외모를 가꾸라는 내 말에 현성이는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살아있을 적에 왕이랍시고 단장하는 데만 반시진쯤 걸리고 그러는 것도 귀찮았는데 좀….”
음.
“즉 그냥 가만히 있으면서 존경만 받고 싶으시다….”
“시현군. 나 왕이었잖아. 그것도 치세 도중에 삼국을 통일한 왕.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할마마마는 시왕이시고. 무조건적이고 불가침적인 존경을 영원토록 당연하게 받을 만하지 않아?”
다들 나한테 어떻게든 해달라는 눈빛을 보내고는 하는데, 그 눈빛 나도 남한테 보낼 수가 있다. 가령 지금 비류아에게 그런 눈빛을 보낸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시왕님이 말했다.
“엉덩이 좀 더 맞자꾸나.”
“으앙!”
그렇게 이승에서는 한 차례도 만나보지 못한 가족 간의 우애가 돈독해지는 시간이 있었다. 나와 소연이는 훈훈한 기분 속에 그 자리를 뒤로 했다.
저승의 왕궁 앞 대로를 걸으면서 야리소연이 팔짱을 끼었다.
“그치만 그렇네~. 여긴 왕 같은 게 필요 없잖아. 왕후니 공주니, 공작이니 후작이니 하는 것도 필요없구.”
“대장군이니 재상이니 하는 것도 필요 없지.”
“흑치사라는 여전히 학장님 소리 듣고 있지만, 그건 걔가 여기 와서도 꾸준히 강의 열고 그러기 때문이구…. 으으음. 이승에서 받던 대접을 그대로 요구할 수 없다는 건데. 이승에서 둥기둥기 받다가 저승 온 사람은 박탈감 느껴지겠다. 가령--.”
“유미야아아아!”
음.
야리소연은 말을 멎었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저승 건너편에서 울상을 지은 등신 하나가 첫 산책을 나선 강아지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 ◈ ◈
역사가 흐른다.
행정을 맡은 재상, 군부를 맡은 대장군, 종교를 맡은 제사장, 정치를 맡은 귀족들에 비해 법왕의 담당 분야는 언뜻 뚜렷하게 알아보기 어렵다.
초대 법왕은 그간의 인습법을 정리하여 명문화된 법전을 만들어냈다. 이는 당시에는 제사장 측이 맡던 역할이었으나 지금은 재상의 역할에 속하는 구간이다. 초대 법왕은 태부 시우의 죽음 이래 한동안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는 대장군의 역할에 속하는 것이다. 한편 법왕가는 그 자체로 정계에 가장 입김이 센 곳이기도 하다. 이는 귀족의 역할에 속하는 구간이다.
요컨대 법왕이라는 국가기관은 발호하면서부터 행정, 군부, 종교, 정치 영역을 모두 건드렸다. 그리고 첫 번째 단추는 그 다음 단추의 위치를 구속한다.
1대로 끝나지 않고 연속성을 갖게 된 이래 법왕은 항상 그 모든 역할에 한 발씩을 걸치는 기관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그 4개의 구간을 모두 포괄하는 직종이 또 하나 존재한다.
왕(王).
그러기에 법왕의 직위명에 왕이라는 대륙문자가 들어간다는 것은, 매번 공작가 등지에서 불경하다고 비판이 나오는 것과 달리 업무적으로 올바른 것이다.
왕국에 존재하는 두 번째 왕으로서, 법왕은 귀족들, 더 정확히는 지방에 영지를 갖고있는 영주들에게 왕도의 입장을 대변하고, 국경선 너머의 다른 나라들에게 왕국의 입장을 전달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들을 이해하면, 언뜻 뚜렷하지 않게 보이던 법왕의 역할을 단 한 가지 단어로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법왕은 국무(國務)의 총괄자인 것이다.
따라서 왕국에 찾아온 대선단을 법왕이 맞이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머나먼 성지로부터 찾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렇게 여신의 시선 아래 인연이 닿게 되어 기쁜 마음 한량 없습니다.
- 반갑게 맞아주시니 이쪽이야말로 기쁘기 그지없수다래. 신전에 인사 좀 해도 괜찮겠수까?
- 물론입니다.
이국에서 온 손님들은 왕도의 신전을 들른 다음 본 용건을 꺼내들었다.
- 우리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물론 순례를 위한 것도 있수다래.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수다.
- 무역을 바라십니까? 물론 그에 대한 준비도 갖추고 있습니다.
본디 왕국에서는 수평적인 국제 무역이 발달하지 못했다.
특산품이 부족해서만은 아니었다. 국부 유출을 막기 위해 나라 차원에서 엄하게 거래를 조였기 때문이란 것도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이것들은 원인이라기보다 결과인 것이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무역이 이루어질 수 있는 거리 상의 한계.
가령 나투아가 국제 무역의 달인들이라 불리긴 했지만, 그것은 삼국 통일 이전에 ‘국제’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범위가 협소하다는 사실을 고려한 다음 이해해야 한다. 제함도가 정상화된 이래 왕국은 나투아가 누리던 경제 범위를 모두 누릴 수 있었지만, 그래 봤자 왕국 내부와 대륙, 열도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나투아의 경제 범위 자체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잉여 재산의 한계.
이것은 조금 길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관에서 주도하는 무역에는 한계가 있다. 본격적인 국제 무역은 민간이 주도해야 비로소 발전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재산이란 곧 의식주의 확장형을 뜻한다. 또한 그것을 보다 편리하게 교환하기 위한 교환 수단, 즉 화폐를 뭉뚱그린 말이다.
즉 재산이란 의복, 식량, 땅과 집, 금속이며, 땅과 집을 배에 실을 순 없으니 무역 가능한 재산은 식량, 의복, 금속으로 제한된다.
그중에서도 다시 하나씩만 꼽자면 그나마 장기 보존이 가능한 곡식, 사람의 몸에 맞게 가공하기 이전 단계인 면포, 그리고 광범위한 활용성을 가지면서도 적절한 무게와 희소성을 가진 구리를 꼽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리다. 곡식과 면포가 소모품인 반면 채굴된 광물은 시간이 흐를수록 축적된다. 시간만 들이면 확실하게 잉여량이 생기게 되고, 잉여는 필연적으로 거래를 부르게 된다.
다만 원래 역사에서, 왕국은 그만한 구리를 확보할 수가 없었다. 왕국 땅에 구리 광산이 귀했던 데에 더해, 판 제국에 짓밟힌 이래 대륙과의 관계에서 내내 하급자를 자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 민간 경제가 활성화될 만한 구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00년 이상의 채굴과 축적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바뀐 역사 속에서, 왕국은 대륙의 내전에 개입하는 것으로 다량의 구리를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토대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민간 무역을 승인하고 장려할 만한 여유를 갖게 된 셈이다. 실제로도 성지를 향하는 무역단을 모집한다면 귀족들의 상선으로 천인 앞바다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빈객들은 대단히 반색했다.
- 그래주시면 감사한 마음 한량없습니다래.
- 좋습니다. 곧바로 귀족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도록 하지요. 그래서 그것이 용건의 전부입니까?
이 질문에 빈객들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빈객 대표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한 가지 더 있긴 합수다.
빈객들의 고향, 성지에서는 석마갈이 전도한 달의 여신 종교가 널리 퍼져 있었다. 100여 년이라는 시간이 가능하게 한 위업이지만, 시간은 반드시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진 않는 양날의 칼이다.
첫 전도로부터 1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성지의 달의 여신 종교는 무수한 지파들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지파들 사이의 갈등은 실질적인 내전을 눈앞에 둘 정도였다.
- 부디 우리들이 속한 지파를 공식으로 지명해주면 좋겠다래.
성지에서 벌어지는 성전.
그것이 이 손님들이 왕국에 찾아온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