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비은공주와 성은대군 (2)
성채란 그 자체로 권력의 상징이다. 그리고 권력은 대항하는 자들의 피를 빨아 꽃을 피우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모든 성에는 감옥이 존재한다. 황금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국이 황금성을 점령한 지금, 황금성의 권력자들은 한때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적들을 가두던 그 감옥에 갇혀 있었다.
성은대군이 말했다.
“그대들의 병기… 화포라고 했던가요. 그것이 필요합니다.”
철창 너머에서 알실라의 최고 권력자가 이죽거렸다.
“상황이 거지같이 돌아가나 보지?”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대들이 불러들인 재앙의 뒤처리를 하고 있거든요.”
“허. 그거 잘 됐군. 열도 놈들이 조금만 빨리 왔다면 바랄 나위가 없었을 텐데 말이야.”
그런 이죽거림을 성은대군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온화한 성품으로 유명했던 초대 법왕이라 해도 자신들을 멸망시킨 원흉을 앞에 둔다면 평온함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성은대군이 말했다.
“방금 스스로 말한 것처럼 당신들은 졌습니다. 이제 와서 열도인들이 날뛰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이 황금성을 점령하고 그대들을 풀어주는 것을 기대하진 않을 것 아닙니까.”
“왜? 기대는 해볼 수 있지. 그리고 적어도 네놈들이 고통 받는 꼬라지는 구경할 수 있을 것 아니냐?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지 않겠나?”
“별다른 가치는 없을 겁니다. 어차피 우리는 화포를 어떻게 쓰는지 알아낼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 그리고 너희는 되도록 빨리 필요할 테고 말야.”
성은대군은 팔짱을 끼었다. 그 말대로였다. 화포를 항포성 앞까지 끌어갈 수 있다면 항포성을 공략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소년 휘파랑은 그 화포를 남강 배에 올려 바다로 옮겨서 해상전함 위에 실을 수 있다면 왕국의 해상전력을 극적으로 강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말했었다. 어처구니없이 해상 전력 상당수를 잃은 지금, 열도의 대규모 원정군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반도의 일입니다.”
성은대군이 팔짱을 풀었다.
“왕국, 나투아, 알실라… 세 나라가 반도에서 국경을 맞댄 채 지내오지 않았습니까. 대륙을 끌어들인 나투아도 그렇고, 열도를 끌어들인 알실라도 그렇고. 외세의 힘을 빌리는 걸 꺼리지 않을 만큼 우리가 위험해 보였습니까.”
단순히 생각할 시간을 벌고자 꺼낸 말이었다. 국가 관계에서 개인 감정이 무의미하다는 걸 넘어서, 아무리 선량한 나라에 병합되는 것이라도 병합당한 나라의 지도층은 그 권력을 잃게 된다. 상현공을 스승으로 둔 성은대군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악마와 손잡는 것도 꺼리지 않는 것이 권력자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이 말이 핵심에 닿아있었던 듯했다. 알실라의 최고 권력자는 눈을 부라렸다.
“당연하지.”
단호한 어조였다.
“우리 모두 네놈들이 나투아 영토에서 어떤 패악을 부렸는지 잘 안다. 경문산성을 어떻게 뚫을 수 있었는지도 들었지. 뭐? 반도의 일은 반도 사람들끼리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거꾸로 생각해 봐라. 우리가 오죽했으면 검은 열도의 검둥이들을 끌어들였겠느냐?”
성은대군은 쓴웃음을 지었다.
과거에 행한 일들은 현재를 판단하고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소재가 된다. 시왕으로부터 이어진 왕국의 100년은 늘 패자들에게 가혹한 것이었고, 왕국은 늘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성은대군은 생각했다. ‘잘 말씀하셨군요.’ 그리고 말하는 것이다. ‘불응하신다면 알실라인들의 처우는 한층 더 가혹해질 겁니다. 감정에 치우치지 마십시오. 이미 나라와 신민을 지키는데 실패한 만큼,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을 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분명 효과가 있을 터였다. 아니면 비꼴까? ‘그렇게 경계하신 것도 무색하게 부악의 유지들은 우리 왕국을 선택했더군요. 참으로 민망하셨겠습니다….’
그러지 않기로 했다. 성은대군이 말했다.
“편지를 한 통 썼습니다.”
알실라의 최고 권력자는 고개를 들었다. 성은대군은 자리에 앉아 그와 눈을 마주쳤다.
“흩어진 수군들을 용서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성정에 맞는 일이었지요.”
자신의 생각에 맞는 일이기도 했다.
- 그들이 패주한 것은 원기윤 수군통제사의 잘못이지요. 원기윤을 책하면 될 일이지, 무능한 상관을 둔 수하들을 책한다는 건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 될 터입니다.
그러기에 성소년 휘파랑이 부악으로 떠나가기 전, 성은대군은 그렇게 말했더랬다. 휘파랑 또한 편지를 쓰는데 머리를 빌려주었던 만큼 동의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과연 휘파랑은 동의했다.
- 올바르신 말씀이에요, 세자 전하. 전하께서는 아래보다 그 아래가 그리 된 이유를 먼저 따지시지요.
하지만 전적인 동의는 아니었다.
- 그런데 그 올바른 말씀을 전하의 스승인 상현공이 들었더라면 역정을 냈을 거예요. 어떤 부분에서 역정을 냈을지 짐작이 가시나요?
- …스승님께서는, ‘그렇게 수하들의 책임이 아니라 순전히 원기윤의 잘못이라 말한다면, 같은 이치로 원기윤을 수군통제사 자리에 둔 나를, 그리고 폐하를 탓하게 되겠군.’ 하고 말씀하셨겠지요.
- 예. 알고도 원기윤을 그런 요직에 두었다면 적극적으로 나라에 해악을 끼친 셈이고, 모르고 그랬다면 사람을 알아보는 눈도 없이 무능하다는 것이니까요.
별의 목소리를 듣는 소년은 뒷짐을 진 채 미소를 지었다. 테두리가 뚜렷하지 않은 미소.
- 이렇게 명확한 사건조차 전하께서 가진 정의에 맞추려면 참으로 복잡하고 번거로워져요. 올바른 일을 한다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고, 지옥을 걸어야 한다는 각오를 다져야만 하지요. 도중에 무릎을 꿇으면 처음부터 하지 않느니만 못하게 되고요.
- …결국 지배자가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이란, 적당히 공정하고 적당히 정의로운 정도라는 겁니까?
휘파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성은대군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 …어찌 되었든 두 분 또한 책임을 지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쨌든 원기윤 수군통제사에게 책임을 물려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겠습니까?
성은대군의 말에 휘파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상현공은 물론 자신에게 피해가 튈 것을 염려하여 전하를 그리 타박하겠지요. 하지만 동시에, 전하께서 장차 법통을 이었을 때를 염두에 두어 말하는 것일 터예요.
휘파랑은 해설했다.
- 세자 전하께서는 폐하가 아니시지요. 나라 일에 손대고 계시지만 그 한계가 뚜렷해요. 차갑게 말하면 그냥 그것들만 책임지면 되는 만큼 마음 편하게 상현공이나 폐하를 탓할 수 있는 셈이죠.
- …예, 그렇습니다.
- 그런데 시간이 흘러 전하께서 폐하가 되신다 생각해보세요.
성은대군은 생각해보았다.
- 폐하께서는 이 나라 모든 것의 위에 자리 잡게 되어요. 그 일거수일투족이 나라 전체에 미치지요. 마땅히 그 책임 또한 이 나라 전체에 이르게 되고요. 만약 그때 나라의 관료 중 한 명이 억울한 이를 만들어낸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 관료에게 책임을 물리고, 관료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한 이에게 책임을 물리며, 같은 이치로 저 또한 상응의 책임을 질 것입니다.
- 여기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지요.
성은대군은 생각해보았다.
- 구체적으로 어떤 책임을 질 것이냐 말이군요.
- 첫 번째 문제예요.
- 그런 책임을 진 자가 어떤 명목으로, 무슨 면목으로 누군가를 다스리겠느냐 말이군요.
- 두 번째 문제고요.
- 세 번째 문제도 있습니까?
- 한 번은 어찌어찌 책임질 수 있겠지요. 어쩌면 열 번도. 그 모든 일화들은 먼 훗날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던 이상적인 군주’ 라는 식의 미담으로 전해질 테고요. 하지만 백 번을 그러실 수 있나요?
- ….
- 천 번은? 만 번은요?
휘파랑은 웃었다.
- 십만 번이라도 그러실 수 있다고, 그래야 하는 것이라고 답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전하께서는 상냥하고 올곧은 분이니까요. 말만 번드르르한 위선자들과 달리 실제로 그 말을 지키실 수도 있을 테지요.
성은대군은 마땅히 그럴 것이라고 답하려 했다. 통치하는 자는 자신이 다스리는 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해도, 통치만 누리고 책임을 피하는 것은 위에 서는 자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비열한 일이다….
- 하지만 그런 전하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어떤 기분일까요?
휘파랑은 손에 든 편지를 접어 보였다.
- 전하께서는 공주님 이야기를 들으면 복잡한 표정을 지으시지요. 그건 혈연으로서 공주님께서 위험한 일을 하고 계신다는데 염려를 느끼시기 때문일 거예요. 고귀한 혈통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정리하려 해도, 그렇게 안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까요.
- …스승님께서 저를 염려하시기에 그런 말씀들을 하신다는 겁니까?
- 말했듯 자신의 권력을 위한 것도 있겠지만요.
성은대군은 입을 다물었다.
- 열도인들을 몰아낸다면, 이제 저도 임무 달성… 아니. 삼국 통일 이후의 세계가 시작되겠지요.
휘파랑은 편지를 품에 쟁여 넣으면서 말을 이었다.
- 그리고 그 곳은 이 시대에 있는 누구도 가 본 적이 없는 세계일 거예요.
- …공자는 마치 가본 적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 그럴 리가요. 미래에서 온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러겠어요?
휘파랑은 소리내어 웃고는 성은대군을 바라보았다.
- 저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럴 거예요. 자연히 많은 이들이 그보다 더 많은 실수를 저지르겠지요.
- ….
- 전하께서는 제게 도와 달라 말씀하셨지요.
- …그러했습니다.
- 자신이 부족하다 여기셨기 때문에.
- 그러했습니다.
- 그런 일이 반복될 거예요. 스스로 세운 정의를 능력의 한계로 인해 관철하지 못하는 일들. 그때마다 자책하게 되실 테지요. 권력자로서 자기연민에 빠질 수 없을 테니 모든 고통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을 테고요. 그런 모습은 주변 사람들을 아프게 할 거예요.
휘파랑은 발끝으로 바닥을 두드려 신발을 깊이 신으며 말을 맺었다.
- 조금 더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세요. 그럴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이들에게도 너그러워질 수 있는 법이니까요.
성은대군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황금성의 감옥, 철창 너머에 있는 알실라의 최고 권력자를 향해 말했다.
“이 알실라 땅에 화염의 재액이 덮쳤을 적에, 왕국의 수도도 또한 피해를 겪었었지요.”
알실라의 최고 권력자는 성은대군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했다. 초대 법왕과 두 아내, 그 수행원들에 관련된 이야기.
“세 나라 사람들은 힘을 합쳐 재앙에 맞섰습니다. 그 기저에는 물론 정치적인 손득이 있었고, 국제 정세에 대한 이해가 있었겠습니다만, 어쨌든 그러한 일이 과거에는 가능했던 것입니다.”
“너희 초대 법왕이 특별했던 거지.”
“예.”
긍정하고, 성은대군은 말을 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특별한 사람이 하나 있으면 그러한 일이 가능해진다는 겁니다.”
“….”
“저는 그렇게 특별한 사람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장차 법통을 잇는다고 해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은 부족한 채 남겠지요. 계속해서 실수하고 헤맬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는 지금 제게 한계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한계선이 어디쯤 위치해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하 감옥 어딘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횃불이 흔들리고 그림자도 뒤따라 이지러졌다.
성은대군의 목소리만이 담담하게 이어졌다.
“저는 그런 특별한 사람을 목표할 것입니다.”
“….”
“그리고 그것은 제 외로운 고집이 아닙니다. 가령 작금의 제함후… 제게 여러 말을 해준 공자의 어머님도 나투아의 성지였던 제함도를 훌륭히 다스려내었지요. 그런 제함후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이 많습니다. 다른 이들도.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이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건, 선대의 방식에 반발해서건, 주변인들의 눈치를 살펴서건 조금씩 나아질 겁니다.”
성은대군은 차분하게 말했다.
“시왕께서는 개천식 당시 너희 모두가 우리의 백성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지요. 영토가 하나 된다 하여 사람이 하나 되진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리고 저는, 저와 힘을 함께 하는 이들은 그 과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알실라의 최고 권력자는 이를 드러냈다.
“그래서? 그런 빛나는 미래에 도움이 되게끔 한 손 보태 달라 이거냐?”
“예.”
알실라의 최고 권력자는 조금 당황했다. 이렇게까지 당당하게 긍정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탓이다.
성은대군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패배했습니다. 이미 나라와 신민을 지키는데 실패한 만큼,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을 해주십시오.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알실라의 최고 권력자는 잇소리를 냈다. 오래는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어깨를 떨구었다.
반나절 뒤, 성은대군은 화포를 실은 마차와 함께 항포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정 안구 보호대를 찬 알실라 명장과 그 보조원들이 그와 함께 했다.
곁에서 상현공 루지아가 팔짱을 끼었다.
“흠. 그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녀석을 잘도 설득해냈군. 고문이라도 했나?”
성은대군은 미소를 지었다.
“스승님.”
“음?”
“스승님과는 장차 부딪힐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루지아는 눈을 깜빡거렸다.
“부딪힐 일이나 있겠나. 원기윤 수군통제사 건으로 골방에 유폐될 걸 걱정해야 할 신세인데. 보게. 날 쫓아다니던 구애자들도 모래 맞은 불처럼 싹 흩어져버리지 않았나.”
“스승님께서 그 정도로 끝날 분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칭찬인지 뭔지 모를 말이로군.”
“정확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루지아는 쯧 소리를 냈다.
“그래. 내가 어찌어찌 기사회생해서 자네와 부딪힌다 치지. 그래서? 그때가 되면 좀 살살 해달라는 말을 하고 싶나?”
“아니요. 그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성은대군의 말에 루지아는 다시금 눈을 깜빡거렸다. 곧 그 입가에 사자의 미소가 걸렸다.
“제자를 신경 쓰는 건 스승으로서 당연한 노릇 아닌가.”
“그렇다고 해도 감사드립니다.”
“흠.”
루지아는 가늘게 뜬 눈으로 쭉 뻗은 길 너머를 바라보았다.
“너무 일러. 나와 정치싸움을 하건, 감사를 하건. 그건 일단 저 열도 놈들을 몰아낸 다음에야 의미를 가질 걸세.”
“예. 일단은 이겨야겠지요.”
성은대군은 동의했다.
세자의 은빛 눈동자에 의지가 서렸다.
“곧 성소년과 약조한 시간입니다. 이 연장전을 마무리 짓고, 하나 된 반도에서 햇살을 맞이하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