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검은 열도 (3)
황금성에서 부악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산이 하나 놓여 있어 직선으로 질러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남강 지류까지 말을 타고 이동하는데 반나절이 걸렸고, 거기서 남강 지류를 따라 꼬박 하루 하고 한나절을 움직였다. 중간에 쉬긴 했지만 고작해야 반나절 정도였다.
‘죽고 싶다!’
이틀간의 강행군에 대한 내 감상은 그 한마디로 수렴되었다.
‘엉덩이 아파! 제기랄! 뭐 이렇게 길이 거지같은 거야!? 죽을 것 같네, 아, 씁, 야 시아람! 좀 천천히 달려 이 아저씨야!’
나는 제함도 조랑말 뀰에서 내려 시아람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첫째는 소년의 몸인 만큼 체력이 딸려서였고 둘째는 조랑말을 타고 가자니 속도가 나지 않아서였다.
“거의… 다 왔군요…. 가능하다면… 남강 지류 위를… 배를 타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서군후 세오도 초주검이 됐다. 가지런하던 턱수염이 물도 안 묻히고 돌바닥에 그어댄 붓마냥 뻗쳐 있었다.
“그래도 서군후께서 부악과 황금성 사이의 병참선을 잘 깔아 주신 덕에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한 시가 급한데 숙영 준비를 하느라 시간 들일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반면 시아람 아저씨는 쌩쌩하니 그런 소릴 해댔다.
‘젠장, 나도 시현군 몸을 쓸 적에는 전장에서 계속 말을 달려도 지치지 않았는데.’
하여간 사람 몸이라는 건 어려도 고생이고 늙어도 고생이다. 인체의 전성기는 정말이지 짧고, 나는 그 전성기를 지났거나 기다리고 있다.
저 멀리 바다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 ◈ ◈
우리가 부악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었다. 부악은 이미 깨어나 있었다.
“세오 후작 각하!”
“어서 오십시오!”
부악은 서군후 세오가 점령했던 곳이다. 서군후의 깃발을 단 기사들이 북문 앞에 모여 일제히 경례를 올렸다.
“남해의 패자 시아람 경도 오셨군요!”
“기적을 일으켰다는 성소년 공자까지!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중에는 우리를 향한 경례도 있었다. 거창한 이명에 저승 입주자들이 반응했다.
[첫 번째 은월: 남해의 패자라….]
[최초의 성녀: 시아람 저 아이, 지난 15년간 사략 해적질 열심히 한 모양이네요. 성실하기도 해라.]
한편 나는 성소년이라 불리고 있다. 거기에 이 부산한 움직임. 준비 상태를 보면 날려 보낸 전서구와 앞서 보낸 전령들이 제 역할을 해준 것이다.
“출항엔 문제 없겠나…?”
승마에 지친 세오가 퀭한 얼굴로 물었다. 필두 기사가 고개를 수그리며 대답했다.
“예, 각하! 지금 즉시 항구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함세….”
세오의 얼굴이 더 퀭해졌다. 내 얼굴도 비슷한 신세겠지.
그렇게 우리는 쉬지도 못하고 항구 쪽으로 이동하는 신세가 됐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음.
“괜찮아.”
“피곤하시다면 조금 쉬시는 편이….”
“됐어. 쉬는 건 배 위에 올라서도 할 수 있잖아.”
나는 그렇게 시아람의 염려를 걷어냈다. 시아람은 걱정 속에서도 수긍했다.
그러는 동안, 세오와 필두 기사는 현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필두 기사가 보고했다.
“수비에 쓸 이들만 남겨두고 모조리 징발했습니다. 금방이라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제함도에서는 뭐라고 하나? 상어떼들은?”
“둘 모두 아직…. 해가 떠있을 때 보냈으니 해가 뜰 무렵에는 연락이 올 것입니다.”
“늦군…. 출항해서, 합류해서, 다시 항포로 향하려면….”
세오가 턱수염을 쥐어뜯으며 항해 시간을 계산했다. 명색이 바다의 패자라는 이명을 가진 시아람이 그런 세오를 도왔다.
“이 계절에는 해류도 바람도 반도를 따라 돕니다. 출항해서 항포까진 한나절이면 닿을 겁니다. 문제는 합류하는데 걸리는 시간이군요.”
“대략 얼마쯤 걸려 올 거라 보시오, 사략선장?”
시아람은 계산했다.
“제함도에 주둔하던 왕국 해군 중 8할은 동해 차단 작전에 들어가 있었지요. 사태가 사태이니 나머지 2할도 온다 치고, 제함도 후작군에 소속된 전함들과 제함도에 정박해 있던 사략 선단들이 온다 치면… 바로 소집해서 출항한다 해도 여기 부악까지 오는데 하루는 걸리겠군요.”
“그럼 제함도의 병력과 합류하는 데에만 하루 하고 한나절 뒤인가.”
“예. 거기에 도련님 말씀처럼 흩어진 왕국 해군까지 규합한다 치면 다시 사흘에서 나흘쯤 늘어나겠지요. 다시 부악까지 오는 데에도 그만큼 시간이 걸릴 테니 모든 준비를 마치고 항포에 가는 것은 대략 보름 뒤인 셈입니다.”
“이미 오는 데만 이틀이 걸렸지. 거기에 보름이 더해진다라. 속도전을 주장한 것 치고는 너무 늦는 것 아니오, 공자?”
마지막 질문은 나를 향한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빡세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엉덩이뿐 아니라 머리까지 터질 것 같다.
‘빌어먹을, 왜 뭘 하려고 해도 시간이 필요하지?’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 짜증스러웠다.
제 아무리 날랜 말에 전령을 태워 먼저 보내도 전달 속도가 썩 극적이지 않다. 그나마 가장 빠른 연락 수단은 전서구인데 그것도 만능은 아니다. 도착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은 똑같은데다가, 반드시 도착한다는 보장도 없다. 결국 새대가리라서 길을 잊어 먹거나 새고기로서 천적에게 포식 당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뭐 없나? 대충 쇠막대기 같은 걸 입에 대고 뭔가 지껄이면 다른 쇠막대기 들고 있는 놈한테 바로 전해지는 그런….’
[최초의 성녀: 예언자님, 그런 어린애 공상 속 산물 같은 것이 실존할 리 없잖아요….]
‘그렇겠지….’
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승에 있는 양반들과는 이렇게 실시간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승에 있는 사람들과는 시간차를 계산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게 새삼 묘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씀해주신 것처럼, 확실히 지금부터 5일 뒤는 너무 늦을지도 모릅니다.”
부악은 항구 도시였다. 늘 바다와 맞닿아 있는 곳 특유의 냄새가 났다. 땀에 젖은 소매로 얼굴을 덮고 숨을 쉬는 듯 밍밍한 짠내. 섬이 아니어서인지 제함도의 그것처럼 독하지는 않았는데, 내게는 그것이 다행스럽기보다 아쉽게 느껴졌다.
“이렇게 하지요.”
나는 손가락을 폈다.
“합류 지점을 여기가 아니라 항포 인근으로 하는 거예요.”
세오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런 세오에게 나는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전함들… 서군후께서 가진 병력을 먼저 출진시킵니다. 항포 부근에 있는 해맞이곶에 정박한 채 증원군을 기다립니다. 그렇게 포위망을 점층적으로 덧대어 가는 거예요.”
“하지만 그래서는….”
“이 경우 가장 위협적인 순간은 두 시점일 겁니다.”
나는 세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첫째. 제함도 측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의 하루. 그 전까진 온전히 서군후의 군세만으로 포위망을 형성해야 합니다. 적들이 그 틈을 찔러 공세를 가해온다면 버티지 못하겠지요. 그렇게 서군후의 군세가 스러지면 뒤이어 올 증원군들도 하나하나 각개격파당해 자칫 남은 해상 전력 모두가 소멸할 수도 있습니다.”
“….”
“둘째. 무사히 하루가 지나 제함도 측 증원군과 합류하면 원기윤이 지휘하지 않는 이상 허망하게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열도 측에서 증원군이 올 경우로군요. 공주 전하께서 흩어진 왕국 해군들을 모아올 때까지 또 한 차례의 고비가 되는 셈입니다.”
세오는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부악이 아닌 해맞이곶에서 모인다…. 이것이 시간을 단축하는 이점이 있다는 건 알겠소. 그에 따른 위험이 있다는 것도. 그러나 공자가 말한 첫째 문제가 과연 무릅쓸 가치가 있는 건지 모르겠군. 가장 합리적이고 무난한 해법은 제함도 군세와 합류한 다음 항포로 향하는 것이겠소. 1차적인 안전성을 챙기면서 속도도 크게 떨어지지 않을 테니 말이오.”
“저 역시 그렇게 여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다음 가로저었다.
“하지만 모험해 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지근거리에 접근해 놓으면 다양하게 변통을 들일 수 있으니까요. 싸우든 싸우지 않든, 정찰만 하든 상황을 보아 기습을 가하든 이쪽에 우선권이 생기는 셈입니다. 그 정보 우위는 하루 뒤 제함도 증원군이 합류했을 적에 즉각적인 판단 소재로 작용해 주겠지요.”
“그건 지나치게 희망적인 생각 아니오?”
“아니오, 냉정하게 판단한 결과입니다. 제함도 증원군이 올 때까지 열도인들은 정신이 없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세오는 턱수염을 잡아당겼다. 피로에 찌들어있던 눈동자에 총기가 살아났다. 그는 이해했다.
“하긴 그렇겠군. 지금쯤 공자가 전달한 계획을 시행하고 있을 테니.”
나는 쓰게 웃었다.
“저 또한 별들로부터 받았던 계책입니다만, 예. 딱 지금쯤 남전후와 상현공, 세자 전하께서 시행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계책이 제대로 먹힌다면, 검은 열도에서 온 침략자들은 최소한 하루 동안은 바다에 신경 쓰지 못하게 될 터였다.
◈ ◈ ◈
폭풍 언덕은 유능한 인물이었다. 원정 가주 역할을 따낸 지 하루 만에 자잘한 일거리와 논란거리를 모두 정리해버린 것이다.
그는 그렇게 연합군을 자신의 의지 아래 귀속시켰다. 열도에서 지원군들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이 폭풍 언덕 체제가 이어질 것이다. 견고한 체제와 단단한 지휘권을 바로 세운 장본인으로서 휘하 병력을 유용하게 사용해야 할 터였다.
폭풍 언덕에게는 그만한 계획이 있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우리 열도의 후예 알실라를 환난으로부터 구하러 왔다. 그러니 알실라인들은 어버이와 같은 우리들에게 전폭적인 협조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협조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이는 도우러 온 자를 거부하는 배은이며 어버이를 배신하는 망덕이니 눈물을 흘리면서도 벌하지 않을 수 없다. 부디 그런 슬픈 일이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렇게 물개가 사과 씹어 먹는 소리를 던져 놓고는 항포 전체에 총 동원령을 걸었다. 죄 썩어 가는 곡식 한 톨, 다 죽어가는 노친네 한 명 남기지 않는 철저한 징발이었다.
“알실라인들이여, 분하지 않은가!”
그렇게 모여선 알실라인들에게 흑열도인들은 연설했다.
“그대들은 병사가 되지 못했다. 그대 조국의 지휘관들은 그대들을 시민으로 남겨두었다. 누군가는 너무 어려서, 누군가는 거꾸로 너무 늙어서, 누군가는 몸이 불편해서…. 그렇게 제각기의 이유로 그대들은 병사가 될 기회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분하지 않은가!”
폭풍 언덕이 지시한 내용들을 입에 담을 때마다, 흑열도 인들의 얼굴에 그려진 전투 문신들은 울끈불끈 움직였다.
“그대들이라고 조국의 위기를 외면하고 싶었겠는가. 고향을 지키기 싫었겠는가. 하물며 조국 전체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지금 그런 마음이 어찌 꼭지까지 차오르지 않았겠는가! 분하지 않은가!”
흑열도인들은 강하게 외쳤다.
“우리는 차별하지 않는다. 이웃과 친지를 위해 검을 들 기회를 주겠다. 영웅이 될 기회를 주겠다. 동포들이여! 열도의 후예들이여. 같은 피를 가진 자들이여. 가자! 전장으로! 가자! 영원한 평야로!”
가슴 벅찬 연설이었다. 모여든 알실라인들 일부는 감동하여 무기를 들었다. 나머지는? 알실라 군, 원기윤 제독 휘하 왕국 해군, 흑열도인, 이렇게 서로 다른 주체에게 총 세 차례 징발을 당한 항포성 주민들에겐 그야말로 남은 것이 없었고, 빌어먹을, 굶어 죽지 않으려면 하자는 대로 해줘야 했다.
폭풍 언덕은 그들 중 그래도 멀쩡한 이들을 추려 보병대를 몇 개 편성했다. 고기방패였다. 나머지는 흑열도 병사들을 시중들게 시켰다. 노예였다. 다만 고기방패라거나 노예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으며, 흑열도 병사 중 누군가가 그런 말을 입에 담으면 곤장을 쳤다. 한 마디 아끼고 한 명 벌주는 것으로 알실라인들은 좀 더 순종적인 고기방패가, 좀 더 충성스러운 노예가 되었다. 얄팍한 수작이라 해도 알실라인들은 좀 취하고 싶었다.
“병력을 보충했으니 싸워야겠지. 근처에 적당한 마을이 있나?”
“예. 항포성 토박이들 말로는….”
폭풍 언덕과 그 휘하 병사들은 오래지 않아 털어먹을 만한 마을 하나를 정했다. 알실라를 구원하러 왔다면서 왜 알실라 마을을 털겠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지만 목표가 정해졌으니 그런 사소한 문제는 친 다음 생각해도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항포성을 나서기 전에 변수가 벌어졌다.
“원정 가주님.”
“왜?”
“알실라 기병대가 왔습니다. 황금성 포위망을 겨우 뚫고 왔다고 합니다. 자신들을 도와달라는군요.”
폭풍 언덕은 눈을 깜빡였다.
“알실라에 기병이 있어?”
“그게, 있다는 것 같습니다. 마갑을 입힌 조랑말을 타고 왔더군요. 만나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