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남전후, 아신군 (2)
인솔 역이 된 알실라 기병 30기. 그 뒤를 쫄래쫄래 쫓아온 보병 1천. 탁 트인 평야. 저 멀리서 일어나는 흙먼지.
상황 파악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폭풍 언덕이 노성을 터뜨렸다.
“나를 함정에 빠뜨렸구나! 이 명예도 모르는 자식!”
한마루는 이를 드러냈다.
“함정이라니? 니들이 정겹게 부둥부둥 하는 집 안에 밀어 넣은 것뿐이다.”
“너희 조국을 구하러 온 우리에게 이럴 수 있느냐? 이 애비 애미도 몰라보는 호로자식 같으니라고!”
“까고 있네. 내 조국은 왕국이다. 조그맣고 알실라 말 하면 다 알실라인이냐 이 잡놈아?”
“알실라인이 아니었다고!? 그럼 그 갑옷이며 마갑은 어떻게 된 거냐!”
“노획품이다, 이 새끼야.”
폭풍 언덕은 이를 갈았다. 노획품이라고? 그렇다면 황금성은 이미 떨어진 건가? 아니면 황금성이 아니라 다른 곳에 기병이 있었던 건가? 하지만 황금성에 꽁꽁 숨겨둔 비밀 전력이 아니라면 알실라에 기병이 있다는 걸 자신도 알지 않았을까?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정보가 부족했다. 폭풍 언덕은 본디 대장 역할이던 하얀 늑대 13세를 좀 더 살려 두었어야 했다고 자책했지만, 곧 지워 없앴다. 어차피 그 놈도 아는 게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자신이 죽인 게 아니라 붉은 깃발 가문의 무사장이 죽인 것 아닌가.
그리고 그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한마루라는 놈이 이죽거렸던 것이다.
“하긴 우리도 시꺼먼 놈들은 다 열도놈들이라고 생각한다만.”
폭풍 언덕은 불같이 노했다.
“이 짜리몽땅한 난쟁이 자식이 피부색을 갖고 사람을 놀려? 우리들의 검은 피부는 열도인들이 영원한 평야의 주인이신 천주대신께 선택받았다는 증거다! 너희 같은 열등한 놈들은 모르겠지만!”
“…넌 방금 니가 한 말이 뭐가 이상한지도 모르지?”
“네 놈 하나만큼은 영원한 평야로 데려가고 말겠다! 뭣들 하느냐! 다들 처리해라!”
폭풍 언덕이 노호하며 달려들었다.
한마루는 도망치지 않았다. 폭풍 언덕도 말을 타고 있다. 무거운 마갑을 채운 조랑말로는 어차피 달아나지 못할 것이었다.
‘무엇보다 사절이니 간자니 하는 건 원래 죽음을 각오하고 맡는 거지.’
한마루가 외쳤다.
“달의 여신을 위하여!”
그 외침은 곧 한마루와 함께 온 30명 분량의 목청으로 증폭되었다.
그들은 그들이 기리는 별자리의 주인을 외쳤다.
“하누리이이이!!”
거의 100여 년 전에, 법왕의 아내 중 한 명이었던 하누리와 함께 왕국에 발 딛은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있었다. 다시 그 후손들 중에 서로 혼인을 맺거나, 이따금 알실라 측에서 왕국으로 넘어온 이들과 결혼하는 식으로 알실라의 피를 보존했던 이들이 있었다.
‘하누리의 후예들’은 용맹하게 싸웠다. 그들의 머릿속에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난폭한 토종 왕국민들, 그럼에도 왕왕 있었던 상냥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 다음에는 왕도, 대하의 물길, 만월, 신전에 세워진 하누리의 석상이 스쳐갔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둠에 잠겼다.
“빌어먹을 새끼들.”
폭풍 언덕이 으르렁거렸다. 그가 탄 말의 발굽 아래에는 한마루의 시체가 밟혀 있었다.
부관이 침통하게 말했다.
“명예도 모르는 잡놈들을 해치우느라 시간을 너무 허비했습니다. 원정 가주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하누리의 후예들은 전멸하면서도 그 역할을 다했다. 불과 30기의 조그만 기병들이 1,000명의 흑열도인들을 붙들어 놓은 것이다. 왕국의 기병들이 육안으로 보이는 지금, 흑열도인들은 그들을 맞이할 준비도 도망칠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폭풍 언덕은 그 숫자를 가늠했다.
‘대략 300? 아니, 400 가량이군. 이 쪽은 보병 숫자가 1,000 좋아.’
게산을 마친 폭풍 언덕이 외쳤다.
“전열 거창! 버티고 서라! 후열 활 들어! 거리에 들어오는 즉시 사격 개시!”
보병으로 기병을 상대하는 정석 포진이다. 열도에서 폭풍 언덕이 사용하던 전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를 잘못 잡았다.
왕국 기병들 선두에 서서 달려오던 남전후 아신군의 입가에 늑대의 미소가 번졌다.
“머저리 같은 놈들.”
아신군은 달리는 그대로 외쳤다.
“칼 놔! 왕국궁 들어! 산개 후 각개전투 개시!”
남전후를 따르던 왕국 기병들 역시 웃었다. 벌들이 웃음을 지을 줄 안다면 꼭 그들의 옆모습 같았을 것이다.
뭉쳐있던 왕국 기병들은 달리는 그대로 서로와 떨어졌다. 가운데 있던 이들은 외곽으로, 이미 외곽에 있던 이들은 더 외곽으로 흩어졌다. 공간을 널리 벌린 그들은 지시대로 활을 들었다. 창병들이 사격선 끄트머리에 들어오자마자 시위를 튕겼다.
“악!”
“으악!”
타타타타탓! 소리와 함께 전열의 창병들이 고꾸라졌다.
폭풍 언덕이 입을 떡 벌렸다.
“말 위에서 활을!?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이냐!?”
열도에서는 신궁(神弓)이니 말귀신이니 하는 소수의 수재, 또는 특별히 승마술에 특화된 명가의 정예병들이 아니고서야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묘기를 저 많은 기병들이 자유자재로 구사하다니? 그것도 해상전에서는 그렇게 등신 같던 월국 놈들이 말이다. 당혹스러운 걸 넘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에에잇! 쏴! 모두 쏴라!”
폭풍 언덕이 외쳤다. 흑열도인들, 후열에 선 궁병들이 마주 시위를 튕겼다. 그러나 또 한 차례 놀랄 만한 일들이 벌어졌다.
“사격한 자들은 우회하라!”
창병들에게 사격을 마친 왕국 기병들이 말들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달려오며 벌려 두었던 공간을 따라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왕국궁과 일반적인 열도궁은 상반신의 힘만으로 당기는 것들이다. 거기에는 나투아 대궁과 같은 극적인 사격 거리 차이가 없었다. 자연히 후열에서 발사한 화살들은 빈 땅을 때릴 수밖에 없었다.
“발사!”
그렇게 화살이 때리고 지나간 빈 땅에 그 뒤를 달리던 왕국 기병이 다시금 화살을 쏘았다. “억!” “흐억!” 또 한 차례 전열의 창병들이 거꾸러지는 것을 왕국 기병들은 보지도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깔끔한 치고 빠지기였다.
폭풍 언덕은 열불이 터졌다.
“아니 이 개같은 종자들! 기병을 뭐 이따위로 운용해!? 전쟁 거지같이 하네!”
명가에서 몇 차례 가문전(家門戰)을 경험해 본 폭풍 언덕으로서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을 만 했다.
오와 열을 갖추고서 상대의 진형을 뭉개고 지나가는 것이 본디 널리 쓰이는 기병의 활용법이다. 하지만 그 기병들 대다수가 마상궁(馬上弓)에 조예가 있거나 원거리 병장기를 다룰 줄 안다면 정반대의 활용 또한 가능해진다. 오와 열을 의도적으로 흩어버림으로써 각각의 기동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극한의 승마술과 기예를 요구하는 이 기병 운용술은 쉴 새 없이 쪼아대며 치고 빠지는 꼴이 벌떼의 움직임을 연상케 한다 하여 ‘벌떼 전술’이라 불렸다.
만능 전술은 아니다. 완전 무장한 알실라 정예병이나 나투아 대방패 앞에서는 화살과 인명의 교환비가 극적일 정도로 떨어지게 된다. 거기에 왕국궁보다 극적인 사거리 우세를 보이는 나투아 대궁이 더해지면 시도하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전투를 개인의 역량에 맡긴다는 이야기는 기병의 돌파력은 물론이요, 군대의 강점인 통솔력과 견고함을 희생하게 된다는 뜻이다. 기동력이 높은 만큼 후퇴하긴 편하지만, 그래도 삐끗하는 순간 각개격파 당하기 딱 좋은 반쪽짜리 전술이다.
하지만 그런 반쪽짜리 전술이, 지금 같은 상황에는 딱 들어맞았다. 이쪽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상대에게 일방적인 출혈을 강요한다는 기적의 교환비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폭풍 언덕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처럼 있다가는 야금야금 뜯어 먹힌 끝에, 다시금 오와 열을 회복한 기병들의 일제 돌격으로 무너질 것이었다.
폭풍 언덕이 외쳤다.
“전원 산개! 알아서 도망쳐라! 항포성에서 보든지 영원한 평야에서 만나든지 하자!”
폭풍 언덕은 곧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항포성을 향해 달려가는 그의 뒤를 부관들이 쫓았다.
“원정 가주님! 같이 갑시다!”
“저도! 저도 좀 데려가요!”
그렇게 말을 탄 지휘 계층들이 전선을 이탈하는 모습에, 징집당한 알실라인들은 배신감에 사로잡혀 울부짖었다.
“이런 더러운 강생이 새끼들!”
“야! 니들 혼자 튀는 법도가 어딨노 이 문딩이 새끼들아!”
반면 흑열도인들은 배신감에 사로잡혀 울부짖진 않았다. 그들은 일상을 일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이들이었다.
“에이 참, 이렇게 될 거 같더라니!”
“하여간 폭풍 언덕 저 새끼 무사장 시절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생긴 건 아주 원숭이 같이 생겨가지고….”
“됐고 항포성에서 보자!”
“아니면 영원한 평야에서!”
손에 든 장창은 버렸다. 열도궁도. 명가의 병졸임을 뜻하는 묵빛 외날도만 패검한 채 열도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렸다.
“호! 호! 후우! 호!”
“호! 호! 후우! 호!”
그렇게 패주하는 적들을 가만히 놔두어서야 장수라 불릴 수 없을 것이다. 아신군 또한 원기윤이 아니었다.
왕국의 늑대가 노호했다.
“모두 쓸어버려라!”
왕국 기병들은 다시금 간격을 좁혔다. 속도도 높였다. 왕국궁을 집어넣고 투창을 들었다.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됐다.
항포성을 나선 1천 보병들 중에 살아남은 이들은 채 200도 되지 않았다.
◈ ◈ ◈
살아남은 200 중에 항포성으로 돌아온 이들은 채 마흔도 되지 않았다.
항포성 옥좌에 앉아 폭풍 언덕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말했다.
“실로 불행하고 불운하기 그지없는 사태였다….”
폭풍 언덕을 따라 함께 도망친 부관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원정 가주님.”
“용맹하게 싸우던 병사들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폭풍 언덕은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그들을 살리기 위해 선두에서 얼마나 분투했느냐? 선두에서 달려오던 기병대장의 칼을 직접 가로막았지.”
“제가 그 곁에서 놈의 명줄을 땄지요.”
“저는 놈의 말을 잡았습니다. 그 때 입은 상처가 여기 아닙니까?”
언제나처럼 허황된 무용담이 오갔다.
이러한 열도인들의 모습은 언뜻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필요한 사회적 의식, 일종의 재신임 절차였다. 누군가 이 무용담에 딴지를 건다면 폭풍 언덕은 패전의 책임과 원정 가주 자리를 걸고 그 자와 대결하게 될 터였다.
다행히도 그런 자는 없었다. 이는 폭풍 언덕이 영원한 평야로 떠나기 전까지 이 모든 무용담이 정사(正史)가 된다는 사실을 뜻했다.
폭풍 언덕이 충분히 운이 좋다면 검은 열도의 모든 이들이 그의 전설적인 투쟁심과 헌신적인 동료애를 입에 올리게 될 것이다. 영원한 평야뿐 아니라 이승에서의 영광도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먼 이야기였다. 폭풍 언덕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그럼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해야 하겠다. 아까 보니 월국 기병 숫자가 대략 400가량 되어 보이더군. 황금성이 떨어진 건지, 아니면 황금성 포위를 계속하면서도 그만한 병력을 빼돌릴 수 있는 건지 모르겠군. 열도해를 메우고 있던 전함들을 보면 후자여도 이상하지 않겠다만, 우리에게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부관이 동의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해전에서 너무 큰 승리를 거둔 탓에 방심한 것 같습니다. 여기는 우리가 살던 땅이 아니지요. 지원군들이 오기 전까지는 몸을 사려야겠습니다.”
재신임 절차가 끝난 만큼 담담한 어조로 현상 파악과 차후 계획이 이루어졌다.
폭풍 언덕이 정리했다.
“항포성을 진지 삼아 버틴다. 정찰병과 탐망선을 뿌린다. 언제든 열도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함선들 역시 준비해 놓는다. 즉각 시행해라.”
웅크린 채 촉각을 뻗치는 말미잘 작전이었다. 버티기 위한 작전인 만큼 큰 이득도 없지만 손해도 없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폭풍 언덕은 인상을 찡그려야 했다.
내보냈던 탐망선이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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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에, 우리 꼬맹이 진짜 대단하네요! 어떻게 이 쪼그만 소조선 위치를 딱 알아 맞췄대?”
30살 공주 전하의 말에 나는 별들의 속삭임을 들었노라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시아람 아저씨가 가슴을 펴고서 말했다.
“우리 도련님이 원래 좀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