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설마 이 원기윤 제독을 믿지 않은 건가? (2)
나이가 아닌 능력을 고려해달라는 내 말에, 성은대군은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것이… 공평함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성은대군을 바라보았다.
성은대군은 잠시 진저리를 치고는 말했다.
“제 할아버님… 무왕 폐하께서도 어린 나이에 옥좌에 앉으셔야 했지요. 무수한 국난을 이겨내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할아버님께 과연 어떤 영향을 끼쳤겠습니까.”
오랜 시간 생각해 온 것을 말하는 것처럼 신중한 어조였다.
“할아버님의 위대함은 나무의 늠름함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버거운 삶을 사시는 동안 그 피부에 새겨진 굳은살들이지요. 그것들은 위업인 만큼 흉터이기도 합니다. 적어도 미덕이 되어 당연히 여겨지고 선례가 되어 권해져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단호한 어조이기도 했다.
“그건 학대입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스승하곤 딴판이네.’
시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세자의 스승 루지아는 시왕의 위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세자는 무왕의 상처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있었다.
‘잘 자란 거야.’
마음에 들었지만, 나는 그런 만족감을 표현하는 대신 한 바퀴 돌려 물어보았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어요, 세자 전하. 무왕 폐하께서 보위에 오르지 않으셨다면 이 나라가 어찌 되었겠나요?”
“어쩔 수 없는 시절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 시절은 이제 지나지 않았습니까.”
성은대군은 손을 들어 지도를 쓰다듬었다.
“그 시절에 비해 질서는 굳건해졌습니다. 반도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지금보다 어려운 시기에 훨씬 더 힘겨웠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너희는 왜 참고 견디지 못하느냐.’고 꾸짖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시기가 지났으니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다오.’라고 말하는 것. 시간이 흘렀을 때 시간이 흘렀다고 말하여, 실제로 지금의 시간을 흐르게 하는 것이 위에 서는 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나쁘지 않군.’
세자의 말처럼 반도는 하나가 됐다. 왕국민들은 이제 통일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야 한다.
나야 그 세계가 어떠한 곳인지 안다. 미래로부터 왔으니까. 하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것은 완전한 미지의 세계일 것이다.
미지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계획이 필요하다. 세자는 지금 통일 이후의 세계에 대한 전망을, 그곳에서 자신이 어떤 왕국을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공약을 제시한 것이다. 멍하니 다가오는 미래를 쳐다보고만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역시 내색하지는 않고 돌려 물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전장에 나설 수 없도록 하실 건가요, 전하?”
“전장뿐 아니라 말씀하신 다양한 분야에서 보호할 생각입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공평함의 정의니까요.”
“어째서인가요?”
지금은 내가 살던 500년대가 아니었다. 논자 등의 철학가들이 윤리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아동복지 같은 것은 혈육의 정이나 개인의 가치관에 맡길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이미 내가 ‘정’을 부정한 바 있으므로, 성은대군은 감정이 아닌 가치관에 기대어 말했다.
“역량에 맞지 않는 자리를 맡기는 것은 그 사람을 해하는 것이고, 그 자리를 해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살아온 시간은 곧 그 사람이 겪는 경험의 총량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역량입니다.”
적어도 자신이 자신을 온전하게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는 기다려주어야 한다고 성은대군은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조금 전 할아버님의 예시를 들었습니다만, 제 아버님 역시 제 절반도 될까 말까 한 나이에 전장을 달리셨지요. 그분께서 이따금 날 선 면모를 보이시는 것에 그 영향이 없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겁니다.”
음.
자식으로부터 이해받을 수 있는 부모란 그것만으로도 복 받은 존재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성이는 정말이지 복 받은 녀석이었다….
[첫 번째 은월: 그 전에 너를 만나 저주받았지….]
[개천의 시왕: 보았는가, 길잡이여. 네 삶이 산 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중요한 문제다만, 네 죽음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파악해 두도록 해라.]
[최초의 성녀: 그러고 보면 그거 가장 처음 당한 게 비류아였네요.]
‘아, 좀!’
선조님들이 그런 헛소리나 늘어놓는 동안, 차세대의 은월은 조용히 선언했다.
“아이가 어른이 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 왕국에 이제 그 정도의 여유는 생겼을 것입니다.”
나는 살짝 웃었다.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 저부터 실천해야겠지요.”
성은대군은 가만히 나를 보았다.
“휘파랑 공자. 공자께서 자신을 의지해 달라 말씀해주신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 말씀에 따르면 저 자신은 편해지겠지요. 하지만 저 자신이 그대로 행하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은 공허하지 않겠습니까.”
‘올바른 말이야.’
그리고 그만큼 귀여운 말이기도 했다.
“전하께서 편하신 것이 곧 왕국 전체가 편해지는 길이에요.”
내가 뒷짐을 지며 꺼낸 말에 성은대군은 조용히 답했다.
“편해지는 것에 한도는 없습니다. 안온함 속에 눈을 감으면 영원히 자게 됩니다.”
“그건 전하께서 정신을 차리시면 되는 일이죠. 항시 경계하며, 편의에 젖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요.”
나는 성은대군을 똑바로 보았다.
“달을 따라 걷는 것은 좋아요.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자신의 발이 땅에 닿아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돼요.”
“….”
“똑바로 생각하세요. 전하께서는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어 거기에 매진하고 싶은 건가요? 아니면 단순히 나쁜 사람이 되기 싫은 건가요?”
성은대군은 침묵했다. 잠시였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욕심입니까?”
전력을 다하기 위해 서로를 죽여야 했다고 말했던 공주의 오라버니는 살짝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좋은 사람이고 싶다는 것, 바른 일을 하고 싶다는 것… 분명 저는 그러한 것을 바랍니다. 하지만 공자 역시, 자신을 다스릴 군주를 고를 수 있다면 ‘좋은 사람’을 택하지 않겠습니까?”
“아니요.”
“그럼 유능한 사람을 택할 겁니까?”
“아니요. ‘좋으면서 유능한 사람’을 택하겠죠.”
성은대군은 멈칫했다.
나는 한숨을 지었다.
“전하. 저는 도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와 유능함이 상반된 것이라 여기지도 않고요. 다만 전하 식으로 말씀드리자면,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것 역시 역량을 필요로 하는 일이에요. 그만한 역량이 없는 사람이 그런 일을 한다면 단지 자기 손을 더럽히긴 싫다는 욕심일 테고요.”
“저는….”
“이상을 보면서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위에 서는 자의 업일 거예요. 그리고 얼마나 이상에 맞출 수 있는가가 위에 서는 자의 능력일 테지요. 그러니 전하께서는 스스로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는지를 여쭈시는 것이 먼저일 거예요.”
나는 성은대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냉정하게 생각하시고 객관적으로 파악하셔서 현실적으로 말씀하세요. 세자 전하께서는 과연 저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유능하신가요?”
성은대군은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 후, 그가 고개를 떨구었다.
“저는….”
바로 그 때였다.
바깥이 돌연 소란스러워졌다. 나와 성은대군은 대화를 멈추고 회의실 입구를 바라보았다. 오래지 않아 그 입구로 성은대군의 부관이 들어섰다. 잔뜩 흐트러진 기색이었다.
“세자 전하,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성은대군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왕도에서 말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르군요. 전서구가 도착한 겁니까?”
성은대군의 부관은 시뻘게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더니 무릎을 꿇고는 넙죽 조아렸다.
“아니요, 동쪽에서입니다! 검은 열도의 4개 명가가 연합을 맺고 항포를 점령! 이 황금성을 향해 진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
니들이 왜 여기서 나와…?
◈ ◈ ◈
오래지 않아 곳곳에 흩어져 있던 군주들이 황금성의 어전에 모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실라 최고 권력자가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하고 한탄했을 법한 옥좌에 앉아 성은대군이 말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알실라의 중진 중 한 명이 ‘대체 경문산성을 지키던 장수는 뭘 한 겁니까?’ 하고 외쳤을 법한 자리에 서서 아신군이 외쳤다.
“대체 원기윤 수군통제사는 뭘 했다는 겁니까!”
경문산성 장수가 속한 파벌의 수장은 아무리 대단한 권력자였을지라도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상현공 루지아 역시 잠잠했다.
그러자 역시 알실라 중진 중 한 명이 어물거렸을 법한… 아, 집어 치자.
왕국 중진 중 하나가 어물거렸다.
“듣자 하니 기습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군량선에 불이 붙었는데….”
“아니, 어떻게 기습을 당했다고 해도 그 많은 함대를 뚫고 항포를 점령했단 말이외까? 집안 4개면 그리 많지도 않을 것 아니오!”
“검은 열도의 ‘명가’를 왕국이나 대륙의 ‘귀족가’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 놈들의 명가라는 것은 말하자면 영지에 가까워서….”
“그렇다 쳐도 4개 ‘영지’ 아니오! 반면 동해를 틀어막고 있던 군함들은 ‘나라’의 것이었고! 그 규모가 비견이 안 될 진대 어찌!”
“그게… 그러니까 복잡한데….”
이어진 설명은 과연 복잡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검은 열도의 지원군이 항포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달성해야 할 두 가지 조건들이 있었다.
문 1 검은 열도는 왕국 해군의 수적 우세를 어떻게 극복했는가?
문 2 질적 우세는 또 어떻게?
보고 내용은 그 두 개의 조건을 달성하기 위해 그야말로 안간힘을 쓰는 느낌이었다.
“검은 열도 측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은 아실 겁니다. 그래서 원기윤 수군통제사 역시 탐망(探望)에 주의를 기울였는데… 그 와중에 검은 열도의 배 몇 척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걸 쫓던 중에 왕국선 12척을 잃어버린 것이 그… 발단입니다.”
“아니, 어쩌다가 12척이나 잃어버렸단 말이오? 그것도 왕국선을? 설마하니 함정에 빠져 기습을 당한 것이오?”
“그게… 떠내려갔답니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뭐가?”
“왕국선들이….”
“어쩌다가?”
“그 탐망선을 깊이 쫓다가… 그날따라 유속(流速)이 빠른 곳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빨리 벗어나야 하는데 하필 노잡이들이 기운이 빠져서 그만….”
‘뭔 소리여 이게.’
나만 그 생각을 한 게 아니었는지 싸한 침묵이 흘렀다.
성은대군이 침착하게 정리했다.
“그러니까 나라의 수군을 맡고 있는 자가, 날랜 배 몇 척에게 따로 지시를 내리는 게 아니라 전군을 부려 쫓도록 했다. 그것도 노잡이들이 지칠 때까지 닦달하는 통에 어처구니없이 사고를 당했다는 겁니까?”
“예. 그런 상황에… 검은 열도 측의 연합 전함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을 쳤습니다.”
“쳤는데?”
“한동안 그렇게 대치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던 와중에, 새벽이었다는데, 군량선 한 척에 불이 났다고…. 보니까 그, 검은 열도의 소조선 몇 척이 기어들어와 왕국 전함들 사이를 종횡무진하면서 아주…. 짙은 안개 속에 갑자기 그런 일을 당하니 원기윤 수군통제사가 무척 경황이 없어서….”
어느 쪽이냐면 이런 소식을 들어야 하는 우리들이야말로 무척 경황이 없었다.
더더욱 경황이 없는 일은 이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하여간 경황이 없어 일단 퇴각 명령을 내렸는데… 그 지시가 전달이 제대로 안 되었는지 어쨌는지, 배들이 한 방향으로 퇴각하는 게 아니라 뿔뿔이 흩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각개격파를 당했다고?”
“어… 그 뒤에도 항포로 퇴각해 수성을 하니 어쩌니 하는 요란한 일들이 있었는데, 요약을 하자면 그렇습니다.”
아신군이 뒷목을 잡았다. 그 얼굴이 벌게진 것은 승전을 기리기 위해 마신 술기운 때문은 아닐 것이다.
“뭐, 뭐라고? 그게, 그게 지금 대체, 그, 아니 도대체가 말이나 되는 소리요!?”
왕국 중진 역시 입을 다물었다. 그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고 여겼을 거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윤아….’
너를 믿었던 내가 전설이다, 이 염병할 새끼야….