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간신 보완 계획 (2)
‘이런이런, 사실이냐구…. 이미 한 차례 확실하게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시 하룻밤을 청해 오다니. 정말이지 이 몸의 인기라는 건 식을 줄 모르는 야생마처럼 날뛰길 거듭하는 거냐구!’
[최초의 성녀: 예언자님, 너무 당황하지 마세요. 예언자님 같은 분께 후대를 남기는데 협력해 달라고 하는 건 지배 계층으로서 당연한 일이랍니다.]
‘다, 당황 따윈 조금도 하지 않았소이다. 그보다 어… 음… 어떻게 대답하지!?’
[첫 번째 은월: 자면 되잖아.]
[개천의 시왕: 흠. 길잡이가 유미이던 시절에는 사돈 아이라고 부르면 되었지. 그런데 증손녀와 아이를 갖게 되면 또 뭐라고 불러야 하지?]
‘입 다물어라 야만인! 시왕님도 여기서 더 족보 꼬지 마시고! 어… 간신 조련사, 아니 천사님. 저 뭘 어떻게 해야?’
[간신 조련사: 진짜 당황하고 앉았군요…. 그치만 저한테 여쭈셔도 뭐….]
정말이지 도움이 안 되는 조언자들이다!
혹시나 싶어 일반 채팅방을 흘끗했지만 거기도 비슷했다. 마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인물들이 1차원적으로 ‘자라’를 연타하는 가운데, 그나마 상현후 같은 이들이 ‘아니, 그러니까 은월의 피가 늘어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하는 견지에서 반대하고 있었다.
처 돌겠네.
“일-단 공주 전하. 하던 이야기를 좀 마저 해도 될까요?”
“어디서 잘까요?”
“그거 전에 하던 이야기요. 그러니까… 학관 사업, 그러니까 교육 사업을 왕실 독점으로 하는 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어… 그거 관련해서, 장차 역사서를 편찬할 예정이에요.”
“후웅.”
“합병한 영토의 민초들을 하나의 ‘왕국민’으로 벼려내기 위해서는 그 편이 효과적이니까요. 달의 여신 신앙도 그런 역할을 하지만, 반도를 통일한 지금은 역사 쪽에서도 단일화 작업에 들어가는 거지요.”
“후우웅.”
“지금까지의 역사들을 통합해서 편찬하고. 앞으로도 꾸준히 벌어지는 일들을 기록하여 남기는 체계를 세울 거예요. 그 이름은 실록이라고 짓고… 음… 정말 별 관심 없으시군요…?”
비은공주는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원래 비은공주가 이 일대 학관의 총장이랄까, 이사장이랄까, 하여간 그런 직위를 받아들인다고 하면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들이었다.
‘아아, 이건 [실록]이라는 것입니다.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죠.’
‘세상에! 그런 효과가 있다니 굉장하잖아요!?’
‘이런이런, 놀라기엔 이르다구요? [기록되어 남겨진 역사]가 있다…. 이로써 어떤 일이 벌어질 거라 생각합니까?’
‘서, 설마… 과거를 보고 배운다거나…?’
‘예에. 장차 커다란 일이 벌어지면, 지난 역사를 참조하여 대처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거지요. [과거란 미래를 비치는 거울]… 이라고 해둘까요?’
‘어떻게 이런 발상을!? 그야말로 천재적… 아니, 악마적인 발상이잖아요!?’
대충 이런 흐름으로 낚시를 마무리할 예정이었는데, 현실 속에서 공주 전하는 날 멀뚱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잘래요?”
좋아.
말 돌리기는 먹히지 않는다 이거지.
“음… 공주 전하. 제가 아이에 대해 가진 관점은 이미 말씀드렸거니와, 또 공주 전하께서 아이를 갖는 것은 여러모로….”
“후자에 대해서는 안심하세요. 흑구질 하면서 섬을 몇 개 거느리게 됐는데 그중 하나에 조용히 숨겨서 기를 거거든요.”
“어디서 어떻게 안심하면 좋을지 짐작도 안 가는뎁쇼….”
“그런가? 그렇네. 그럼 안심은 됐고, 그냥 생각하질 마세요.”
“생각하게 될 것 같은데요….”
“해봤자 손해예요. 무슨 뜻이냐면, 보라고요.”
비은공주는 양 팔을 펼쳤다.
“저는 지금 가장 큰 사략 함대를 거느리는 사람이에요. 덤으로 동해의 패자지요. 실제 가진 힘만 해도 그러한데 전쟁 영웅이라는 명예까지 더해졌어요.
자, 지금 제가 이런 사람이 된 반면. 원래 저 감시하러 왔던 유리아는 결혼해서 제함도 처박혔지요? 그리고 상현 공작은 새로 저한테 감시 붙일 만한 상황이 아니죠. 그럼 어쩌죠? 앞으로의 삶은 지금까지의 삶에 비교해서 어마어마하게 자유로우리라는 걸 그냥 사실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지요?”
으.
“뭐예요. 표정 보니 댁도 잘 아나 보네. 그럼 뭐다? 정식으로 결혼할 수야 없을 테고, 대놓고 아이 가질 수도 없겠지요. 그치만 제가 비공식적으로 남처 남첩 거느리고, 몰래 애 갖는 걸 왕국에서 어떻게 막을 건가요? 정조대 입히고 못질이라도 해서?”
나는 엄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왕가의 평화와 앞날을 어지럽히지 않으려는 공주 전하의 충심과 애국심….”
“그 개소리 재밌나요?”
“…은 아니라도, 음, 아무리 공인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왕국에서 그걸 봐줄 거라고 장담할 수는….”
“봐줄 수밖에 없을 걸요. 봐주게 만들 거고. 선 지키고 눈치 봐 가면서 하면 그럴 수밖에 없을 거 아니에요. 그러다가 은월의 피를 낳기라도 하면, 지난번에 댁이 말했던 것처럼 오라방 양자로 들여보내면 되는 일이고.”
망할, 나는 왜 그런 소릴 해 가지고….
‘아니지.’
그런 소릴 하든, 하지 않았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비은공주는 방금 말한 것들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가 가만히 있는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행동하지 ‘않는’ 것뿐이다. 고결한 충성심 때문이건, 충만한 애정 때문이건, 남들의 시선에 대한 염려 때문이건, ‘하려고 해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이다.
세자는 그런 의식적인 무위(無爲)를 굉장히 강하게 두르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실로 많은 것들을 인내하고 절제할 것이다. 주색에 젖지 않을 것이고 탐욕에 물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여동생은 그런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지난 15년간 성숙한 부분도 있었지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불꽃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짧지만 치열한 생각 끝에 나는 말했다.
“그래서 제가 아이를 드린다 치면, 이 근방 학관을 맡으시는데 더해 말씀하신 일들도 자중하시겠다는 겁니까?”
“흐응. 네 뭐. 왕국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그보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슬슬 받아들일 마음이 드나 보네요?”
그야 감정에 대고 호소하는 게 아니라 힘을 바탕으로 압박하면 협상석에 앉을 수밖에 없다. 나 같은 녀석은 특히 더 그렇고.
거꾸로 내가 감정에 대고 호소해볼까?
“공주 전하. 애 같은 거 가져 봤자 고생만 합니다.”
“알아요. 갑옷 입고 다니는 것도 불편한데 뱃속에 애 담고 10개월이라니 겁나 빡세겠네. 그치만 뭐 그래도 감수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필요하니깐.”
“필요해서 아이를 만들다니요. 공주 전하께서는 모성애라는 지고한 감정을 도대체 무엇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 개소리 재밌냐고요.”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입술을 짚었다.
비은공주는 선수끼리 왜 이러냐는 듯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좀…. 애당초 왕족들은 필요해서 결혼하고 필요해서 애를 갖지요? 그런데 뭔 놈의 모성애?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하겠다는 것만큼이나 영문을 알 수 없는 개소리네요. 낳고 키우면서 정 들 수야 있겠지만 거기까지죠 솔직히.”
[첫 번째 은월: 으-음… ‘결혼과 출산은 지배층의 의무’라는 말이 한 발짝 더 나아가면 저렇게 되는구나.]
[최초의 성녀: ….]
“일단… 공주 전하. 다른 모든 사랑과 같이 모성애 또한 유용한 도구이긴 합니다. 귀부인들이 애 키우는데 열중하게 해주니까요.”
“그거야 그렇겠네요. 임하는 사람의 의욕이란 건 중요하니까.”
[간신 조련사: 야리소연. 제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도 이 대화 뭔가 좀 그렇지 않습니까? 뭔가 인간으로서요.]
[최초의 성녀: ….]
음.
“그치만 지금 말씀드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공주 전하. 저번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 자식들은 모를까, 제 아이는 좀… 그렇게 도구처럼 만들고 싶지 않다고요.”
“아- 그러니까 그것도 괜찮아요. 그냥 그 몸의 씨만 주세요.”
“….”
“그래도 정 거부감 들면 언제부터 가능할지 알려주고요. 그때 가서 알아서 할 테니까는. 그 때쯤 되면 휘파랑 공자께선 공작의 반려가 됐겠지만, 뭐 어떻게든 할 수 있겠죠.”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옆을 흘끗했다.
나와 공주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시아람은 얌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휘영이 시절처럼 특유의 과묵한 태도…가 아니라, 그냥 입을 쩍 벌린 채 벙쪄 있는 것이었다. 나는 한숨을 지은 채 비은공주를 바라보았고, 말했다.
“맞춰보죠. 시아람 경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꺼냈다는 건, 가령 제가 공주 전하의 제의를 승낙하면….”
“네. 숨어 살 아이를 지켜 줄 사람이 필요할 테니까요. 시아람 경은 여러모로 적합하지요. 칼도 잘 쓰고, 사략질 초기에 저랑 호흡 맞춰본 경험이 있기도 하고.”
“정말 공주 전하께서는….”
….
어라.
잠깐만.
“…? 왜 그러나요?”
비은공주가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아니, 대꾸할 수 없었다. 일순 머릿속을 스쳐간 섬광에 나는 집중했다.
“공자?”
“도련님…?”
갑자기 멈추어 선 나를 비은공주와 시아람 경이 의아하게 여겼지만, 나는 계속해서 그 섬광에 집중했다.
- 은월의 피.
-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 이름 없는 섬.
- 비밀리에 자라난.
- 숨겨진 핏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부지불식간에 내가 말했다.
“공주 전하.”
“네?”
“그렇게 아이를 원하시는 이유를 한 번만 더 여쭈어보아도 괜찮겠습니까.”
비은공주는 볼을 긁적였다.
“그거야 저번에 말한 것처럼 저 자신이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지만… 당신과 같은 식으로 말해보자면, ‘예비’는 필요할 거 아닌가요?”
예비.
그 낱말에 나는 깨달았고, 결정했다. 그리고 행동했다.
내가 저승으로 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의 일이었다.
◈ ◈ ◈
저승으로 돌아가자마자, 언제나처럼 나를 향해 달려드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가리비수---! 어서 와---!”
“어서 와 받아치기!”
“크아악! 이, 이 받아치기는…!”
야리소연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졌다. 나는 허무한 미소를 지으면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씨발 뭐죠? 방금 제가 대체 뭘 본 겁니까?”
음.
“천사님… 말씀이 정말 갈수록 험해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이게 대체 누구 때문일까요?”
“어떤 일의 원인을 남으로부터 찾고자 하는 것은 대단히 안 좋은 버릇입니다. 이것도 누가 뭘 했기 때문, 저것도 누가 뭘 했기 때문… 그것이 만성화되면 종국에는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갖는 지분이 소멸합니다. 그야말로 ‘이 세상 모든 것이 남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리게 되는’ 것이니까요. 저는 천사님께서 그런 슬픈 삶을 살길 바라지 않습니다.”
“간신이여,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삶의 교훈으로 삼기에 부족함 없는 말이군요. 근데 그냥 묻는 겁니다만 왕국은 왜 멸망했다고 생각합니까?”
“그거야 당연히 북방 야만족 그 개놈의 새끼들 때문이죠. 특히 그 카한이라는 놈이 진짜 완전 빌어먹을 후레자식인데 생긴 건 진짜 아주 곰탱이처럼 생겨 갖고서….”
“그만 묻겠습니다.”
이런 등신 같은 대화를 하고 있자니 새삼 돌아왔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서방아, 뭐 좀 먹으러 갈래? 너 고생했잖아.”
어서 와 받아치기의 타격으로부터 벗어난 야리소연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중에. 지금은 같이 먹을 사람이 있어서.”
야리소연은 그게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러기 전에 내가 천사님을 향해 말했다.
“천사님. 같이 밥 먹으러 가실래요?”
천사님은 얼굴을 가린 면포를 어루만졌다.
“이걸 쓰고 뭘 어떻게 먹는지 궁금해서 권하는 겁니까?”
“3할 정도는요.”
“나머지 7할은 뭡니까?”
“뭐긴 뭐예요. 말 그대로 밥이나 좀 먹고 이야기나 좀 하자는 거죠.”
천사님은 말없이 나를 면포 너머로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식당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도착할 때까진 제법 시간이 걸렸다. 가는 동안 셀 수 없는 이들이 나한테 자신들만의 어서 와를 날리고, 나는 그에 걸맞은 어서 와 받아치기를 시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기는 저승이다. 시간 따윈 얼마든지 있다. 천사님도 나도 식당에 가는 길을 서두르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느긋하게 식당에 다다를 수 있었다.
자리에 앉은 나는 비은공주가 저며주었던 가문돔 회를 만들어냈다.
“드세요.”
반대편 자리에 앉은 천사님이 말없이 가문돔 회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그 면포를 걸친 채 어떻게 먹을지 궁금했지만, 나는 다른 의문을 담아 천사님을 바라보았다.
“천사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