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현왕, 현성 (1)
성은대군이 조아린 고개를 들면서 화답했다.
“그것이 어찌 저희가 해낸 일이겠사옵니까. 적어 올린 바 있습니다만, 여기 있는 이들 모두 폐하의 은혜를 잊은 일은 단 한 차례도 없었나이다. 성상의 은혜가 달빛에 섞여 내리지 않았다면 어찌 가능했겠습니까.”
“세자의 겸양이 과하다. 달빛의 아름다움이 달에 달린 일이라고 하나 해가 빛나지 않는 날에는 달 또한 어둠에 잠기는 법이다. 가슴을 펴고 달성한 위업과 마주하여라. 그대들에겐 그만한 자격이 있다.”
“망극하옵니다.”
[첫 번째 은월: 으으음…. 말들이 어째 현란하네.]
‘[별 문제 없지?], [넹]을 엿가락처럼 늘려놓은 것뿐이지만.’
[첫 번째 은월: 현성이 제법 존경받는 왕인가봐?]
‘아니. 그냥 왕실이 존중받을 만큼 염이 든 거야.’
모두들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시왕 비류아, 그 반동으로 다들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날뛰었던 무왕 이세의 초기 시대, 심히 담백했던 후기 시대를 거쳐, 마침내 왕이 왕 다운 예우를 받는 이 시대에 도래한 것이다.
대단히 감개무량한 기분에 잠겨 있던 무렵이었다.
현성이가 말했다.
“그대들이 그토록 짐의 공덕을 높이 여긴다면, 짐이 한 가지 부탁을 해도 괜찮겠는가?”
사람들은 서로를 마주 보진 않았다. 왕 앞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무례한 일이었다.
그러기에 다들 뒤통수와 옆통수로 당혹을 교환하고 있자니, 현성이는 천천히 걸어왔다.
장갑을 벗고서 주름진 맨손을 드러낸 왕이 큰 아들의 어깨를 짚었다.
“세자여.”
성은대군이 고개를 조아렸다.
“예, 폐하.”
“이 아비는 네게 양위를 하고자 한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 ◈ ◈
그 침묵은 당혹에 찬 외침들로 깨졌다.
“폐하!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께서는 세자로 계실 적에 나투아를 쓰러뜨리셨습니다. 그리고 왕위에 오르신 지금 알실라를 병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옛 적들이 쓰러지고 이 반도 전역에 달빛이 쏟아져 내린 데에는 폐하의 공덕이 지극한 것입니다! 그런 대왕께서 양위를 하신다니 감당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거두어 주시옵소서!”
상현공, 남전후, 서군후 등 왕국의 중추를 이루는 귀족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세자 역시 조용하게 말했다.
“소자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소자에겐 아직 부족함이 많고 왕국에는 산적한 과제들이 널려 있지 않사옵니까.”
“짐도 이제 눈이 침침해졌다. 즐겨 읽는 책의 문장도 흐릿한 와중에 유독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짐의 코앞에 놓인 환갑이다. 대하의 물길이 흐르듯 짐 또한 달의 여신의 가호를 세자에게 물려줄 때가 온 것이다.”
“논자가 말하길 사람의 나이 50이면 지천명(知天命)이라, 사람이 진짜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라 하였습니다. 소자는 감히, 현명함을 한결 더한 폐하의 통치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왕국민들로부터 앗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직에 차마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세자는 그리 말한다만, 진정코 왕국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늙은이의 그림자가 오래 이어져 곰팡이가 핀다면 그것이 과연 왕국을 위하는 길이겠는가? 세자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왕과 세자 사이에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귀족들은 고개를 조아린 채 말이 없었다.
나도 말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는 내가 입을 열 만한 자리가 아니어서 그랬다면 지금은 귀족들과 같은 이유였다.
‘머릿속이 분주해지면 입이 한가해지는 법이니까.’
그렇게 이승이 침묵에 잠긴 가운데, 저승은 거의 전쟁터로 화했다.
[개천의 시왕: 시우 손자 녀석, 대체 지금 저 말을 왜 꺼낸 거지?]
[최초의 성녀: 으으으음, 그러게요…? 사람들 당황하는 거 보면 사전조율 거치지도 않은 것 같은데…?]
[개천의 시왕: 내 말이 그것이다. 저 말이 부를 파장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닐 텐데?]
[최초의 성녀: 좀 지켜봐야겠네요….]
야리소연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첫 번째 은월: 웅… 왜들 분위기가 이래? 여기도 그렇고 저기도 그렇고.]
내가 대답했다.
‘왕이 왕 다운 대접을 받고 있는 시기잖아.’
[첫 번째 은월: 무슨 소리야?]
‘너나 가리비수가 촌장 노릇 하던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뜻이야. [저 그만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님이 하세요.]라고 말한다고 해도 이루어지긴 어려워.’
[첫 번째 은월: 웅… 어째서?]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나머지 두 은월이, 혹은 흑치사라를 비롯한 무수한 이들이 야리소연에게 그 이유를 가르쳐주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내가 입을 연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나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첫 번째 은월: 아니, 나도 바보는 아니거든. 촌장 노릇도 해봤고. 그래서 이끄는 무리가 커질수록 수장 자리 넘기기 어려워진다는 건 안단 말야. 그치만 쌩판 남한테 넘겨준다는 것도 아니고 자기 아들한테 물려준다는 거잖아? 그래도 여전히 어렵다는 거야?]
그리고 두 번째로, 은월들의 시조는 그보다는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응. 어려워.’
나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네가 방금 말한 대로 이끄는 무리가 커질수록 수장 자리는 넘기기 어려워져. 왜 그런가 하면, 수장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수많은 이해와 타협의 결과물이기 때문이야.’
[첫 번째 은월: 우웅?]
‘마치 해가 동쪽에서 뜬다거나, 새벽이 되면 닭이 운다는 것처럼, 그 수장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 곧 하나의 법칙으로서 사람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거야.’
[첫 번째 은월: …잘 이해가 안 되는데.]
‘현성이가 어느 날 돌연 사라진다고 생각해봐. 그럼 어마어마한 혼란이 벌어지리란 건 짐작할 수가 있지? 서로 성은이에게 줄을 대려고 난리를 친다거나, 그 와중에 비은이 대박을 노리는 소수파가 활개를 친다거나, 누군가는 아예 자기가 왕국을 삼키려고 들 수도 있겠지.’
[첫 번째 은월: 응. 그건 이해가 되는데.]
‘대가 바뀌는 경우에도 그 혼란은 비슷하게 벌어져. 다만 조금 작은 규모의 혼란이 벌어질 뿐이지. 양위를 하든 뭘하든 상관없이.’
[첫 번째 은월: 계승 과정에서 말이야?]
‘응. 그리고 계승이 이루어진 다음에도 문제가 돼. 상왕(上王)이 멀쩡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불씨인 셈이거든. 왜인지 알겠어?’
[첫 번째 은월: 어… 자기 아버지 부려먹기 어려울 테니까?]
‘정확해.’
[첫 번째 은월: 그치만 잠깐만. 왕한테 대하기 어려운 사람 있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잖아? 이세만 해도 어렸을 적에 시우가 있었고… 또 나이 들어서는 아내들 있었고. 현성이도 자기 아내 대하기 어렵다고 하고….]
‘그 사람들은 왕위에 앉아 봤던 사람이 아니지. 앉을 수 있었던 사람조차 아니고. 다시 앉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야.’
[첫 번째 은월: 하지만 현성이는 그런 사람이다?]
‘응.’
[첫 번째 은월: 그치만 현성이가 그럴 리 없잖아. 자기가 물려준 왕 자리에 왜 다시 앉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야리소연 말마따나 그런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치만 그럴 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중요하다.
비은공주에게 이야기했던 것과 똑같은 문제다.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용납할 수 없는 종류의 문제들이 있다.
나라 일에는 특히 그런 일들이 많이 생긴다.
‘당장은 좋게좋게 넘어갈 수 있을 지도 모르지. 그러나 10년, 20년 계속 그럴 수 있겠어?’
제 아무리 부자지간이라도 사람인 이상 모든 의견이 일치할 수는 없다.
그래서 만약 현성이와 성은이 사이의 의견이 갈린다면?
그리고 그런 일이 거듭된 결과, 현성이가 ‘에이, 내가 다시 왕 노릇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면? 현성이가 그런 미친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현성이 주변에 모여 있는 이들이 ‘현왕 폐하께서 통치하시던 무렵에는’ 같은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하면?
왕실의 꼬라지가 개판으로 치달으리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양위가 가능한 경우는 오직 세 가지뿐이다.
1 큰 병을 앓고 있거나, 죽음을 앞두고 있을 만큼 노쇠하여 양위가 불가피한 경우.
2 아예 반란이 벌어지거나, 그에 준하는 정변이 일어나 상왕의 정치적 영향력이 완전히 소멸한 경우.
3 긴 시간 논의와 합의를 거친 결과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어렴풋이나마 고지가 된 경우.
‘하지만 성은이 말마따나 55살이면 아직 쌩쌩하지. 수염에 윤기 도는 거 보면 건강 나쁜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금 두 사람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지? 근데 지금 귀족들은 놀라고 있단 말야.’
[첫 번째 은월: 세 경우 전부 아니라는 거네.]
‘응.’
[첫 번째 은월: …? 그럼 왜 그러는 거야? 현성이가 방금 니가 말한 것들을 몰라서?]
‘그럼 멍청한 거지. 근데 현성이가 그 정도로 빡대가리는 아냐. 그럼 남는 경우의 수는 한 가지뿐이지.’
그러는 동안에도 현성이와 성은대군 사이의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몇 번이나 말하거니와, 세자여. 그대가 이 왕국을 더욱 큰 번영으로 이끌 것이다.”
“그 믿음을 감당하기 어렵나이다.”
“짐이야말로 그런 세자의 말을 감당할 수가 없다. 보라. 그대들이 알실라를 병탄하자마자 열도와 새로이 싸워야 했던 이유가 누구 때문이었는고? 거기에 짐의 부덕함이 없다고는 누구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슬쩍 운을 띄우는 현성이의 말에 성은대군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 귀족들 역시 슬슬 왜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것인지 알아차렸는지 입맛을 다시는 눈치였다.
성은대군이 말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돌아가서 논의를 해보아야 하겠습니다만….”
“아니다. 그렇게 번거로이 논해야 할 일이겠는가. 여기서 논하면 충분하리라.”
“….”
성은대군이 머뭇 입을 다물었다. 답답한 얼굴로 차마 뭐라 말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수그려 그 붉은 머리카락을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마침내 야리소연도 눈치를 챘다.
[첫 번째 은월: 와.]
‘응.’
[첫 번째 은월: 지금 현성이 쟤 그러니까… 땡깡 부리는 거야? 양위 어차피 안 될 거 알고서?]
‘맞아.’
요컨대 현성이의 이번 양위 선언에 감추어진 속내는 대충 다음과 같을 것이다.
- 원기윤이를 수군통제사로 임명한 것 갖고서 저한테 뭐라 하지 말아주세요.
- 아니면 저 왕 노릇 그만두겠습니다.
- 근데 그만두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묻고 넘어가자는 이야기를 빙 둘러 꺼내고 있는 셈이다.
[첫 번째 은월: 현성이 얘 좀 봐.]
‘내 말이.’
요 꼬맹이 좀 봐라.
‘40년 안 본 동안 어디서 주름살이랑 잔머리만 늘어 갖고 왔다 이거지?’
현성이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턱수염을 어루만졌다.
“짐의 부덕이 크다. 옛 적을 깨뜨리고 새 적마저 물리친 세자의 앞날에 더 이상의 그림자를 드리워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니 세자가….”
바로 그 순간,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폐하아아아, 실로 성덕 어린 말씀! 과감한 결단이시옵니다아아아!”
현성아, 너 오늘 잘 걸렸다고 복창해라.
◈ ◈ ◈
나는 정치적인 수작에 관대한 편이다. 왜냐면 내가 그런 수작을 자주 부리니까.
하지만 그렇게 관대한 내가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나 외의 누군가가 그런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팽개친 채 그런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폐하, 폐하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쉬이 꺼내셨겠사옵니까? 실로 장이 끊어지는 고통을 견디면서 그 성스러운 피를 입에 머금고 그런 말씀을 꺼내시지 않았겠사옵니까. 그런 아픔을 모두 고이 삼키시고서 오직 왕국을 위한 결단을 내려 주시니, 그 간곡한 바람을 왕국의 대소신료들과 귀족들과 국민들은 물론이요, 이제 새로이 왕토에 들게 된 이 알실라 사람들조차 어찌 오해할 수 있겠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