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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이 나라를 살림-215화 (215/261)

215. 한 오백년 (3)

“아, 그랬지. 근데 소연 씨라고 부르는 거… 아니 됐다.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라 그냥.”

야리소연이 한숨을 지었다.

사호는 자신의 무릎 의자로부터 벗어나고자 바르작거리는 구호를 꾸욱 안았다.

“그러겠다요.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나는 구호와 비은보다 나라를 위했다기보다는 둘이 더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라를 이용한 거다요. 나라와 나 사이에는 힘의 차이가 있었으니 소극적인 이용밖에 할 수 없었지만, 성 제국 시절에도 왕국 시절에도 그런 원리는 변하지 않았다요.”

“나라의 존재 가치란 그런 것이니까.”

구호가 사호의 무릎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그만두고서 말했다.

“자연은 험악해. 혼자서는 잠자리를 만들기도, 식량을 구하기도, 몸을 보호하기도 어려워. 살아남기 위해 힘을 합칠 필요가 있기에 사람들은 모여 가족을 이루었어. 그 가족이 다시 모이고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 나라.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도구야.”

조국을 등지고 새 나라로 망명한 전직 간첩들은 더없이 메마른 문장으로 나라를 논했다.

한때 내가 깃들었던 여인이 그나마 물기를 적셔주었다.

“그 ‘더 나은 삶’ 안에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라거나, ‘더 쾌적한 곳에서 자고 싶다’처럼, ‘더 마음이 맞는 사람과 지내고 싶다’는 희망이 들어 있지. 그리고 ‘가능하면 많은 이들이 이런 삶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들어 있고.”

제함후 휘영은 귤껍질을 벗기고는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차가운 햇빛이 그 입 안에 갇혀 허물어졌다.

“바라는 미래를 위해 괴로운 현재를 감수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동물이야. 그러니까 자문사도, 자문사의 언니인 적검후도 그것을 견딜 수 있었던 거야.”

그렇게 말하는 내내 휘영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휘영을 마주 보았다. 그 동안 내가 도와준 이들을 무수히 저승에서 맞이했었고, 3 업데이트 패치 이후에는 나와 원수진 이들도 저승에서 마주친 바 있었다. 하지만 나였던 이를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농담을 섞어 가볍게 넘기긴 했지만, 과연 그 정도 감상으로 흘려 보내는 것은 어려웠다.

“이상해?”

휘영이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함후는 다시금 말했다.

“그럼 물어봐.”

나는 그렇게 했다.

◈          ◈          ◈

역사가 흐른다.

생전의 왕국에서, 하화도로 천도한 왕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천도를 통해 보존한 역량을 총동원하여 대하와 태산을 기준으로 방어선을 짰다. 지형의 이점을 살려 판 제국을 막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효과를 발휘했다. 아직 월족이던 시절 나투아와 알실라가 왕국을 멈춰 세웠던 것처럼, 반도 남쪽은 기병을 굴리기 좋은 장소가 아니었다. 늪과 강과 산과 계곡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각 잡고 방어에 전념하면 기병 위주로 편성된 병력은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판이 시대의 패자라고 해도 먼 서방으로부터 대륙을 건너 북벽을 뚫고 반도까지 온 이상 그 병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 싸움이라면 왕국 역시 해볼 만했다.

결국 생전의 왕국도 판을 반도로부터 몰아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국토 전체에 광범위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왕도 역시 몇 차례의 공방을 거치면서 철저하게 약탈당했다. 북방 영토 전체가 판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는 것을 용인함으로써 왕실의 권위 또한 추락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왕국 북부와 왕도 사이에는 심각한 골이 생기게 된다. 이는 두고두고 왕국의 발목을 잡는 불안 요소가 되었다.

새로이 바뀐 역사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판은 화포가 배치된 북벽을 뚫지 못했다. 그리고 왕국은 자신을 수호한 방패에게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나시파 변경백령을 필두로 한 왕국 북부와 왕가를 필두로 한 왕도는 양호한 관계를 유지했다. 긴밀한 협의체계 아래 전폭적인 지원이 이루어졌다. 북벽은 날이 갈수록 단단해졌다.

대륙을 접수한 판은 판 제국이라는 황조를 세워 세 차례 더 왕국을 침공했지만, 그들은 번번이 북벽을 뚫지 못한 채 돌아가야 했다.

◈          ◈          ◈

나는 가만히 휘영을 바라보았다.

“내가 빙의해 있을 때 너는 어떤 느낌이었어?”

내가 물었다.

휘영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말했다.

“당돌한 질문이네. 조금 의외야.”

“내가 의문을 품는다는 것이?”

“아니. 네가 나한테 그렇게 ‘질문’을 했다는 부분이. 외곽에서부터 하나씩 논거를 세워가면서 ‘혹시 이런 느낌이었냐?’ 하고 ‘확인’할 줄 알았는데.”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확실히 그 편이 나답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기로 했어.”

“빗나갈 경우 쪽팔릴까 걱정되기 때문에?”

“주변인들 말마따나 한 차례 네 안에 들어갔고 앞으로도 길게 볼 사이 사이잖아. 놀림거리를 제공하지 않고자 하는 내 현명함을 칭찬해주지 그러냐.”

휘영은 칭찬하는 대신 새로운 감귤의 껍질을 벗겼다.

나도 물 컵을 내려놓았다. 서로 간에 흰소리는 이만하면 충분하다.

내가 말했다.

“추측은 여러 가지가 있어. 하지만 면전에서 늘어놓아서는 예의에 어긋나겠지. 말했듯이 앞으로도 길게 볼 사이잖아. 차라리 이렇게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지.”

“그뿐이야?”

“하나하나 늘어놓고 확인받으려고 해봤자 결국 그 논거들은 내 생각에 불과할 뿐이기도 하니까. 긍정하든 부정하든 그 진위를 확인할 방도가 없는 이상 무의미하지 않겠냐.”

그리고, 하고 나는 덧붙였다.

“네가 물어보라고 하기도 했잖아.”

휘영은 살짝 웃었다.

“부담을 주겠다 이거네.”

“유효한 전술 아냐?”

“그러게, 유효해. 하지만… 널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 그러기에 거꾸로 먼저 물어보지 않을 수 없겠어.”

휘영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빙의해 있을 때 너는 어떤 느낌이었어?”

그녀가 물었다.

◈          ◈          ◈

역사가 흐른다.

생전의 역사에서 판 제국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들은 정복자들이었지만 통치자는 아니었으며, 군인이었으나 군주는 아니었고, 활동가였으되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이 바뀐 역사에서도 같았다. 북벽을 뚫지 못한 채 번번이 반도 원정에 실패한 만큼 그 붕괴는 그만큼 가속되었다.

생전의 역사보다 수십 년 더 빨리, 판 제국은 무너져 내렸다. 그 허물어진 잔해 속에서 다시금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대륙인들이 새로운 제국을 지어 올렸다.

그 이름을 신 제국이라 했다.

그러나 신 제국은 왕국의 당면 과제는 아니었다. 대륙인들은 내전과 판 제국이 남긴 흉터를 치유하기 위해 바빴던 것이다. 신생 제국 치고는 영 멕아리가 없었지만, 아무리 넓은 대륙이라도 무한한 자원을 갖지 못한 이상에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생전의 역사에서는 왕국 또한 전란의 상처를 치유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새로운 역사 속에서 왕국은 훨씬 여유가 있었다.

왕국은 새로이 건국된 대륙인들의 나라와 양호한 관계를 구축했다.

황진, 진천, 태연, 해위, 도석, 도청. 대륙과 왕국을 잇는 여섯 항구 도시에 왕국의 대사관과 달의 여신의 신전이 들어섰다.

반발은 크지 않았다. 성 제국 당시의 내전에 개입하면서 뿌려 둔 씨앗은 긴 전란과 판 제국의 압제 속에 하나 둘 싹을 틔웠던 것이다. 토속 신들이 이방인들에게 무너져 내린 상황에서 그 이방인들을 무혈로 막아낸 극동의 일신교(一神敎)란 대단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종교를 통해 시민들을 감화하고 상선을 통해 실질적인 지원을 베풂으로써, 왕국은 야금야금 그 항구 도시 전체를 자신의 영토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은 순전히 천명이 따르지 못한 탓이었다.

햇살이 따사롭게 대하의 수면을 간질이던 어느 날, 왕궁의 뜰을 거닐던 성왕이 쓰러졌다.

왕국력 143년의 일이었다.

◈          ◈          ◈

휘영이 시절의 임무를 휘영이에게 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휘영도, 사호도, 구호도, 이미 한 차례 지켜봤을 야리소연도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숨을 지으면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랬구나.”

“응. 이제는 네 차례야.”

나는 야리소연이 벗긴 귤 한 조각을 입에 던져 넣으면서 말했다.

“내가 빙의해 있던 시절을 떠올릴 수 있어?”

휘영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떤 느낌이야?”

“악마한테 혼을 판 느낌.”

음.

그렇게 대놓고 말하시면….

“그치만 그 악마가 겁나 유능해서, 걸리적거리던 걸 다 때려 부숴주는 느낌? 솔직히 시원했어.”

휘영은 귤 한 조각을 더 입에 넣고서 말했다.

“내 삶은 네가 멋대로 요약한 것처럼 불행한 것이었어. 한여름 밤 청소를 게을리 한 어선의 갑판에 선 것 같은 공기가 태어난 그 날부터 쭉 흐르고 있었어.”

생각해 보면 휘영 또한 나로 인해 태어난 인물이었다.

내가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그리고 인과 포인트를 투자함으로써 생겨났던 인물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삶이 원망스러웠어.”

해변에 선 이들이 부지불식간에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사람들 모두가 귀 기울여 제함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무언가가 변했으면 했어. 늘 언젠가는, 늘 어떻게든,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모든 답답한 것이 부서졌으면 하고. 부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다 위에 내리치는 벼락처럼 돌연한 ‘계기’가, 어떤 ‘기점’이 찾아와서, 팍 떨치고 일어날 수 있다면… 하고 늘 이불을 뒤집어쓴 채 생각해 왔어.”

휘영은 술을 한 모금 머금고서 다시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입을 열어 말했다.

“그리고 내가 왔다?”

“그리고 네가 왔지.”

휘영도 동시에 말했다.

“당시에는 나 아닌 누군가가 내 속에 발을 디뎠다는 게 아니라, 응, 이 술. 커다란 축제에서 술을 한 잔 쭉 들이켠 것처럼, 어라 나 평소 같으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싶은 것들을 하는 느낌이었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시원했어.”

휘영은 잠시 후 덧붙였다.

“그리고 기뻤어.”

눈을 감았다가 뜬 그녀의 눈동자는 해안 절벽 위에서 바라본 동틀 녘을 닮아 있었다.

“단지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박살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야.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실제로 행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야. 좀 여유를 갖고서 둘러보면 나는 충분히 행복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휘영은 구호를 흘끗했다.

“내 곁에는 어릴 적부터 날 돌봐 준 사람이 있었어. 그런 나를 아가씨라고 불러주고, 안타깝게 여겨주던 사람들이 있었어.”

그리고 휘영은 다시금 나를 보았다.

“내가 바라던 그 어떤 마법적인 계기보다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이 기뻤어.”

그녀가 고개를 수그렸다.

“깨닫게 해줘서 고마워.”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어릴 적부터 내가 기르기 힘들었던 것이 있다.

바로 고양이… 도 그 중의 하나지만,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누군가의 감사를 순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감사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아서? 아니면 사람이 누군가에게 감사할 수 있는 생물이란 것 자체를 믿지 않아서?

글쎄, 둘 다 아닌 것 같다. 새우나 게를 먹으면 갑자기 온몸에 두드러기가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이 딱히 새우와 원수를 지고 게를 불신하기 때문에 그런 체질이 되진 않았을 거다.

나 역시 그것과 비슷한 경우다. 세상에는 이따금 그런 천형을 짊어지고 태어나는 사람이 존재하는 거다.

“고마워 할 건 없어. 내가 필요해서 했던 일이고, 거기서 네가 나름대로 그런 깨달음을 추려낸 것뿐이니까.”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란을 피울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까를 두고 망설이던 나는 결국 제 3의 길을 택했다.

한때 나였던 여자는 술을 한 모금 쭉 목구멍 너머로 넘기고는 간단하게 답했다.

“그래도 고마워.”

음.

나는 시선을 피하고서 말했다.

“아무튼 뭐, 그래. 음… 축제에서 술 한 잔 한 기분이었다 이거지.”

휘영은 피식 웃었다. 자모신 렌즈가 작용해서 비치는 그녀의 모습은 첫 빙의 때 거울에 비쳤던 그것과 똑같았다. 불길하고, 퇴폐적이고, 가엾고, 그러기에 주변에 두른 그 어떤 위압감이 있었다.

“그리고 옛날에 적어 놓은 일기장을 뒤적이면서, 아, 내가 이 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내가 이런 글을 적었었나 하고 느끼는 것과도 비슷했지. 계속해서 말하지만 나쁘지 않았어.”

그렇다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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