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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이 나라를 살림-213화 (213/261)

213. 한 오백년 (1)

천사님과의 대담이 끝난 직후, 나는 한동안 저승을 굴러다녔다.

“100연속 앞구르기!!”

“가리비수우우우! 왜 갑자기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거야!?”

“20연속 옆구르기! 옆구르기 4회 당 뒷구르기 1회 시행!”

“뭐하는 거냐니깐!? 뭐 잘못 처먹었어!?”

말마따나 물리적인 의미로 굴러다녔다.

“핫! 핫! 핫! 핫! 핫…!”

“뭐하냐고오오!”

야리소연이 그런 나를 뜯어 말렸다. 몹쓸 병에 걸려 기행을 저지르는 친척을 바라보는 것처럼 비통한 얼굴이었다.

걱정도 가라앉혀줄 겸 나는 상쾌하게 이마의 땀을 닦았다.

“잔념을 털어내고 있었어.”

“왜 그딴 식으로 털어내는데!?”

“글쎄, 왜일까…. 소연아, 너는 투기장에 가서 잔념을 털어내지. 누가 네게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소연이 너는 과연 모두가 납득할 만한 대답을 입에 담을 수 있을까? 없겠지. 그렇듯 사람마다 마음을 정리하는 방식은 다른 거야. 나는 소연이 네가 남의 개인적인 부분을 존중할 줄 아는 그런 인물이 되면 좋겠구나….”

“비수가 이상해졌어…. …아, 원래 이상한 새끼였지.”

소연이가 뭔가 깨우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나는 땀을 마저 닦고서 말했다.

“밥이나 한 끼 하기로 했었지. 지금 먹으러 갈래?”

“방금 천사랑 먹지 않았어?”

“나는 하나도 안 먹었어. 천사님 혼자 다 처 드시더라.”

“그래? 천사라는 양반이 의외로 식탐이 있네. 어차피 무한인데.”

“내 말이.”

그렇게 나는 소연이와 함께 식당으로 나아갔다.

◈          ◈          ◈

역사가 흐르기 시작한다.

오래지 않아 성은대군은 현성이로부터 왕관을 이어받았다. 항포성 성문 앞에서 있었던 것처럼 꼬장을 부리기 위한 양위 소동이 아니라 적법하고도 준비된 승계였다.

그렇게 성은대군은 성왕이 되었다.

상현공 루지아는 휘파랑 공자와 결혼했다. 알실라 토벌전에서 마음을 바로잡은 덕인지, 반려의 영향인지 성왕의 치세에서 루지아는 권력에 다소 초연해졌다.

사실 초연해지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기도 했다. 왕도는 아직 원기윤 제독 책임론이라는 폭탄이 가져다준 후유증에서 회복되지 못한 상태였다. 상현 공작가를 비롯해 기존 지배 세력이 입은 타격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성왕은 적정한 선에서 타협했다. 타고난 성정이 어진 덕분이기도 했지만, 단순히 작금의 왕국에서 대대적인 개혁을 벌인다는 것이 어려워서이기도 했다. 그에게 심복 몇명은 있을지언정 기존 세력들을 대체할 수 있을 만한 인재는 없었던 것이다.

“다른 모든 정책처럼, 개혁 또한 현재 놓인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행해야만 합니다. 개혁을 위한 개혁도, 책임을 위한 책임도 공허할 뿐 아니라 유해합니다.”

성왕은 그렇게 천명했다.

그럼에도 권력 계층이 서서히 물갈이 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놀랍게도 이승에서 늙은이는 시간이 흐르면 뒈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왕이 각 잡고 칼춤 추지 않는다고 해서, 아랫사람들이 챙겨 먹을 것도 못 챙겨 먹지는 않았다.

오히려 왕국의 젊은이들은 무력한 희생자가 아니라, 늙다리들의 목줄기를 호시탐탐 노리며 이를 드러낸 짐승들이었다.

성왕의 두 왕후가 기반을 깔아준 덕도 있어 왕국민, 전 나투아인, 전 알실라인, 셋 간의 혼혈도 슬슬 왕국의 권력에 발을 담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성 군사동맹의 실패로 인해 긴 혼란기에 접어들었던 대륙의 성 제국은 신세기를 맞이하여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          ◈          ◈

자모신 3 업데이트 패치 이래 저승의 전체적인 편의성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저승의 식당은 그 견본이었다. 식자재가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먹어본 적이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소환해 낼 수 있었다. 먹어본 적이 없더라도 공유받기만 하면 역시 소환해 낼 수 있었다. 원한다면 스스로 요리를 할 수도 있었고 심지어 먹어서 배가 차는 정도조차 조절할 수가 있었다.

식당 안에 들어서자 야리소연 시대의 인물로 보이는 야만인이 훤칠한 키를 가진 나투아 혼혈인에게 말을 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냐 그건? 맛있어 보이는데.”

나투아 혼혈인은 음식을 한 점 입가로 가져가면서 무표정하게 뇌까렸다.

“아아, 이것은 ‘돼지고기 두루치기’라는 음식이다. 콩나물과 간, 돼지고기, 버섯 등을 골고루 볶다가 자작하니 끓이는 음식이지.”

“나도 좀 줘봐라.”

“좋아, 선조님. 받도록 해라, 이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어째 짜증나는 풍경이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요컨대 무한한 자원과 그에 범접하는 조합식, 그리고 그 결과물을 수용할 수 있을 때 사람이 얼마나 질리는 일 없이 지속할 있는가를 알고자 한다면 이 풍경만 보아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자작님. 자작님은 대체 언제까지 식당에 뭉개고 계시려는 거요?”

“식(食)의 끝을 볼 때까지.”

“영원히 계시겠다 이거구만….”

그렇듯 북적거리는 식당에서 우리는 빈 방을 찾아 들어갔다. 어차피 방도 무한이라 어렵지 않았다.

“살기 좋아졌네.”

내가 차 한 잔을 만들어 마시면서 말했다.

야리소연은 닭꼬치 하나를 입에 물고는 우물거렸다.

“네 덕이지 뭐.”

“엣헴.”

“엣헴은 무슨. …근데 참 많이 바뀌긴 했다 야. 네가 몸 얻기 전만 해도 완전 허름했잖아.”

“그때 말이지….”

나는 망자들이 맥주 거품마냥 뭉글거리던 시절의 저승을 떠올렸다. (참고로 맥주는 지금 저승에서 가장 인기있는 술이다. 보리로 빚었다는데 나도 저승에서 처음 먹어봤다.)

그 시절에는 잠드는 것도 고역이었지 참.

“내가 가리비수 니 이름 불렀을 때 완전 놀라 뒤집어지더만.”

“누가 아니래냐. 나 그 때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

“뭐 그렇게 겁이 많아서는.”

“지킬 것이 많아지면 원래 겁이 많아진단다.”

그야 뒈져 갓 저승에 온 입장에서는 지킬 것도 뭣도 없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야리소연의 닭꼬치를 훔쳐 먹자니, 야리소연은 거꾸로 내 차를 가져가면서 말했다.

“왜 그렇게 지킬 걸 많이 가지려고 해?”

“응?”

“살 곳. 먹을 거. 입을 거. 그 정도면 적당하지 않아?”

나는 웃었다. 그리고 설명해 주는 대신 빈 꼬치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왜겠냐?”

나도 야리소연도 제법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내가 변한 만큼 그녀도 바뀌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대답하는데 긴 시간을 들여 고민하지 않았다.

“애들 때문에?”

그리고 그녀는 그 근본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녀의 대답은 여전히 그녀의 언어에 기반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무튼 있어야 퍼 주잖냐. 내 주변 사람들한테 더 퍼주려면 많이 가지려고 할 수밖에 없지.”

“너도?”

“나 같은 녀석이야 언제든 잘 먹고 잘 살고 싶으니까 욕심내는 거고. 그렇게 나 같은 녀석도, 너 같은 녀석도 더 많이 가지려고 하니까 결국 모두가 욕심쟁이가 될 수밖에 없지.”

“죽어서야 편해지는구나.”

“여기서도 3업데이트 패치 이후에야 편해진 거지.”

한동안 먹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바로 그 때, 벌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조그마한 소녀가 활짝 웃으면서 소리쳤다.

“안녕하냐요, 망나니 왕자님! 여기에 있다는 소리 듣고 왔다요!”

◈          ◈          ◈

역사가 흐른다.

4주(柱)의 난.

성 제국의 기둥을 이루던 네 개의 왕가가 서로를 겨누었다. 사국(四國)의 중심에 놓인 황궁은 붉은 찜통으로 변했다. 천자의 의무와 군자의 도리를 논하던 그곳에서는 날마다 새로운 비명과 핏물의 증기가 피어올랐다.

수십 년간 망설인 개전을 벌충하려는지 확전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황좌를 노린 왕들의 다툼은 순식간에 왕자와 공주들의 싸움으로, 영주와 장수들의 전쟁으로 변했다.

대륙은 거기서 흐르는 피를 모두 받아 마실 수 있을 만큼 넓었지만, 제국은 그로 인해 뭉그러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진 못했다.

허물어지기 시작한 제국만큼 야들야들한 것은 없었다. 인재. 영토. 작물. 기술. 모조리 달큰하고 기름진 것들이었다.

물론 충분히 부드러운 고기도 치아가 약하면 베어 먹을 수 없는 법이다.

‘생전의 왕국’에서는 이 사태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다. 나투아와 알실라를 소화하는 것만도 벅찼기 때문이다.

‘지금의 왕국’은 그렇지 않았다.

네 개의 공작가들은 적절한 균형을 이루었다. 안정된 왕도 앞에 지방 영주들 역시 섣부른 대거리를 하려 들지 않았다. 제함후 휘영으로부터 공유된 영지 경영의 기초도 충분히 퍼져 나간 상황이었다. 왕국에는 여러모로 여유가 있었다.

“동해가 걱정이긴 합니다만….”

“그건 저를 믿으시라구요!”

“정말이지 걱정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감수할 만한 위험이었다. 성왕은 여동생이 동해를 수호해줄 거라 믿고 서해 너머로 원정대를 보내기로 했다.

왕국력 115년의 일이었다.

◈          ◈          ◈

“어서 와, 사호. 오랜만이네.”

“진짜 더럽게 오랜만이다요!!”

사호가 술병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려 들고, 나는 그걸 피해 야리소연의 뒤에 숨는 다급한 순간이 있었다.

“음… 비수야. 여자 뒤에 숨는 남자를 뭐라고 부를까?”

“일체의 선입견 없이 오직 능력의 차이로 역할을 배정하는 이 시대의 참된 지도자?”

“미친 새끼인가? …아니, 미친 새끼였지.”

“그것도 신박하게 미친 새끼다요….”

사호가 의자 하나를 빼서(이 의자도 무한히 만들어진다) 다리를 꼬고 앉았다. 야리소연이 건네준 꼬치를 받아먹더니만 나를 뚱한 눈으로 노려본다.

“진짜 빌어먹을. 뭐냐요? 너무하지 않냐요? 그렇게 휑하고 가버리면 남은 사람들은 어쩌라는 거냐요?”

음.

“남은 사람들은 잘 사는 것 같던데….”

“개소리 하지 말라요. 일거리 산더미처럼 던져 놓고는 휴가 가는 상사 새끼한테 느끼는 원망을 대략 천 배 가량 곱하면 그때 우리가 느낀 기분일 거다요.”

“에이, 그런 것치고는 현성이랑 잘 노는 것 같더만.”

“뭐 산 사람은 살아가야 하니까는. 아무튼 그래서 더 할 말 없냐요?”

으음.

“미안해.”

“흥.”

사호는 닭꼬치를 한 입 더 야무지게 베어 먹었다.

그리고 하나 더 베어 먹고는, 손가락을 딱 퉁겨 탁자 위를 산해진미로 뒤덮었다.

“오, 과연 왕후님이시네. 거하다 야.”

“그러는 댁은 왕자님이고, 거 옆에 앉은 분은 진정한 국모님이면서 왜들 이리 빈상 맞게들 먹고 앉았냐요?”

“가끔씩 이런 것도 나쁘지 않거든. 그보다 왜 혼자 왔어?”

“애 아빠랑은 이제 좀 따로 먹을 때도 됐다요. 맨날 같이 밥 먹어서 질리기도 했고. 구호랑은 있다가 또 따로 같이 책이나 좀 읽기로 했는데… 잠깐, 구호 하니 또 생각나서 열 받는데요. 이미 한 차례, 아니 두 차례나 들렀으면서 나한테는 안 온 거 사실이냐요?”

나는 계면쩍은 기분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갈 기회가 없더라고.”

“에휴 정말… 아니, 하긴 왔더라도 나한테 아는 척 할 수는 없었겠지만 그래도 좀 너무하다요.”

한숨을 폭폭 내쉬는 사호에게 야리소연이 술잔을 건네주었다.

“원래 쟤가 좀 그래. 한잔 해.”

“쯥. 고맙다요.”

사호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조그마한 얼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이 저승 식당에서는 취기도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는 걸 고려하면, 좀 취하고 싶은 기분인 듯했다.

그것은 나도 똑같았다. 그 날 시가전에서 타올랐던 나투아의 불꽃마냥 뜨거운 술을 한 모금 목 너머로 넘기고서 나는 달아오른 뺨을 한 손으로 괴었다.

“사호야.”

“음?”

“잘 살아줘서 고마워.”

사호는 술을 다시 한 모금 마시고는 시선을 흘겼다.

“음.”

◈          ◈          ◈

역사가 흐른다.

내전에 개입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대놓고 뛰어드는 것은 그중 가장 하책이다. 사이가 나쁜 친척들도 명백한 ‘외적’ 앞에서는 단결하게 마련이니까. 그래서 왕국은 보다 영리한, 그러니까 사람의 대가리가 달려있으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대륙의 왕가 중 하나를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왕국은 언약천왕가를 지원했다. 덕분에 언약천왕가는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지만, 대륙의 다른 왕가들도 ‘어라? 우리도 다른 놈들 지원받으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어떤 왕가는 북방의 야만족들을 끌어들였다. 다른 왕가는 서방의 야만족들을 끌어들였다. 나머지 한 왕가는 따로 끌어들일 이가 없었는데, 친구 없는 이의 말로는 언제나 비참한 것이었다.

제국의 황권을 놓고 다투던 대륙의 사국지(四國志)는 그렇게 삼국지(三國志)로 변화했으며, 그 상태에서 한동안 길항 상태를 유지했다. 어느 쪽도 결정적인 우위를 잡을 수 없는 가운데 전란만이 길게 이어졌다. 대륙의 흉터가 깊어질수록 대륙 주변의 세력들은 그 피를 빨아들여 배를 불렸다.

왕국 역시 그중의 하나였다. 아마도 건국 이래 최고의 황금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결국 끝이 나는 법이다.

저 멀리 서쪽으로부터, 판이라 불리는 기마 민족들이 대륙에 발을 디뎠다. 그들은 순식간에 성 제국의 숨통을 끊고, 북방의 야만족들까지 위협하여 물러나게 만든 다음 하얀 머리 산 앞까지 쇄도해왔다.

왕국의 방패, 북벽과 나시파 변경백령이 그들과 마주하여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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