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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이 나라를 살림-199화 (199/261)

199. 비은공주와 성은대군 (1)

시아람 경이 대신 대답한 이유가 꼭 팔불출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우웨에에에….”

죽겠다!

정말이지 죽겠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어이구. 섬의 도련님이 배 멀미나 하고 앉아 있으면 안 되죠!”

시아람 경과 비은공주가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덕분에 속이 가라앉긴 개뿔, 더 심해졌다. 시아람은 곧바로 손을 떼었지만 비은공주는 신이 나서 내 등짝까지 3-3-7 박자로 두드려댔다. 자연히 배 멀미 강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미치겠네 네, 진짜.’

시현군 때 강 배를 좀 탔을 때나, 휘영이 때 바다 배를 오지게 타봤을 때는 멀쩡했는데 지금은 그냥 뒈질 것 같다.

‘이 몸 전체적으로 저항력 너무 낮은 거 아냐!? 말 탈 때도 그렇고!’

아직 어려서 그런가? 하지만 유미의 몸이 건강 그 자체였다는 걸 감안하면 그냥 이 몸의 육체가 저질인 것 같다. 하긴 휘영이도 건강한 편은 아니었는데, 거기에 육지 토박이 출신 핏줄이 더해져 탄생한 게 휘파랑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으… 괜찮아. 괜찮습니다, 공주 전하.”

내가 입술을 닦으며 말하자니 비은공주가 히죽 웃었다.

“공주 전하라니 정 없네요. 어릴 때처럼 누나야 하고 부르세요! 아니면 이모라고 불러도 괜찮답니다?”

죽어도 싫다. 이미 죽은 몸이지만 아무튼.

“지금부터… 잘 움직여야 합니다….”

나는 퀭한 얼굴로 바르작거렸다. 아직 등짝을 두드리고 있는 비은공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열도인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겠는데 모든 경우를 대비해 둔다고 치면… 1 항포성에 틀어박혀 농성하며 열도로부터의 원정군을 기다린다…. 이 경우엔 그냥 내버려두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육지의 항포성 포위망을 강화하고 흩어진 왕국 해군들을 규합하면 되니까요….”

사실상 가장 바람직한 상황인 셈이다.

“문제는 2 모든 함선을 끌고 나와 귀환을 시도한다, 인데….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래도 전장에서 절대적인 건 없으니까 예상해 보자면… 서군후의 군세에 제함도 해상 전력이 합세한 상태니까 해볼 만할 겁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해볼 만하다는 거지, 패전하면 장차 반도의 해상 방위력은 절망적인 수준으로 떨어지겠습니다만….”

이 시기의 동해는 해무가 짙었다. 육지는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아스라이 보였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닿을 수 없는 이상향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아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저쪽에서도 몇 시간이면 올 수 있을 것이고.

“붙을 것인가, 퇴각할 것인가. 붙은 뒤 퇴각할 경우 피해는 얼마나 줄일 것인가. 해맞이곶에서 합류하지 못하게 될 경우 어디서 만날 것인가… 그런 부분은 현장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겠습니다.”

“현장의 판단이라시면 서군후께 맡기시겠다는?”

시아람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서군후 휘하로 일원화하면 체계는 간편해지겠지만 제함도 측에서 온 녀석들의 반발이 클 거다.

‘무엇보다 서군후의 전술적 역량이 좀 의문이기도 하고.’

부악의 유력자들을 매수하여 부악을 점령했다는 사실은 서군후 세오의 전략적 역량을 입증한다. 하지만 그런 판을 짜는 능력과 배를 갖고 직접 싸우는 능력은 같지 않다. 세오가 삽질할 경우를 대비해 안전책을 마련해두는 게 좋을 터였다.

“제함도 군세는 시아람 경 너한테 맡길 거야. 근데 이대로는 니가 ‘끕’이 안 되니까… 잠깐만 기다려봐.”

나는 붓과 먹, 종이를 준비하게 시키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멀미 때문에 죽을 것 같았지만 꾹 참고서 문장을 써내려갔다.

비은공주가 한 쪽 눈을 크게 떴다.

“헤에, 글씨 잘 쓰네요, 우리 꼬맹이?”

“이렇게 보여도 제함도의 공자니까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는 완성한 문서를 시아람에게 넘겼다.

“대충 제함도의 공자로서 어쩌고저쩌고. 별의 목소리를 듣는 성소년으로서 이러쿵저러쿵. 네 권위를 보증한다는 말을 길게 늘여 놓은 거야. 나랑 공주 전하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네 권위 지켜줄 테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잘… 우웨에에에.”

“도련님!”

시아람이 당혹하여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아, 좀, 그만하라고. 오히려 멀미만 심해진다고….

미치겠네 진짜.

“아무튼 나는 이만 공주 전하랑 같이 간다…. 잘 하고. 말아먹지 말고. 좀 잘 하자. 응? 제발 좀 잘 하자 우리 왕국아….”

“자, 잘 하겠습니다, 도련님. 제가 왕국을 대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말이 한 마디씩 많냐 왜…. 아무튼 잘 해라. 그럼 공주 전하, 가시죠…. 찾아라 왕국 해군~ 세상에서 가장 긴장감 넘치는 비밀~ 을 시전할 시간입니다….”

“우리 꼬맹이 제 정신이 아니네요. 왜 멀미에 ‘취한다’는 말을 쓰는지 잘 알 것 같아요.”

그런 공주 전하의 부축을 받아 나는 비은공주가 이끄는 사략함대의 기함으로 넘어갔다.

◈          ◈          ◈

기함의 이름은 붉은 공주 13호였다. 왜 배 이름이 이런가 싶었는데, 어머니 사호와 이모 구호를 더해 13호라는 모양이다.

‘대체 누가 제 정신이 아니라는 건지 원.’

“공주 전하, 어서 오십시오!”

“붉은 공주 13호, 준비 끝났습니다!”

배의 이름처럼 옷을 붉게 물들인 선원들이 경례를 붙여왔다. 주홍 나무로 만들어진 돛대도, 거기 매달린 돛 역시 붉었다.

‘아니, 붉다기보다는 거무죽죽한데다가 표면이 거칠거칠한 게 꼭….’

“적들의 피로 물들였답니다!”

엣헴! 하고 뻐기는 얼굴로 비은공주가 말했다. 15년이라는 긴 세월도 그녀와 닿지 않도록 조심조심 비껴서 지나간 듯했다….

“예…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공주 전하, 그냥 묻는 건데 그런 말씀과 이런 환경,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을 제 정서 함양에 별 도움이 안 되지 않을는지요…?”

“무슨 말인가요? 꼬맹이가 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팔할은 제 정서 교육 덕분 아닌가요?”

말을 말자.

“그보다 유리아 경은 안 보이는군요.”

“그 녀석 결혼 휴가 받았거든요. 울 꼬맹이는 출진해 있어서 잘 몰랐겠네요.”

결혼?

“대체 누구와….”

“제함도 영지기사 중 한 명. 그 왜, 제정신 호 모는 사람이요.”

“의외군요…. 유리아 경은 왕도 사람과 결혼할 줄 알았는데.”

“그쵸? 저도 의외라고 생각했어요. 출세욕으로 가득하던 사람이 제함도의 시골 기사와 결혼하다니? 낭만인지 자포자기인지, 그냥 더 이상 제 기저귀 갈아주기 싫었던 건지.”

비은공주는 푸념 반 불만 반으로 투덜거렸다. 나는 그 얼굴 한 구석에서 휘영 시절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감정을 찾아냈다.

“외로우십니까?”

비은공주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씨익 웃었다.

“으흠, 조금은요? 그래도 제가 꼬맹이 나이 무렵부터 붙어 지냈던 양반인데 혼자 쑥 내빼 버리고. 뭐랄까, 놀이 상대가 줄어든 느낌? 이런 말 하면 또 흑구질이 놀이냐 뭐냐 하는 소리 나오겠지만요.”

그 미소에는 자조가 섞여 있었다. 아무래도 모든 세월이 그녀를 비껴가진 않은 듯했다.

“전하께서도 언젠가 마음이 맞는 상대가 생기실 겁니다.”

“언제일까요 그게. 저 죽고 난 다음이면 너무 늦은데.”

별로 늦는 건 아니라고 말해주진 않았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인 데다가,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 위해서는 나부터 임무를 달성해야 했다.

그렇다. 임무다.

나는 이마를 짚은 채 붉은 공주 13호의 갑판 위를 걸었다.

“자, 그럼 공주 전하…. 흩어진 왕국 해군들을 찾으러 가야 합니다.”

비은공주는 볼을 긁적였다.

“흠. 아까 대충 이야기 들어서 그건 알고 있지만요.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배가 무슨 발자국을 남기는 것도 아니고, 기윤이가 삽질한 게 벌써 며칠 전이잖아요. 배라는 건 그만한 시간과 해류와 바람이 주어지면 정말 세상 끝까지라도 떠내려갈 수 있다구요?”

“저도 압니다. 그건 제게 방도가 있으니 제가 가리킨 방향으로 배를 몰아주십시오.”

비은공주는 입술을 쭉 내밀었다. 오래는 아니었다. 그녀는 곧 손가락을 튕기며 선원들에게 지시했다.

“하긴 그 짙은 바다 안개 속에서도 족집게마냥 쬐끄만 탐망선을 잡아냈죠. 별의 목소리도 듣는다 그랬고. 좋아요, 우리 꼬맹이가 위치를 안다 치고… 그럼 문제되는 건 그 왕국 해군을 발견한 다음 일이겠는데.”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생각하던 것이었다.

“그 녀석들이 순순히 합류해 줄지 걱정된다는 말씀이시군요.”

비은공주는 뒷짐을 진 채 발끝으로 갑판 위를 톡톡 두드렸다. 왕가의 피를 받아 나이 서른에 다다른 그녀는 내 빙의체 휘파랑보다 키가 컸고, 그래서 그녀는 나를 편히 내려다볼 수 있었다.

“네. 흩어진 왕국 해군이라고 말하면 듣기에는 좋지만, 그 녀석들 요컨대 패잔병이잖아요? 압도적 병력 우세를 갖고도 그런 삽질을 하고 적전 도주까지 거하게 한 사발 한 잡것들이라 이 말이죠.

그런데 그런 녀석들이, ‘오! 왕국은 그대들이 필요하다! 돌아오라 왕국의 아이들이여! 돌아오라 나의 품에!’ 이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눈물 질질 짜며 돌아올까요? 내가 걔네 입장이었으면 그냥 쌩까고 돛에 새겨진 인장 바꿔친 다음 흑구가 되어 산뜻한 인생 재출발할 것 같은데 말이에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빨리 합류해야지요. 시일이 길어질수록 그렇게 야생화되는 전함들이 늘어날 테니까요.”

“우웅. 나는 이미 야생화된 거 아니냐는 질문을 한 거지만요.”

“거기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세자 전하의 편지를 들고 공주 전하를 찾아뵈었던 것이라고 답하겠습니다.”

비은공주는 팔짱을 끼었다. 삐딱하니 고개를 기울여 특유의 불량한 고슴도치 자세를 취한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저한테 뭔가 연설이라도 하라는 건가요?”

나는 그 은월의 눈동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 말하는 건 그닥 자신 없는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랑 세자 전하가 머리 맞대고 써놓은 게 있으니까요.”

비은공주는 이해했다.

“그러니까, 꼬맹이가 건네준 오라방 편지를 읽기만 하면 된다 이거죠. 좋아요. 건네주세요.”

나는 편지를 건넸다. 비은공주는 그 편지를 받았고, 읽었으며, 히죽 웃어보였다.

◈          ◈          ◈

저는 성은대군입니다.

부족하나마 달의 여신께 뜻을 이어받아 세자로 지명되었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늘 있는 일입니다. 한 번의 승리에 오만하면 대국을 그르치듯, 한 번의 패배에 낙심하면 전국을 놓칩니다.

저는 그대들에게 재집결을 명령하는 바입니다.

왕국의 전함을 지휘하던 이들이여.

그대들은 문책이 두려워서 달아나 숨었습니까? 그대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문책이 아니라 이 다음의 인생일 것입니다.

당장이야 숨어들 곳이 있다 한들, 도망친 그곳에 왕국이 있겠습니까? 왕국이 아닌 곳으로 도망치려 해도 병졸들을 설득해야 할 터인데, 왕국민도 아니며 지휘관도 아닌 그대를 군병들이 따를 이유가 있겠습니까.

지금은 두려움이 그대들을 하나로 묶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 지나간 일에 대한 두려움이 다가오는 내일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전쟁은 계속될 것이며, 군량은 떨어질 것이고, 문책에 대한 두려움은 얼마 가지 않아 그대에 대한 분노로 바뀔 것입니다.

저는 그대들에게 재집결을 명령하는 바입니다.

집결지에 나타나는 지휘관과 군병에겐 지난날의 패전에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을 것임을, 저 성은대군이 세자의 직위를 걸고 보증하겠습니다.

저는 제 여동생에게 이와 같은 이야기를 전하도록 했습니다. 제 여동생의 목소리는 능히 바다 안개를 헤치고 퍼져 나갈 것입니다. 설령 그대가 군병들을 속이고 당장의 소환을 무시한다 해도, 언젠가 병사들의 귀에는 내 포고문이 흘러들 것입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패배했을 때 병졸을 추스르지 못하는 자에겐 다음 기회마저 없습니다. 저는 그대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내리니, 그대가 왕국민으로 남으려는 이상, 부디 이것이 마지막 명령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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