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현왕, 현성 (2)
여러모로 현성이는 변하지 않았다.
내 절절한 외침에 현성이가 깜딱 놀랐다.
“그대는…?”
놀란 이들은 물론 그밖에도 많았다. 침착하던 세자조차 얼어붙었으니 말이 필요할까.
그리고 나는 그들이 ‘무엄하다.’느니, ‘국왕 폐하와 세자 전하께서 이야기 나누시는데 끼어드느냐.’ 같은 소리를 입에 담아 양식미를 지킬 만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현왕 폐하. 저는 휘파랑, 별의 목소리를 듣는 제함도의 공자입니다.”
왕도로 올려보낸 장계들 속에서 날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고기 한 점 없이 수육을 만드는 일과 비슷할 것이다.
[첫 번째 은월: 어떻게 만드는데?]
‘내 말이 그거야.’
[간신 조련사: 사실 콩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는 합니다.]
‘요컨대 이상한 짓이라 이거죠.’
알다시피 세자에겐 그런 변태끼가 없었다. 현성이는 곧바로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늙은 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가 그 성소년 공자구나. 그대에 대한 이야기를 짐 또한 들었노라. 찾기 힘든 능력을 발휘해 보기 드문 전공을 세웠다지.”
“과찬이옵니다, 폐하. 세자 전하께서 말씀하셨듯 폐하께서 베푸신 성총이 없었던들 본인이 어찌 감히 그런 공을 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서설을 늘어놓고서, 나는 고개를 깊이 수그렸다.
“그것만으로도 역할을 다하신 셈인데, 폐하께서는 왕국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으려 하시나이다. 별들의 목소리가 이미 그 고결함을 상찬하고 있지만, 저 또한 감격을 아끼지 못하겠어요.”
현성이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음. 그러한가. 영웅인 그대가 그리 짐을 우러러본다니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구나. 하지만 지금 짐은 세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이도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겠는고?”
조무래기는 빠져 있으라는 말이었지만 당연히 안 따를 거다.
“예, 바로 그런 와중이기에 감히 한 말씀 올린 것이랍니다. 과분하게도, 저는 지금 세자 전하의 자문사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말하고서 나는 세자를 돌아보았다.
세자는 망설였고, 난처해 했으나, 곧 표정을 다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부왕이시여. 성소년 공자는 부족한 저를 그 뛰어난 지혜와 별들의 목소리로 보좌해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그에게 저와 관련된 일이면 어떤 상황이든 조언을 아끼지 말라고 허가했습니다.”
정식으로 나를 이 대화에 끼어들 수 있게끔 해주는 말이었다. 사실 그따위 허가가 오간 적이 없다는 걸 감안하면 정확한 지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성이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 안쪽을 툭툭 두드렸다. 대놓고 불쾌감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짐과 이야기하는 와중이어도 말인가?”
얘 진짜 왜 이렇게 꼰대질을 하는 거람.
[최초의 성녀: 원래 좀 그런 기질이 있긴 했지요.]
하기야 그렇다. 성은이도 아빠가 이상해졌어요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진 않았다.
물러서지도 않았다.
“그는 별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런 그가 폐하께 말씀을 올리는 중요한 순간에 입을 연다는 데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세자를 위한 의미 말인가, 짐을 위한 의미 말인가?”
거기에는 내가 대답했다.
“현왕 폐하. 그 둘이 어찌 다르겠나이까? 둘 모두 왕국을 위한다는 데에서 일치하지 않겠어요?”
원론적인 말에 궁색하지 않은 반박을 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성이는 그런 시도를 했다.
“세자여. 그대는 바르지만 어리다. 세상에는 요사하고 기이한 수작들이 많고도 많아, 심지가 굳은 이도 교언영색에 홀리곤 하는 법이다. 그대가 지금 그런 일을 겪고 있다 여기지는 않는고?”
‘와.’
대놓고 말을 늘이면서 나를 사기꾼으로 몰아가는 모습에 성은대군을 비롯한 모두가 표정을 굳혔다. 함께 전쟁을 치르는 동안 내가 키워온 신뢰는 물론이요, 그렇지 않아도 양위니 뭐니 하는 견제구 때문에 불편했는데 기름이 끼얹어진 거다.
물론 그런 상황이라 해도 불편함을 표현하기란 어렵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 대부분이 현성이보다 어른이었으며 현성이만큼 권력자는 아니었다. 불쾌감 같은 것을 굳이 입 밖으로 표현함으로써 실질적인 불이익을 감수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한 명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오라방 다 컸으니 자리 물려주겠다고 했다가, 이제는 또 어리다고 했다가 참 바쁘시네요.”
비은공주가 열 받은 고슴도치의 태세를 취하면서 말했다.
현성이가 곤혹하는 와중에, 현성이의 근위대장이 길었던 침묵을 깼다.
“공주 전하, 폐하께 그런 무례한 태도를 취하시면….”
“너야말로 은월의 피들끼리 대화하는데 뭘 무례하게 끼어들고 자빠졌어요? 확 대가리를 깨버릴까 보다.”
근위대장이 멈칫했다.
비은공주는 팔짱을 낀 채 현성이를 노려보았다.
“아바마마. 결국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건가요? 오라방한테 옥좌를 물려주겠다는 건가요, 말겠다는 건가요? 저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잘 모르겠는데 이해할 수 있게 말씀해주실래요?”
“공주야. 이렇게 오랜만에 보게 되어 기쁘구나. 이번 전쟁에서 네가 활약했다는 이야기는….”
“아, 말 돌리지 마시고요. 그래서 뭔 소릴 하고 싶으신 거냐고요.”
현성이가 침묵했다.
잃을 게 없는 해적 공주는 후환 따윌 염려하지 않는다. 그런 이를 상대로 대화가 길어질수록 정치적 피해만 누적될 뿐이다.
‘가족 간의 훈훈한 대화로 출구전략을 짜는 것도 방금 거절당했지.’
아마 평상시라면 이때쯤 세자가 개입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성은대군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덕분에 나도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공주 전하, 말씀이 너무 험하세요. 폐하께서는 왕국을 다스리는 지존이나이다.”
“후웅.”
비은공주가 입을 다물었다. 그것만으로도 현성이 입장에서는 단단히 체면을 구긴 셈이었지만, 나는 계속 말했다.
“그리고 폐하의 의중을 여쭈시는 것 또한 험한 언행이옵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여러 차례 자신의 옥좌를 물려주겠노라 선언하시지 않으셨나요? 달이 기울고 참에 따라 저 광대한 바다가 움직이듯 지존의 언행에는 마땅히 그만한 무게가 수반되는 법인걸요.”
“하긴 그렇겠네요! 아바마마께서 그걸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말씀하셨을 리 없지요!”
나와 비은공주가 히히덕 거렸다.
비로소 현성이는 자신이 너무 나갔다는 것을 깨달은 듯 얼굴을 붉혔다.
‘뭐 그렇게 만들어준 건 나지만.’
현성이 입장에서는 인사 대신 견제구를 날리려 했는데 어어 하다 보니 죽빵을 얻어맞은 느낌 아닐까.
“비은이도, 공자께서도 그쯤만 해주십시오.”
결국 쓴웃음을 짓고서, 성은대군이 나를 바라보았다.
“두 개의 전쟁이 끝난 지금,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왕국을 위해 싸우다가 전장에 뼈를 묻은 병사들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앞으로 왕국에 속해 살아나갈 민초들입니다. 책임을 묻는 것도, 지는 것도, 그들을 고려하지 않고 행한다면 땅이 아닌 허공에 발을 딛고 걸으려 하는 것만큼 공허한 행위에 불과합니다.”
[첫 번째 은월: 오자마자 병사들에 대한 치하와 위로는커녕 어설픈 수작으로 자기 잘못 덮으려는 아빠한테 실망했다 이거지?]
‘바로 그거지. 나로서는 감상적인 말이다 싶지만, 성은이는 그런 애니까 뭐.’
[첫 번째 은월: 너도 똑같이 생각해서 그런 거 아니었어?]
‘설마.’
내가 현성이에게 열이 받았던 이유야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그 시야의 협소함 때문이다.
‘왕이면 더 넓게 보고 크게 일해야지.’
왕국은 삼국을 통일했다.
반도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왕국은 앞으로 무수한 내부 혼란을 앞두고 있다. 동시에 서쪽으로는 대륙을, 북쪽으로는 변방을, 동쪽으로는 열도를 상대해야 한다.
그런 상황인데 귀족 정치용으로, 그것도 세자를 상대로 양위 소동을 벌이는 왕이라니!
‘내가 이 염병할 왕국을 살리느라 뭔 개고생을 하고 앉았는데!’
억울해서 불을 토할 것 같다!
[간신 조련사: 방금 한 말에는 딴지 걸지 않는다고 쳐도 말입니다. 현왕의 입장으로서는 국내 기반부터 다져 놓는 게 필요하다 여긴 것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죠. 그치만 그럴 거면 고위층만 모아놓고 밀실에서 하던가 할 것이지, 사람들 다 보는 이런 성문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압박용? 괜히 소문만 이상하게 퍼져서 민초들 사이에 혼란만 생길걸요.’
어설픈 정치질은 안 하느니 못하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해왔어도 통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다르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실전인 것이다.
그걸 자각하지 못한 채 삼국통일 이전의 사고방식을 유지한다면 장차 왕국에 해악을 가져오게 된다. 흐리멍텅한 상황 인식은 화를 부르게 마련이니까. 그런 짓거리에 효과가 있다는 ‘교훈’이 남지 않도록 강수를 둘 필요가 있었다.
효과가 있었다.
잠시 후 현성이가 말했다.
“미안하구나.”
정말이지 여러모로 현성이는 변하지 않았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는 세자의 말이 지당하다. 지존의 언행에는 먼저 그 무게에 대한 고찰이 앞서야 한다는 성소년과 공주의 말 또한 지극하다.”
이쁘장한 외모도, 드높은 자존심도, 예민하다 못해 예리하기까지 한 감정도, 그리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잘못을 자각하면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도 변하지 않았다.
“세자에게도, 귀족들에게도, 민초들에게도 짐이 잘못을 저질렀구나. 그 사실을 깨우쳐준 데에 감사한다.”
현성이는 고개를 수그렸다.
성은대군이 그것을 막았다.
“아닙니다, 부왕이시여. 그보다 이렇게 널리 열린 자리에서 지존을 세워둔 채 말씀을 올리자니 민망합니다.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들어가서 진언할 수 있게끔 허가해주시겠습니까.”
현성이로선 거부할 이유가 없는 말이었다.
“그러자꾸나.”
◈ ◈ ◈
그 후에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 실무적인 회담이 오갔다.
권력자들끼리 이상한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쓸데없는 수작도 부리지 않을 때 얼마나 많은 일들이 빠르게 진행될 수 있는지 알면 놀랄 것이다.
“전후 영토의 분할은 그렇게 할 예정입니다. 혹시 부왕께서 해주실 조언이 있다면 감사히 듣겠습니다.”
“세자가 정리하여 올린 의견이 지극히 타당하다. 짐으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상현공으로서는 여기에 만족하는가?”
“예. 왕도 공작들을 추스르는 건에 대해서는 제게 맡겨주소서.”
성은이야 애초부터 자존심과 수작질 같은 것에 무심한 인물이고, 현성이도 어줍잖게 들이대다가 작살난 만큼 솔직하게 대화에 임했다. 상현공 루지아는 현성이 상위호환급으로 털린 전과가 있다. 이야기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반도 사람들 모두를 왕국민으로 정련해내고자 하는 세자의 의지는 알겠다. 세자는 거기에 만족하는가?”
“예, 만족합니다.”
“누군가는 세자가 사랑을 알지 못해 가엾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 이가 제 앞에 나타난다면, 저는 제 가슴을 갈라 왕국과 민초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줄 것입니다.”
“세자의 마음가짐이 훌륭하다.”
성은대군의 결혼 문제도 손쉽게 넘어갔다.
[첫 번째 은월: 체통에 맞지 않는다느니 어쩌느니 질질 안 끌어서 좋네.]
‘체통도 체면도 그 자체가 절대적인 목적이 아니라 일종의 도구니까 말이야. 그 도구보다 유익하다는 게 확실하면 자연히 거둬들이게 되지.’
[첫 번째 은월: 그런 거면 대체 왜 ‘지체 높은 나한테 너 같은 야만족이 감히~’ 어쩌고 하면서 내 구애를 거절했던 거임?]
‘나의 정절과 체통은 그 자체가 절대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란다.’
[첫 번째 은월: 미친 놈….]
뭐래.
그런 식으로 빠르게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유일하게 한 차례 난항한 부분이 있다면 차후의 정세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왕께서 나라를 세우셨을 때 이런 기분이셨을꼬.”
차라리 탄식에 가까운 어조로 현성이가 말했다.
“짐의 치세는 나투아를 왕국으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용렬한 짐은 일생을 들였음에도 그조차 변변히 해내지 못했지. 그런 와중에 이젠 알실라마저 하나가 되었노라.
그런 가운데 대륙은 예나 지금이나 거대하며, 북방은 소란스럽고, 검은 열도는 그저 몇 개 집안이 연합한 것만으로 반도의 한켠을 잠시나마 집어삼킨 것이다. 그런 앞날을 앞둔 세자는 두렵지 않은가?”
성은대군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답했다.
“폐하께서는 스스로를 용렬하다 낮추어 말씀하셨지만, 소자야말로 뛰어난 인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소자는 소자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도움을 청할 것입니다.”
성은대군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법왕에게 짐을 나누어 줄 것입니다. 북방의 열쇠를 쥐고 있는 나시파 변경백가를 지원할 것입니다. 바다에 대한 방비를 단단히 할 것입니다. 교역의 물꼬가 막히는 일 없도록 주의를 기울일 것이고, 장병들의 육성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성역을 찾기 위해 떠나간 이들의 유지를 잊는 일 없도록 할 것입니다.”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성은대군은 고개를 들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보답받지 못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오직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하게 두려운 일입니다.
그리고 소자는 언제나 최선을 다할 것이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나이다.”
침묵이 흘렀다.
늙은 왕은 말없이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성은대군은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믿는 듯 조용히 그 시선을 마주했다.
현왕이 말했다.
“세자의 말에 가슴이 후련하구나. 하지만 그렇게 최선을 다하지 못할 이들은 어떻게 두려움을 이겨내면 좋을꼬.”
음.
“그들 또한 너무 심려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가슴을 폈다.
“장차 어떤 미래가 펼쳐지더라도, 왕국의 위기 앞에는 반드시 누군가가 서 있을 것이옵니다.”
아마도 내가.
어쨌든 내가 되살아나기 위해서 말이다.
[간신 조련사: 그대는 정말….]
‘원래 세상이란 건 위대한 사람의 사명감과 평범한 사람의 이기심이 뒤섞여 움직이는 법입니다.’
[간신 조련사: 당신은 둘 중 어떤 사람입니까?]
뻔한 걸 굳이 말할 필요가 있으려나.
◈ ◈ ◈
다시금 물 흐르듯 논의가 이어졌다. 이미 정해 놨던 것을 현성이의 재가를 받아 확정시키는 것뿐이라 오래는 걸리지 않았다.
[ 알실라 정복 - 100% ]
길었던 임무에 마침내 방점이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