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신세기 (2)
“전하께서도 익히 짐작하시겠지만, 역시 상징성과 실용성을 두루 갖춘 건 결혼이네요.”
성은대군이 한숨을 지었다.
“할아버님과 같은 길을 걷는 거군요.”
“어느 쪽이냐면 현왕 폐하께서 예외에 속하는 거지만요….”
현성이와 사호를 결혼시키기 위해 투입했던 인과 포인트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말을 이었다.
“왕실이든 귀족가든, 그 혼인은 개인의 기호가 아니라 가문의 역량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일이에요. 가문과 가문의 결합. 후계자의 확보. 그것은 ‘자신이 속한 세력의 증강과 존속’을 꾀하는 개념으로 접근해야지, ‘사랑이라는 이름의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우는 것은 어불성설이니까요.”
“부왕께서는 첩도 후궁도 두지 않고 어마마마께 일편단심을 바치고 계십니다만….”
“그것 역시 근본을 따지자면 왕가의 사정에 의한 것이니까요. 적검후께서 세자 전하와 공주 전하라는 은월의 피를 두 분 낳으셨는데, 여기서 첩이나 후궁이 또 은월의 피를 낳으면 계산이 복잡해지잖아요?”
그러니까 현성이는 사호 외의 첩이나 후궁을 ‘들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들이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현성이와 사호가 서로 양호한 부부 관계를 이룩하고 있다는 사실은 역학적 필연이 아니라 순전한 우연에 근거한다….
[최초의 성녀: 타당한 이야기네요. 당장 비은공주도 섣불리 은월을 늘릴 수 없어서 결혼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첫 번째 은월: 그러게. 은월들 중에 그래도 자기 좋아해주는 애랑 결혼한 게 비류아지만…. 비류아가 결혼을 결심한 것도 나라를 위한 거였고….]
[개천의 시왕: 모순적이지만, 개인으로서도 왕으로서도 가장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낸 인물은 아예 처음부터 정략결혼을 해야 했던 내 아들이로군.]
저승에서 복잡한 심경을 담은 대화가 오갔다. 성은대군 역시 여러 가지 의미로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말을 이었다.
“세자 전하께서는 아직 미혼이시죠. 상현공과의 결혼을 왕비께서 막다 보니 생겨난 시기적 공백일 텐데, 원기윤 건을 비롯해 상황이 변했으니 더 이상 그 부분은 문제가 안 될 테지요. 전하 자신이 전쟁 영웅이기도 한 만큼, 결혼할 만한 상대를 고를 수 있는 입장이 되신 거예요.”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생각해보자면…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운 나투아 출신의 무사나 알실라 권력자의 딸을 세자비로 고르는 식이 되겠군요.”
“예. 그리고 그 둘을 바탕으로 삼아 나투아 출신과 알실라 출신을 잘 끌어 들일 수 있도록 물길을 터야겠지요. 그대로 군사 계통과 기술 계통의 등용문으로 삼으시면 되겠네요.”
성은대군은 고개를 갸웃했다.
“군사 계통과 기술 계통뿐입니까?”
“네. 학문 계통은 하현 공작가와 태학관, 신앙 계통은 잔월 공작가와 신전이 있으니까요.”
“아, 그 쪽은 그렇게 핏줄에 까다롭지 않지요…. 과연, 그렇군요. 말씀하신 것처럼 하현 공작가와 태학관, 잔월 공작가와 신전, 이렇게 서로를 보완하고 견제하는 게 그 이유로군요.”
“학문과 신앙이라는 특성 탓이 더 크겠지만, 그 말씀도 옳아요. 말씀드린 대로 외척들을 두시면 상현과 신월 역시 비슷하게 보완하고 견제할 수 있겠죠. 시기도 명분도 적절하고.”
성은대군은 이해한 표정을 지었다. 밝은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문이라는 형태를 띠게 되는군요. 인재 등용방식 자체를 결정한다기에는, 그저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을 확장한 것뿐이지 않습니까.”
“첫 걸음을 크게 떼면 가랑이가 찢어지게 마련이니까요.”
“두 번째 걸음은 무엇입니까?”
“태학관을 확대하는 거요.”
“태학관을요?”
성은대군이 눈을 깜빡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잘 따라오셨다면, 인재가 인재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들이 그만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 있었기 때문임을 아셨을 거예요.”
“그 부분은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태학관의 규모를 키우고, 입학 자격을 없애고, 그 안에서 군사, 학문, 기술, 신앙 등 모든 것을 가르치면 어떨까요?”
“누구나 인재로 만들 수 있다?”
“적어도 인재의 새싹으로 만들 수는 있지요.”
실제로는 개개인이 타고난 자질이 그 새싹들 중에 누가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결정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보다는 훨씬 인재들이 늘어날 터였다. 성은대군은 턱을 매만진 채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 생각에 현실을 들이부었다.
“그렇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해결해야 할 것들이 많아요. 돈도 많이 들고요. 전하께서 보위에 오른 뒤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시행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당분간은 말이 나온 이들 중에 결혼할 상대부터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정확해요.”
성은대군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자의 머리카락 빛깔은 노을을 닮아 있었다. 땅거미가 바닥을 뒤덮듯 그의 앞머리는 축 늘어져 얼굴을 덮었다.
나는 뒷짐을 진 채 말했다.
“현왕 폐하께서 곧 오신다고 했지요. 그 분을 뵙는 자리에서 마음에 둔 여인들이 있다고 말씀하세요.
이야기를 곁들이세요. 나투아 혼혈 병사 중 한 명이 세자 전하의 목숨을 구했다는 식으로요. 그리고 알실라 권력자의 딸…보다는 화포 개발과 관련된 장인들 중 나이대가 걸맞은 여인이 있다면 추려서, 그 여인이 황금성 공략에도 항포성 탈환에도 도움을 줬다고 말씀하시고.
마지막으로는, 제가 별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참 천생연분이더라 이런 말로 마무리를 하지요.”
“그대로 하면 기군망상일 테니 부왕께는 사전에 양해를 구해야겠군요….”
“하나를 말씀하시면 둘을 아시는 세자 전하. 실로 성군이 되시겠네요.”
세자는 대답 대신 넌더리를 냈다.
나와 세자가 그렇게 세세한 조정을 이어가던 차였다.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공주 전하…!”
“세자 전하께서 계시는 곳입니다…! 이렇게 다짜고짜 들어가시면…!”
소란이 점점 가까워졌다. 가까워진 소음을 깨뜨리며 발걸음 소리가 퍼졌다. 저벅, 저벅. 이어서 덜커덩, 두드리는 소리도 없이 곧바로 문이 열렸다.
그리고 비은공주가 문지방을 턱 밟고 모습을 드러냈다.
“꼬맹이랑 오라방. 뭐 그리 열심히 일해요?”
“….”
뭐, 비은공주일 수밖에 없었다.
“공주 전하, 성소년 공자에 대한 호칭은 그렇다 쳐도 세자 전하께 오라방이라니….”
“무례를 넘어 불경한 일입니다…! 조금 더 세자 전하께 경외하는 마음을 품으셔야…!”
아랫사람들이 달라붙어 아우성쳤지만 비은공주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씨익, 고슴도치를 닮은 미소를 짓더니 돼지고기가 담긴 접시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적당히 하고 좀 쉬죠? 한 잔 해요 같이.”
나와 세자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세자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자꾸나.”
◈ ◈ ◈
나와 세자가 일하는 와중에 비은공주는 상자 안에서 사육 당하는 고슴도치 같은 생활을 보냈다. 편할 때 일어나 원하는 걸 먹고 적당한 곳에서 자는 걸 반복하는 생활 말이다.
그녀는 그 고슴도치 생활을 우리들에게도 전파하려 했다.
“둘 다 눈 아래가 아주 시커멓네요. 무슨 반점 돌고래인 줄. 이것 좀 먹어요. 겁나 맛있는데.”
비은공주가 내게 돼지 뒷다리를 내밀었다.
나는 감사히 받아 한 입 뜯어먹었다.
“공주 전하께서는 긴장 안 되십니까? 곧 부왕께서 방문하시는데.”
“별로요? 좀 늙었겠다 싶기는 하네요. 안 본지가 좀 오래 되어서. 본인은 주로 바다에서 놀다 보니까 입조할 일도 별로 없었거든요.”
아랫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만큼 그들이 이 무엄한 발언에 몸을 뒤트는 일은 없었다.
성은대군은 몸 대신 고개만 뒤틀었다.
“정말이지 너는 한결 같구나….”
“이래봬도 조금은 어른이 됐지만요? 하긴 대하의 물을 받아 마셨다고 바다가 엄청 커지진 않을 테니까 알아보지 못해도 별 수 없지만요. 그리고 꼬맹이. 그거 준 거 아니니까 한 입 먹었으면 다시 내놓으세요.”
나는 돼지 뒷다리를 돌려주었다. 비은공주는 한 입 크게 뜯어먹고는 탁자에 턱 걸터앉았다.
물끄러미 나와 세자를 번갈아 보던 그녀가 꿀꺽, 고기를 집어삼켰다.
“해서, 뭘 그리 열심히 하던 중이었나요?”
세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본래대로라면 적당히 얼버무려야 할 질문일 것이다. 은월의 눈동자를 갖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비은공주는 세자의 정적이 될 만했다. 하물며 그녀는 검은 열도 원정 가주의 목을 친다는 업적까지 세웠다….
“세자 전하의 결혼과 인재 등용문의 확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비은공주를 알았으니까.
과연 비은공주는 내가 아는 그녀답게 반응했다. 뿔난 고슴도치처럼 혀를 찬 것이다.
“본인 빼고 다 결혼하고 앉았군요. 뭐 좋아요. 새 언니 후보가 누군데요? 역시 상현공?”
“아니요, 실은….”
사정 설명을 들은 비은공주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아하하하하! 아, 아아. 그래요. 흐응. 나투아 서얼은 이해가 되지만, 어, 알실라 여인이랑? 궁합이 맞을까요, 그게? 우리 오라방 체격이 초대 법왕처럼 가냘픈 것도 아닌데!”
성은대군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필요한 일이다. 특히 장차의 정세를 고려하면 알실라 측이 더 중요하다. 검은 열도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수군을 강화해야 하는데….”
“아아- 그건 이해하지만요. 흠. 그 화포인지 뭔지, 배에다가 실으면 끝내줄 것 같고.”
“그래. 원기윤 수군통제사가 말아먹은 수군 전력을 보완하고도 남겠지. 다만 배에 싣기 위해서는 연구를 좀 더 진행시켜야 한다. 지금 만들어진 화약들은 바다에 나가면 금세 해풍에 절어 못쓰게 된다더구나.”
이것이 알실라 측을 배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기술들이 하나같이 절묘하게 미완성 상태인 것이다. 특히 지금 당장 바다에서 화포를 쏴재낄 수 없다는 것은 커다란 오산이었다.
‘비은공주 말마따나 화포 하면 배인데. 화약이란 건 확실히 습기에 약하지. 바닷바람은 습기 그 자체고… 어라? 그러고 보면 진짜 내가 살던 시기에는 배 위에서 화포를 어떻게 쏜 거지?’
화약에 뭐 송진 같은 걸 끼얹나? 알 수 없었다. 기술자들이 알아서 해답을 내놓길 바라는 수밖에.
비은공주도 기술자는 아니었다. 냠, 고기를 한 입 더 뜯어낸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요? 아쉽네. 흠. 제가 뭐 할 만한 일들은 있을까요?”
당연히 있다.
“사략 함대들을 통제하면서 당분간 동해에 머물러 주시면 좋겠어요. 서군후가 가진 사병들도, 제함도 후작군도 모두 모아 지원해 드리도록 할게요.”
“그 밖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주려무나. 폐하께 상주드려서 최대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써보마.”
나와 세자가 차례대로 꺼낸 말에 비은공주는 입 안의 고기를 삼켰다. 은빛 눈동자 속에 감돌던 골똘한 기운이 목소리에 실려 바깥으로 나왔다.
“필요한 건 아닌데 바라는 건 있어요.”
“어떤 것이냐?”
“결혼이요.”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나도 세자도 잠시 말을 멎었다. 비은공주가 피식 웃었다.
“뭐예요 다들? 본인이 뭔가 물개 울음소리라도 냈다는 표정이네요.”
“어… 조금 의외여서요. 공주 전하, 염두에 둔 상대라도 있으신가요? 파도를 가르며 사략선장 노릇을 하는 동안 좋은 남자라도 발견하셨다든지….”
“뭐야 그거. 겁나 낭만적이네요. 꼬맹이 생각에는 본인의 인생에 그런 게 있을 것 같나요?”
“아니요, 그다지….”
“네, 없어요. 그냥 뭐랄까… 유리아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 하나하나 짝 만나는 꼬라지를 보니까 본인만 홀몸인 게 열이 받아서요. 빌어먹을 정치적 사정.”
너무나도 비은공주다운 소리였다.
여동생의 몽니에 성은대군이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비은아. 알잖느냐. 나와 네가 동시에 은월의 피를 갖기라도 하면 왕국의 다음 세대가 대단한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후웅. 오라방은 자신이 은월의 피를 남길 수 있다는 걸 자신하는 모양이네요? 운이 썩 좋지도 않은 주제에.”
“나는 남자다. 시행 횟수를 늘려서 확률을 돌파할 수 있지. 두 명의 비로 모자라다면 후궁들을 총동원해서라도 어떻게든 은월의 피를 잇는 아이를 만들어낼 거란다.”
“아, 재수없다….”
“미안하구나, 동생아. 진실이란 원래 그렇게 느껴지는 법이야.”
비은공주는 쯧 소리를 냈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뭐, 그래요…. 어렵겠죠. 본인도 별로 진지하게 한 말은 아니었어요.”
“알아주어 고맙구나. 거듭 미안하다.”
“아뇨 별로. 생각해보니 적성에도 안 맞을 것 같고. 흠. 아무튼 흰소리는 접어두고, 결혼 말고 다른 거면… 그렇네요. 항포성이랑 부악을 저한테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