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아홉 가지 문답 (2)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하고, 나이가 들수록 나는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조금 더 나이가 들었을 때, 나는 문득 또 다른 생각을 머리에 담게 되었다.
만약 시간을 거슬러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면, 나는 원하는 대로 승패를 뒤집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라진 패배와 뒤집힌 승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 ◈ ◈
나는 휑해진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사님을 바라보았다.
방금 천사님의 대답은 내게 깊은 불안감을 남겨주었다. 나는 그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천사님.”
“네.”
“혹시 제 절개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네? 개소리하지 마십시오.”
다행이다….
나는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다.
지금 나와 천사님의 관계는 그럴 수 없이 괜찮았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업무 동반자. 이보다 효율적인 관계가 그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거기에 사랑이니 뭐니 하는 감정이 섞여 들기 시작하면 그 효율성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제사장처럼 오히려 업무 의욕이 불타오르는 인물도 있지만, 천사님도 나도 그런 유형의 인물은 아닌 것이다.
설탕물을 뒤집어 쓴 톱니바퀴처럼 관계가 둔해지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 천사님께서 혹시라도 내게 연정을 품었더라면, 나로서는 가슴 아프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고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제발, 개소리 그만, 간신이여. 개 같은 생각을 진지하게 한다고 그게 희대의 명안이 되겠습니까?”
아쉬움을 느끼는 걸까, 투덜거리면서 천사님은 가문돔 회를 집어먹었다.
남은 회는 이제 두 점.
“지금까지 은월들 가운데 누가 가장 마음에 남으십니까?”
천사님은 다시금 멈칫했다.
회를 씹어 삼키고서, 차로 입가심을 한 다음 천사님은 대답했다.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선 은월들을 한 명 한 명 돌아봐야 하겠군요.”
이 식당에서 차는 원하는 온도로 언제까지고 유지되었다. 식지 않은 차에서 피어오르는 김처럼 천사님의 말은 담담하게 이어졌다.
“야리소연은 사람으로서 호감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지요. 문명이 꽃피지 않는 환경에서 태어났음에도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습니다.”
그렇다.
그 배려심을 어리석은 일이라고 비웃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근시안적인 우행의 소치일 것이다.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소수의 강자만을 살아남게 만든다. 그리고 아무리 강한 소수도 장기적으로는 약한 다수 앞에 무너지는 법이다.
야리소연. 처음 만났을 때는 질색했었지만, 지금은 그녀가 왕국의 어머니로서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리야는 조금 전 말씀드린 불행한 삶에 그대로 들어맞는 인물입니다만, 자신의 삶 이상의 것을 짊어지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렇다.
지도자의 조건이란 결국 그런 것일 것이다. 권리가 아닌 의무를 중시하는 것. 비단옷이 아닌 사슬로 스스로를 휘감는 것이야말로 위에 서는 자가 갖추어야 할 태도일 것이다.
아리야. 기적에 대한 이야기와 온갖 전승을 둘째친다고 해도, 왕국의 첫 번째 지도자였다.
“비류아 역시 비슷합니다. 그녀가 전쟁 군주로서 다시없는 재능을 발휘했다거나, 무수한 숙청을 통해 권력 체계를 공고히 하는데 재능이 있었다거나 하는 다 아는 이야기를, 저는 지금 구태여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다만 그녀가 행한 희생을 이야기하고 싶으며,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왕국의 개조에 걸맞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다.
비류아의 생애는 고통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한 차례 주저앉았다. 내가 임무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다시 일어서는 일 없이 피로 속에서, 그러나 더 이상 고생하는 일도 없이 마지막을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일어섰으며, 그 두 번째 인생을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지배 하에 놓인 이들을 위해 사용했다.
그보다 더 분명할 수 없는 의미로서 개천은 희생이었다.
비류아.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위해 태어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면서 죽어간 인물이었다.
“그 이후의 왕에 대해서는 당신 역시 잘 알겠지요.”
알고 있다.
“이세는 그 호쾌한 무력보다도 자신의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부분을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 기조는 현성대군도 이어받았지요. 자신의 그릇된 부분을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은 섣부른 재능보다 위대합니다.”
맞는 말이다.
자신을 개선할 줄 아는 사람은 언젠가 무적이 되게 마련이다. 실제로는 도중에 죽거나, 도중에 죽거나, 도중에 죽기 때문에 그럴 수 없지만, 그 가능성만은 늘 한켠에 남아 있다.
현성이는 항상 작년보다는 나은 왕이었을 테고, 내년에는 또 올해보다 나은 왕이 될 테지.
“그리고 성은대군은 그런 현성대군보다 뛰어난 왕이 될 테지요. 그만큼 고생하겠지만 말입니다.”
그 또한 동감할 수 있었다.
성은이의 치세에서 왕국은 비약적인 발전을 맞이할 것이다.
아신군의 말마따나 태평성대를 맞이할 수도 있다. 그렇게 황금기를 맞이한 이 병약하던 왕국은 다시금 수백 년의 시기를 건너뛸 수도 있다. 내가 살던 시대까지 멈추지 않고 쭉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목표하는 바는 그렇다.
그러기에 임무가 끝나기 전에 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해놓고 왔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장차 임무 달성 보상을 받으면 인과 포인트를 분배해서 만전을 기할 예정이다.
어쩌면 내가 놓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야리소연의 말마따나 가리비수의 적은 가리비수라고, 내가 행한 일들로 인해 오히려 그르친 일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 역시 아홉 개의 임무를 수행한 몸.
조언자들과 투닥거리면서, 나 자신도 자기 개선을 꾀해왔다. 최소한 대놓고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실록]이 있어.’
방금 내가 한 생각은 크게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는 [이제 이 왕국에도] 실록이 생겼다는 것.’
자신의 잘못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이 잘못인지 알아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위정자가 왕위에 있다고 해도 나라의 수명에 비하면 그 재위 기간은 턱없이 짧다.
실록은, 왕국의 역사서는 그것을 보완해 줄 것이다. 나라 차원에서 자기개선을 꾀할 수 있게끔, 하나의 지침서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상론일 수 있다. 오히려 실록에 적힌 과거의 성공에 얽매이고 답습만 하면서, 자기개선의 기회를 잃는 경우도 있을 터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인과 포인트 분배를 통해 최대한 그런 상황을 방지하겠지만, 결국 그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달린 문제다. 그들이 잘 살아 주길 바라는 수밖에. 안 되면 내가 나서야겠지만, 그 정도면 감수할 수 있는 수고다.
‘둘째는 [생전의 왕국에도] 실록은 존재했다는 것.’
언젠가 이야기한 바가 있을 것이다.
생전의 왕국에서 실록이 편찬되기 시작한 시기도 딱 이 즈음,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직후다. 그 말은 곧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왕국 내부 정황은 너무도 변해 버린 만큼 그에 대한 기억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테지만, 외국이 차고 기울어지는 것이나 천재지변 같은 것은 충분히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강력한 이점이다.
외국의 정세를 미리 안다면 동맹과 배신, 개전과 휴전의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 천재지변의 시기를 미리 안다면 흉년과 역병과 사고를 대비할 수 있다.
하누리와 흑치사라, 둘과 맞선을 하려 할 적에 벌어졌던 지진만 해도 그렇다. 그것이 언제 벌어지는지 미리 알고 있었다면 희생자의 수를 훨씬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는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다소나마 장밋빛 미래를 꿈꾸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렇듯 은월들은 모두 하나씩 뛰어난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만….”
한 명 한 명, 지금까지의 은월들에 대해 감상을 늘어놓던 천사님께서 마침내 질문에 대한 답을 입에 담았다.
“단 한 명, 개인적으로 마음에 남는 이를 꼽으라고 한다면 비은공주로군요.”
비은공주라.
“조금 더 풀어 대답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저는 비은공주가 왕위를 잇지 않은 것이 왕국에 있어 다행일 뿐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 있어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사님은 차를 한 모금 마셔서 입술을 축였다.
“태어날 무렵부터 새장에 갇혔다, 궁성에서 섬으로, 섬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동해를 제패해도 결국은 그 새장이 커져갈 뿐이다…. 당신과 비은공주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과연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생각이겠지요.”
긁혀 나간 곳마다 차향이 배인 목소리가 식당을 수놓았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바라여 태어날 수 없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자신이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내포합니다. 부모의 신분에 따라, 타고난 재능에 따라, 물려받은 재산에 따라, 외모에 따라, 그 사람이 ‘실제로 할 수 있는 것’들은 제약됩니다. 그 속박은 강고하여 일생을 다 바쳐도 매듭 하나 풀기 어렵습니다.”
그렇다.
그러기에 살아간다는 것은 다만 그 자체로도 힘겨운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비은공주는 벗어나고 싶었던 곳에서 벗어나, 가고 싶었던 곳에 가서,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죽이고 싶은 자를 죽였습니다.”
그랬다.
부왕 앞에서도 결국 그녀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했고, 특이점이라 할 수 있는 나로부터도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 내었다.
“말하자면 비은공주는 살고자 하는 대로 산 것입니다. 죽을 때도 아마 원하는 대로 죽겠지요.”
불행한 삶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앞서 천사님은 정의한 바가 있었다.
비은공주의 삶은 그 반대에 가깝다고 천사님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행복한 삶을 누린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삶이….”
천사님은 잠시 망설였다. 그대로 가문돔 회를 한 점 들어 올리려는 듯 식기를 움직이려다가, 멈추었다.
천사님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저는 그 삶을 부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에야 천사님은 가문돔 회를 집어먹었다.
“….”
“….”
남은 회는 이제 한 점.
내게 남겨진 단 한 가지 질문을, 나는 천사님을 바라보면서 던졌다.
“천사님은 마지막 여왕님입니까?”
◈ ◈ ◈
천사님은 잠시 침묵했다.
아마도 내 마음을 읽는 것이겠지.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었으므로 나는 마음의 옷가지를 벌거벗었다.
앞서 던진 여덟 개의 질문은, 물론 그 질문들 하나하나가 궁금해 하던 것들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궁금함을 합친 것보다도 이것을 마지막 질문으로 하기 위해 던진 것들이었다.
이 질문에 어떤 답이 돌아오든 간에, 자모신에 대한 질문에 그러했던 것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파고들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 앞에 있는 것은 적어도 그 정도 예의는 지켜야할 상대였다.
그 상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 대답에 앞서, 간신이여. 한 가지를 먼저 대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사님이 물었다.
“만약 제가 당신의 질문 그대로의 존재라면 어쩌고 싶기에 묻는 것입니까?”
나는 생각했다.
원하지 않는데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을 생각했다. 죽는 순간조차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생각했다.
쉬이 태어나 쉬이 죽는 주제에, 그 사이에 놓인 삶만은 너무도 힘겹게 버텨내는 그 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내린 결정을 생각하고,
비은공주와 나누었던 행위를 생각하며,
오직 예비로 만들어진 핏줄을 생각하고,
마지막으로는 마지막 여왕님을 생각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주어야 하는 유일한 말을 해주었다.
만조처럼 밀려든 정적이 식당 안에 차올랐다.
천사님이 그 정적을 돌려보낸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간신이여.”
“예.”
“분명 이번 임무 도중 당신이 내린 결정으로 인해 왕국에는 방계의 핏줄이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핏줄 중 누군가는 마지막으로 왕국의 사직을 짊어지는 자리에 앉게 될 지도 모릅니다.”
천사님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당신이 내린 결정으로 인해 마지막 여왕이 왕좌에 앉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천사님은 선언했다.
“그러니 당신이 제게 미안해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천사님은 가문돔 회를 집어 입가로 가져갔다.
텅 빈 접시를 나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든 나는 내 앞자리 또한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 ◈
내가 천사님의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얼마 후, 또는 한참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